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불안하신가요? [풀칠 181호]

안녕하세요 풀칠러님. 이주의 당번 파주입니다. 4월의 주제인 ‘괴물’에 대한 두 번째 이야기를 가져왔습니다.

최근 일도 일상도 엉망인 나날을 보냈습니다. 뭘 해도 일이 손에 안 잡히고 싱숭생숭하기만 하더라고요. 이유를 파고들다 보니 ‘불안’ 때문이라는 걸 알게 되었는데요. 이 원인 모를 불안감을 무시하거나 억누르려 할수록 바닥으로 침잠하는 기분이 들기만 했습니다. 몇 주간의 긴 사투 끝에 알게 된 건 불안을 생각할수록 불안해진다는 사실이었습니다.

풀칠러님은 어떨 때 불안을 느끼시나요? 그 불안을 떨쳐내기 위한 노하우가 있으신가요?

한동안 똥 씹은 표정인 채로 살았다. 내가 붙잡고 있는 일이 돌연 쓸모없게 느껴질 때도 있었고 내던지고 싶을 정도로 분노가 치솟기도 했다. 잔뜩 구겨진 표정을 들키지 않으려 재택근무를 하는 날도 잦아졌다. 매일 비슷한 시간에 일어나 빈둥거리다가 간신히 출근을 했다. 배달 음식으로 때우는 게 루틴이라면 루틴이 됐는데 매번 다른 음식을 주문했지만 대부분 비슷한 맛이 났다.

책상에서 먼지를 털어내듯 그날의 업무를 해치우고 나면 방바닥에 드러누워 생각했다. 거의 대부분은 나쁜 방향으로 흘러가는 생각들이었다. 답답한 건 원인이 불명이라는 사실이었다. 회사 일이 많아 고단한 것도 개인사에 문제가 있던 것도 아닌데. 길을 걷다가 난데없이 맨홀에 빠져버린 것만 같은 더럽고 막막한 기분이었다.

습관처럼 켠 유튜브창에는 ‘슬럼프’나 ‘번아웃’, ‘우울’ 같은 키워드들이 떠다녔다. 이미 바닥에 다다른 의지를 간신히 붙잡아가며 영상을 하나하나 틀어봤지만 어느 것 하나 내 상태를 기깔나게 진단해 주진 못했다. ‘나도 내 마음을 모르겠어’라는, 소개팅 거절 멘트 같은 말을 스스로에게 던지며 잔뜩 비참해지기만 했다.

나보다 나를 더 잘 파악하는 알고리즘이 어느 날부터 ‘불안’이라는 키워드가 들어간 영상을 띄우기 시작했다. 그 즈음 보게 된 게 바로 나영석 PD가 진행하는 시청자 고민상담 영상이었다. 삶이 너무 불안하다는 20대 시청자의 질문에 영상 속 나 PD는 잔뜩 고양된 목소리로 답변을 시작했다.

본인도 “네가 고민할 게 뭐 있어. 너 나영석이잖아.”라는 말들을 듣지만 곧 50대인 본인도 불안하다고 털어놓는다. 그러면서 나 PD는 이런 말을 인용했다. “인간에게는 누구나 자신만의 지옥이 있다. 그 지옥은 타인은 모르는 지옥이다”라고. 그 말을 듣는 순간 미궁 속에 빠진 것만 같던 내 상태의 실마리를 찾은 것 같았다. 내가 빠진 지옥은 불안이었다.

잠깐 나영석 PD에 대해 고백하자면, 나는 그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를 ‘하는 것마다 족족 성공해 내는 천재 PD’ 정도로만 생각했지 솔직히 호감을 가진 적은 없었다. 왜냐하면 나는 지독한 <무한도전> 키즈였기 때문에. 엘지트윈스팬이라면 두산베어스를 미워할 수밖에 없듯 마치 숙명처럼 그에게 도끼눈을 뜨고 있던 것이다.

