*콘텐츠가 보이지 않을 경우 펼쳐보기를 눌러 확인하세요!
spenser sembrat. unsplash

장이 약한 친구가 있다. 신장은 166cm이고, 내가 아는 사람 중에서 가장 몸이 가늘다. 그 친구는 파스타를 좋아하고 요리도 잘하지만, 배탈이 자주 나고 짧은 주기로 극심한 장염을 앓는 만큼 먹고 마시는 일에 항상 신중하다. 한여름날 야외 카페에서도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주문해 천천히 마시고, 같이 1박 이상 여행이라도 가면 반드시 배앓이하는 걸 보게 된다. 알고 지낸 지 오래되다 보니 이제 만나는 날이 되면 '오늘은 몸이 어떠냐'고 자연스럽게 물을 정도. 내심 쉽지 않은 체질이려니 싶었다. 누군가의 집에 모였던 어느 날 밤, 친구는 어김없이 탕파(따뜻한 물주머니)를 배에 대고 속을 달래고 있었다. 연륜이 묻어나는 그의 침착한 대처를 보며 안쓰러운 기분에 장난스럽게 물어보았다. “네 체질이 완전히 건강하게 바뀐다고 쳐. 대신 키가 5cm 작아져. 그럼 그렇게 할래?” 대답은 빨랐다. “5cm는 안 돼.” 답을 정하고 묻지 않았는데도 놀랐다. 평생 자신의 위장을 돌봐야 하는 고단함에서 해방되기보다 5cm 더 크게 사는 것을 택하겠다고?

여기서 관점의 차이를 깨달았다. 내가 친구에게 던진 물음은 '166cm의 만성 소화불량' vs. '161cm의 강철 위장'. 두 선택지 사이에서 고르는 밸런스 게임과는 차원이 다르다. 이미 전자의 상태로 본인의 삶을 건사해 온 그에게는 신장 5cm(이미 갖고 있는)를 잃고 위장 건강(가져본 적 없는)의 세계를 상상하는 문제였다. 내게는 만성 소화불량이라는 고난을 피하는 것이 시급한 문제로 느껴졌지만 그에게 소화불량은 미지의 고난이 아니라 익숙하게 관리 가능한 상태이고, 166cm로 살아온 자만이 알 수 있는 (나는 알 수 없는) 이점을 저버릴 정도의 곤란은 아니었던 것이다. 비슷한 밸런스 게임을 내게도 적용해 보니 더욱 명확해졌다. 내가 가진 저주받은 체질을 완전히 없애준다 해도 나는 내 키를 단 2cm도 내놓고 싶지 않았다. '그럼 나는 무엇을 내놓을 수 있을까?'를 궁리하다 깨달았다. 나는 지금의 내가 아닐 때의, 이 체질이 아닌 삶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이 불편이 없을 때의 좋음조차 상상하기 어렵다는 것을. 상상된 것, 겪어보지 못한 것에 실질적 가치를 매기기란 쉽지 않다. 물론 건강 체질이 된다면 좋겠지만 무언가를 확실히 내놔야 한다면 '그냥 이렇게 살래'라는 강렬한 안주 욕구. 하지만 누군가는 매우 의아할 수도 있다. '저런 상태로 계속 살겠다니 딱하다'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thomas richter. unsplash

누리던 작은 것을 포기하는 일이 누려보지 못한 큰 것을 상상하는 일보다 어렵다. 아마 모든 사회변화 운동이 어려움에 부딪히는 것도 이런 이유일지 모르겠다. 예컨대 평등한 조직문화가 발달하면 사회 전체의 생산성과 행복지수가 높아진다는 연구 결과가 쌓여도 그런 조직문화를 누려본 적 없는 사람은 다가올 미래를 위해 지금 투자하는 것이 손해라고 느낀다. 겪어보지 않은 행복을 모르기에 고작 1cm의 이점이라도 이미 손에 쥔 것을 붙잡게 된다. 민주주의나 성평등 가치에 대한 반동(백래시), 친환경 정책에 대한 반동(그린래시)의 문법도 여기에 기초하는 듯하다. 사회 각계각층의 백래시와 더불어 그린래시 또한 지난해부터 선진국을 중심으로 확산 중이다. 영국은 노후한 공해 차량에 벌금을 물리는 제도가 과격 반발 시위를 맞닥뜨렸고, 네덜란드 · 독일 · 미국 등에서도 친환경 정책에 반대하는 극우 정당들이 지지를 얻고 있다. 아무도 파괴된 지구와 자연재해를 원치 않을 텐데 놀랍게도 이를 완화하기 위한 규제와 정책에는 반발이 거세다.