이미 오랜 시간이 흘러 누군가를 이유 없이 미워하기엔 나도 민망한 나이가 됐고 이전에 품었던 미움 같은 건 사라진지 오래다. 오히려 요즘엔 오랜 시간 동안 정상의 위치를 지켜가고 있는 그를 경이로운 시선으로 보게 된다.

요즘 내가 가장 많은 시간을 모니터에 띄어두는 게 바로 나영석 PD의 영상이다. 그가 연출한 작품이 아니고, 바로 그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영상들 말이다. 할미입맛을 가진 김대명 배우를 따라다니는 <맛따라 멋따라 대명이따라>부터 ‘불통의 신’으로 이름을 바꿔야 하는 게 아닐까 싶은 <소통의 신>, 회사돈으로 팀원들과 원데이클래스를 즐기는 것 같은 <에그문화센터>까지. 시간이 날 때면 이 영상들을 라디오처럼 틀어둔다. 라디오 DJ라고 해도 손색 없을 목소리가 흘러나오면 저절로 이너피스가 되는 느낌. 나도 모르는 새에 지천명이 목전인 이 아저씨의 팬이 되어버린 걸까.

그중에서도 가장 재미있게 본 건 마인드 마이너 송길영 박사를 초대한 에그문화센터다. AI가 콘텐츠 시장에 들이닥칠 미래를 준비하겠다며 데이터로 미래를 가늠하는 도사님을 초빙한 것인데, 영상 속 나 PD의 얼굴에서 간절함이 보였다. 이미 이뤄놓은 것도 충분히 많으면서 저 양반은 아직도 일이 그렇게나 고픈 걸까.

송길영 박사가 미래엔 관리자가 AI로 대체될 것이란 전망을 하자 나영석PD는 묻는다. 슬픈 사슴의 눈을 한 채 ‘저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라고. 이내 송길영 박사는 이렇게 답한다.

“걱정마세요. 이미 스트리머 하고 계시잖아요 지금.”

그 순간 깨달았다. 나는 나영석PD가 아니라 스트리머 나영석을 좋아하던 거였구나. 이미 수십 년 레거시 미디어의 거장으로 이룰 거 다 이뤘으면서. 바뀌는 세상에 적응하겠다며 발버둥 치는, 침착맨을 스승님이라 부르며 늦깎이 스트리머로 데뷔한 이 사람에게 나는 스며들고 만 것이구나.

내가 빠진 지옥을 헤집어보자 이런 종류의 불안이 꽈리를 틀고 있었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이 내 커리어에 도움이 되기는 하는 걸까. 내 또래의 친구들은 벌써 결혼까지 하고 이직도 척척해내던데 나는 이대로 괜찮은 걸까. 그런 불안이 지옥불 분화구에서 솟을 것만 같을 때면 지상파에서 뉴미디어로, PD에서 이제는 유튜버로 3단 진화를 해낸 위인 나영석조차 불안을 느낀다는 사실을 되뇌인다.

저 사람도 불안을 품고 사는데 나라고 어쩔 수 있을까. 비겁하지만 타인의 불안을 위로의 땔감으로 삼는 짓을 일삼는다. 불안을 생각하면 불안하기만 할 뿐이니까. 불안을 내쫓기 위한 내 나름의 구마의식인 셈이다.

야망백수 : 하루가 멀다 하고 신기술들이 쏟아져 나오는 요즘이 저는 불안하기보단 못마땅합니다. 클릭 한 번으로 제가 하는 일을 완벽하게 대체할 수 있는 수준이면 차라리 좋겠는데, 일하려면 울며 겨자 먹기로 '팔로업'을 계속해야 하는 작금의 상황이 마치 솜씨가 영 별로인 망나니에게 목을 맡긴 꼴 같달까요.

자, 제가 쑥 내밀고 있는 목 위로 칼날(혁신, 세월 인플레이션 등등)이 떨어지고 있단 건 새로울 것도 없는 팩트고, 불안해해봤자 술값이나 애먼 교육비로 돈만 더 쓴다는 것 또한 그간 쌓인 데이터를 보건대 검증이 끝난 것 같네요.