당장 요구되는 변화와 비용을 명백한 '내 손해'로 감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환경과 장기 공생해서 미래 사회를 살아가는 누군가는 현재의 인류를 보면서 '어리석고 딱하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택배를 하루 만에 받는 편리를 위해 생애 대부분의 시간을 일하고 건강권을 포기한 시대'와 같이 조롱당할지도 모른다. 사회 시스템이 한계에 달했다는 연구들이 이미 이렇게 많음에도 '그냥 이렇게 살래'라며 미적거렸던 21세기 사람들에게 의문을 품으면서 말이다.

좀 더 나은 미래는 막연하다.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환경과 평등 같은 문제는 공상적 밸런스 게임과는 다르다. 불평등으로 인한 착취나 기후 위기는 절대 다수 인간의 현실이다. '몇 센티미터까지 양보할 수 있겠냐'며 개인에게 맡길 것이 아니라 사회 전체가 방향을 틀어야 하는 문제다. 모두의 현실임에도 개선된 미래를 상상하고 실현하기를 게을리하는 데는 명백히 이권이 개입한다. 기후 · 생태 활동가이자 작가인 김한민은 이 문제를 '지휘관의 전역 후에 터지는 폭탄'에 비유했다. 시한폭탄이 터지기 전에 전역할 지휘관에게, 즉 한시적 권력을 누리고 물러날 정치가에게 미래와 생존을 온전히 맡겨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백래시는 언제나 기득권을 위한 정치 행동이다. 여기에 속지 않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상상력과 결단이 필요하다. 거센 백래시의 시기, 부디 정신 차리고 살아보자는 인사를 지인들과 나누며 새해를 시작했다.

Writer 이두루
페미니스트 출판사 봄알람 대표. 〈우리에겐 언어가 필요하다〉와 〈김지은입니다〉 등을 펴냈다. 현실을 다룬 텍스트와 논의가 여성의 삶에 즉각적으로 개입하는 힘을 믿는다.
- <엘르> 2024년, 2월호 발췌

까치 까치 설날은_+보이스

당신께 고운 마음으로 건넬 맛있는 설날 선물.  

우엉 정과와 더덕 정과, 가격 미정, 효자동디저트.


온기와 정을 품은 정과

2~3월이 제철인 뿌리채소 우엉과 덩굴식물 더덕. 정과는 4일간의 조리 과정 끝에 완성된다. 그 과정에서 우엉과 더덕 각각 한 뿌리당 3분의 1의 양만 얻게 된다. 들인 시간에 비해 적다면 적은 양, 그래서 더욱 인고의 시간처럼 느껴진다. 한국식 디저트를 선보이는 ‘효자동디저트’는 경상북도 영주에서 수확한 우엉과 강원도 횡성에서 수확한 더덕을 말끔하게 씻어 껍질을 깎아낸다. 적당한 크기로 잘라  오랜 시간 삶고 조리는 과정을 3일 동안 반복한다.  바싹 마른 우엉과 더덕에 조린 원당을 입히고 계핏가루를 듬뿍 뿌려 향을 낸다. 두 정과 모두 식감이 쫀득하며, 우엉 정과는 효자동디저트가 특별히 아끼는 간식이다.  단순한 재료가 새로운 음식과 풍미로 거듭나는 일에는 언제나 온기와 정이 담기기 마련이다.

말똥성게, 가격 미정, 통영 해녀촌 식당.


고귀한 마음이 담긴 말똥성게

귀하게 얻은 선물은 그 자체로 귀한 마음이나 다름없다. 겨울부터 봄까지 제철인 말똥성게는 부산에서는 ‘앙장구’, 통영에서는 ‘강장구’로 불린다. 수심 7m 암초나 바위 밑에 서식하는 말똥성게를 잡기 위해 해녀는 겨울철이면 수온 10℃의 바닷물에 뛰어든다.  한 번에 5시간 동안 작업하며 자신의 몸보다 무거운 바위를 밀고 들춘다. ‘물질’을 하고 나면 몇 시간 동안 앉아 말똥성게를 여는 작업을 이어가야 한다. 말똥성게는 일반적으로 잘 알려진 보라성게보다 바다 향이 진하고 고소하며, 한층 풍부한 영양소를 자랑한다. 그러나 명맥이 이어질 수 있을지 불투명한 해녀처럼 말똥성게의 개체수도 점점 줄어들고 있는 게 현실이다. 이토록 귀하게 얻어지는 말똥성게는  그 자체로 귀한 마음이다.

돌배조림, 4개당 3만3천원, 거창한국수.


알고 보면 아름다운 돌배  

거창에서만 자라는 돌배는 울퉁불퉁하고 못생겼다. 매번 판매에 낙방당하는 작은 돌배를 안타깝게 여긴 농민들은 이를 갈아서 배즙을 만든다. 돌배의 매력은 먹어봐야 알 수 있다. 아삭아삭 식감이 살아 있고 수분이 많으며, 모과나 바나나가 뒤섞인 오묘한 향을 가졌다. 이러한 매력을 살리고 싶었던 ‘거창한국수’의 대표는 작은 돌배로 조림을 만든다. 돌배를 일일이 깎아 스페인산 레드 와인과 레몬즙, 계피, 정향, 팔각 등 다양한 향신료와 함께 오랜 시간 조린다. 우리나라 토종 배는 삶으면 배숙이 되지만, 돌배는 딱딱해서 삶아도 쉽게 망가지지 않는다. 레드 와인을 가득 머금어 달달하고 새콤한 돌배조림. 매년 12월부터 2월까지 맛볼 수 있는 귀한 디저트다. 크림치즈를 듬뿍 얹어 샌드위치처럼 먹어도 맛있다.

*영화 <시민덕희> 스포일러 일부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용기 있는 목소리가 세상을 움직이는 이유
_영화 <시민덕희> 리뷰

✅보이스 초이스✅

뉴스레터, 브랜드, 서비스, 책, 전시, 공간까지 엘르보이스가 눈여겨보는 다양한 이야기를 전합니다. 


박영주. 시민덕희 [영화]. (주)쇼박스. 포스터


지난 88회차 엘르보이스에서는 <시민덕희> 라미란 배우와 박영주 감독의 인터뷰를 실었는데요. 문득 영화가 궁금해지던 찰나 엘르보이스 담당자 지나의 재밌다는 영화 후기를 듣고 곧장 영화관으로 달려갔습니다.


<시민덕희>는 보이스피싱을 당한 덕희가 경찰에 제보를 전했음에도 수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자, 직접 해당 사건의 증거를 수집해 보이스피싱 총책임자를 검거하는 실제 사건을 각색한 이야기입니다.

시민덕희 [영화] 스틸컷, 보이스피싱 제보자 재민


사실 영화 초반부를 보면서는 재밌다기 보다 화가 나서 참을 수 없다는 기분이 먼저 들었습니다. 이전에는 보이스피싱을 하는 사람들 자체의 문제이며 그저 '나쁘다'는 단편적인 생각이었는데요. '보이스피싱을 하는 사람 역시 체계적으로 운영되는 조직에서 폭력과 협박을 당하는 피해자일 수 있다'는 현실을 마주해 당황한 마음이 들었거든요. 그만큼 나와 상관없는 '피해'라고 생각되는 사회적 문제에는 무지했구나 싶었습니다.

시민덕희 [영화] 스틸컷, 사건 조사 중인 박형사와 덕희 


<시민덕희>는 우리 사회가 피해자를 대하는 방식에 대해서도 다시 한번 생각하게 만듭니다. 극 중 경찰은 피해자에게 범죄를 일으키는 집단의 정확한 주소를 알지 못하면 범죄자를 잡을 수 없다거나, 애초에 왜 의심을 해보지 않았느냐며 제대로 된 조사 없이 수사를 종결하는 모습을 보이는데요.


피해자를 질책하거나 원인을 피해자에게 찾는 등의 발언이 현실에서 얼마나 만연하게 일어나고 있는지 잘 보여준다고 생각했습니다. 비단 일부 경찰뿐만 아니라 가까운 가족, 친구, 사회 전반적으로 말이죠.

시민덕희 [영화] 스틸컷, 덕희와 함께 보이스피싱 총책임자 일당을 쫒는 숙자


극 중 보이스피싱 증거를 수집하기 위해 도와주는 친구 숙자의 대사 중 이런 말이 나옵니다.


“언니 잘못 아니야”


모든 범죄의 원인은 ‘가해자’에 있음을 명확히 알려주는 대사를 들으며 울컥하는 감정이 자연스레 생기더라고요. “내 잘못 아냐. 절실한 사람 등쳐먹는 네가 잘못한 거야.” 이후 나오는 덕희의 말처럼 이 영화에서 가장 말하고 싶었던 메시지는 이 부분이 아니었을까요?