이제 제가 별로 안 친한 사람들이랑 같이 밥을 먹어야 할 때마다 꼭 써먹는 아이스브레이킹용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봐야 할 때가 왔습니다. “당신은 어떤 누명을 쓰고 사형수가 되었습니다. 형 집행일은…저런…바로 내일이군요. 간수가 당신에게 마지막으로 먹고 싶은 음식을 물어봅니다. 당신은 무어라 대답하겠습니까?”

뭐라고 대답할지를 고민하면서 투표(공교롭게도 풀칠을 보내야 하는 오늘은 선거일이군요.)도 하고 로또도 샀습니다. 아, 못마땅한 와중에도 행복을 상상하는 걸 멈추지 않아야 하는 생의 번거로움이여.

아매오 : 영화 <바빌론>의 주요 등장인물 중 하나인 잭 콘래드(브래드 피트)는 무성영화 시대의 스타입니다. 유성영화 시대가 도래하며 사라졌던 이들을 상징하죠. 사실 그는 영화판에 불어닥칠 변화의 바람을 누구보다 빠르게 알아챕니다.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대비도 하죠. 그러나 끝내 적응하지 못합니다. 이러한 설정을 통해 감독은 주장하는 듯합니다. “시대 변화를 이겨낼 수 있는 슈퍼-개인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한 주장에 자신의 삶으로 정면 반박하는 사례가 파주 님이 언급한 나영석과 침착맨 아닐까 합니다. “시대 예보”를 정체성으로 삼고 있는 송길영 작가가 그 두 명의 초대에 흔쾌히 응한 이유도 그런 것일 테지요. 개인적으로는 송길영 작가에게 그다지 큰 흥미를 갖고 있지 않았는데, 이번 방송을 계기로 그의 책을 장바구니에 담아뒀습니다. 아마도 나영석과 침착맨이라는 사례를 설득력 있게 풀어줬기 때문이겠죠.

더군다나 우리에게 영향을 주는 변화는 시대에만 있지 않습니다. 개인에게 닥치는 일신상의 변화는 그것 못지않게 거대하죠. 저 또한 변화 앞에 여러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힌트를 얻기 위해 이런저런 경험도 하고 참고가 될까 다양한 콘텐츠를 들춰보며 조언을 얻을 수 있을까 사람들을 만나러 다니죠. 희망이 생기고 방향이 잡히다가도 어느샌가 불안의 구렁텅이로 떨어지는 날의 반복입니다. 저는 살아남을 수 있을까요?

마감도비 : 파주님의 글을 읽으며 저도 제가 품고 있는 불안이 무엇일까 돌아보게 됐습니다. 저도 요즘 답답함과 짜증을 느끼는 일이 잦았거든요. 직장은 불만족스럽고, 그렇다고 연차는 쌓여 가는데 제대로 된 회사로 이직은 할 수 있을까 싶고, 일에 치이다 보니 자기개발이나 성장은 요원하고, 이렇게 낙동강 오리가 되는 건가 싶고. 일과 직장, 직업에 계속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고, 그로 인해 삶의 생애주기에서 응당 마주해야 하는 결정을 자꾸 뒤로 미루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불안감의 정체를 알아차린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건 아니지만 해결의 실마리는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위안 삼게 됐습니다. 퍼포먼스를 끌어올려 몸값을 올리던지 회사에 지금과 같은 강도로 업무를 지속할 수 없다고 선언을 하던지, 그게 아니라면 더 이상 제가 추구하는 삶의 방향과 맞지 않는 회사와 결별을 하던지. 중요한 갈림길에 서 있는 건 맞는 것 같네요. 무슨 선택을 내리건 제 삶이고 제가 결정한 방향이니 책임을 져야겠지요.

상황이 불확실하고 제 앞날이 불안하다면 제가 할 수 있는 건 선택을 하는 것과 그 선택을 응원하는 마음가짐일지도 모르겠네요. 글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