시민덕희 [영화] 스틸컷


영화는 보이스피싱 일당을 검거하기 위한 정보를 준 내부 제보자와 일반 시민 덕희의 활약으로 총책을 검거하며 막을 내립니다.


음성으로 사람을 낚는다는 뜻의 Voice + Fishing 처럼 세상에는 절실한 사람들의 마음을 이용하여 누군가의 일상을 쉽게 망가뜨리고 갈취하는 목소리도 분명 있습니다. 그럼에도 사회가 지속될 수 있는 건 영화 <시민덕희>의 민재와 덕희가 그랬던 것처럼 세상이 더 나아지길 바라는 용기 있는 목소리와 행동 덕분이 아닐지 생각해 본 영화였는데요. 


우리 모두가 피해자를 조금 더 따뜻한 마음으로 바라볼 수 있기를. 필요한 일에 용기있는 목소리를 낼 수 있기를 바라며 오늘의 <보이스 초이스 - 시민덕희> 편을 마칩니다.



🍋담당자 노라
각종 아카이빙이 취미인 소비요정 마케터이자 엘르보이스 고인물. 일이 힘들 때마다 구독자 후기를 읽으며 힐링한다.

🔊지난 주 구독자 보이스🔊
매주 여러분의 목소리 중 일부를 전해드립니다. 모든 분의 소중한 피드백 하나하나 귀 기울이고 있으니 오늘의 <엘르보이스>가 어땠는지 자유롭게 남겨주세요 :) 

- 진도믹스 소리의 이야기가 인상 깊었어요. 시골에서 부모님이 키우던 강아지들의 이름과 표정들이 스쳐가는 기사였네요. 세상에 원래 그런 개들은 없는데 말이죠. 저희 부모님은 마지막으로 키우던 강아지를 어처구니 없이 잃고 너무나 상심해서 다시는 생명을 들이지 않기로 하셨습니다. 이 기사를 보는데 그 아이가 생각이 나서 눈물이 났어요. 부모님도 많이 혼나며 그 아이를 돌보셨거든요. 법이 제정되어 기쁘지만 그만큼 서둘러 개 식용이 종식되길 바라게 됩니다. 몽이와 진순이, 다크, 진솔이 .. 같은 강아지들의 이름을 생각하면서요.

해가 바뀐 1월에 읽기 딱 좋은 레터였던 것 같아요. ^^ 사람들의 작은 친절과 호의 덕분에 그래도 살만한 세상이구나 느끼는 요즘입니다. 그런 것들이 모여서 더 좋은 세상이 되는거겠죠.. 저도 <사랑은 낙엽을 타고> 꼭 봐야겠어요.

- <사랑은 낙엽을 타고>라는 영화를 보고 싶었는데 못 봐서 아쉬웠어요. 엘르보이스에서 이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해줘서 좋았습니다.


- 저도 얼마 전에 제 강아지와 헤어졌어요. 아직 실감이 안 나서 내 마음을 정확히 모르겠지만, 그래도 역시 강아지 이야기는 절 행복하게 해줘서 좋았어요. 어느 반려인이 그렇듯 저도 제 강아지를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가득해집니다.

- <사랑은 낙엽을 타고> 영화 참 따뜻하게 보았어요. <나의 올드요크>도 위로가 되는 영화여서 추천합니다.
💌  님, <엘르보이스> 91번째 레터 어떠셨나요? 
님의 감상은 어떠셨는지 궁금해요! 아래 링크에 남겨주시면 정성껏 읽고 다음 레터 준비하겠습니다💕
👋 엘르보이스를 이웃에 소개해주세요! 
더욱 다양하고 반짝이는 여성들의 목소리가 담길 <엘르보이스>, 나만 볼 수 없죠?
동시대를 살아가는 님의 이웃에게도 <엘르보이스>가 널리 읽힐 수 있도록, 아래 링크를 공유해주세요 🙋
📝 구독자 정보를 바꾸고 싶어요!
엘르보이스 속 다양한 이벤트는 구독 시 기재해주신 정보를 통해 안내 및 제공되어요.  님의 구독 정보를 바꾸고 싶다면 이곳을 클릭해주세요✅

허스트중앙 유한회사
서울특별시 강남구 도산대로 156 HLL 빌딩 02-3017-2580
수신거부 Unsubscribe

제휴/광고 문의 - kang.junyoung@hll.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