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책에서 15살에 10년 안에 시력을 완전히 잃게 될 것이라는 판정을 받고 "읽고 싶은 책들을 다 읽어야 한다"며 도서관에 파묻혀 지내셨다고 했던 부분이 기억에 남았어요. 시력이 남아있을 때 할 수 있는 많은 것들 중 왜 책을 읽어야 한다고 생각하셨어요?
열다섯 저의 세계는 학교와 집 도서관이 전부였어요. 현실 부정과 일탈을 꿈꿨지만 도망칠 곳이 없었죠. 유일한 안식처며 탈출구는 책 속이었어요. 그 무렵 저는 좀 삐뚤어지고 괴팍한 인물들에게 감정 이입을 했는데 김동인의 단편소설 속 삵이 되고 싶었고 호밀밭에 파수꾼을 읽으며 열광했어요. 그들의 처지가 나와 닮아 보였거든요. 그 시기에 읽은 책 중에 김수영의 시 중 ‘절망’이라는 시가 있었는데 그 시의 “구원은 예기치 못한 순간에 온다.”라는 문장을 특히 좋아했어요.
Q. 그 시기의 조승리에게 꼭 필요한 문장을 만난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혹시 “구원은 예기치 못한 순간에 온다.”라는 시의 구절을 삶에서 경험하셨던 순간이 있으실까요?
감정적으로 무척 힘든 시기가 있었어요. 삶이 무료하고 무기력했던 시기였죠. 현실에서 도망치듯 말레이시아로 떠났어요. 목적지는 페낭이라는 작은 섬이었고 페낭은 벽화로 유명한 도시였어요. 저는 관심도 없는 벽화를 구경하러 골목골목을 헤매다녔어요. 가이드가 열심히 설명을 해 주었지만 사실 아무것도 듣지 않고 있었죠. 그러다 어느 벽화 앞에서 소나기를 만났어요. 아직도 저는 그 순간을 생생히 기억해요. 향냄새 섞였던 미지근한 바람과 이슬람 사원에서 흘러나오던 아잔 소리를요. 저는 갑자기 글이 쓰고 싶어졌어요. 충동은 허기처럼 밀려왔어요. 무언가를 하고 싶다는 욕망이 생기자 앞으로의 삶의 방향이 보이기 시작했어요. 그때 김수영의 시가 떠올랐어요. “구원은 예기치 못한 순간에 온다” 보이지도 않는 벽화 앞에서 비에 쫄딱 젖은 채로 맞이했던 구원의 순간이었죠.
Q. 정말 예기치 못한 순간에 찾아온 구원이네요. 그 순간을 맞이했던 장소가 말레이시아라는 것도 인상 깊어요. 앞이 보이지 않음에도 친구들과 해외여행을 떠나는 건 큰 용기가 필요한 일 같아요. 플라맹고를 배우는 것도 그렇고요. 새로운 일, 한 번도 해보지 못한 일을 하려고 할 때에는 두려운 마음이 들기 마련인데, 새로운 일들 앞에서 주저하지 않고 도전할 수 있는 작가님의 비결이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새로운 도전 앞에서 저도 무섭고 주저할 때도 많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낯선 경험, 새로운 모험에 나서는 이유는 세상에 대한 호기심 때문이에요. 저는 보이지 않는 세상이 늘 궁금하거든요. 캄캄한 세상에 머물러 있기에는 내 삶이 불쌍하다고 생각했어요. 깨지고 부서지더라도, 실패하고 좌절한다 해도 그 모든 경험이 저에게는 세상을 향유하는 방법이니까요. 그 모든 게 쌓여 결국 저를 성장시킬 거라 믿기 때문에 무섭고 주저돼도 용기를 내고 도전을 선택해요.
Q. 혹시 지금 계획하고 계신 새로운 도전도 있으세요?
에세이 작가로 출발했지만 소설가의 꿈도 포기하지 않고 있었어요. 틈틈이 소설을 써서 공모전에 냈지만 결과는 좋지 않았어요. 서랍에 원고가 쌓여 갔죠. 사실 '이 지랄맞음이 쌓여 축제가 되겠지'는 제가 출판사에 28번째 투고를 한 끝에 출간이 된 책이에요.
소설을 위해서도 다시 투고를 시작했어요. 어딘가에 반드시 내 원고를 알아봐 줄 편집자가 있을 거라 희망을 가졌거든요. 그리고 12번째 투고 끝에 출간을 하고 싶다는 연락을 받았어요. 그렇게 제 소설집이 6월11일 출간됩니다. 새로운 도전은 단편 영화 시나리오를 쓰고 있어요. 아직 계획 중이지만 장애 인식개선 영화를 제작해 보고 싶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어요.
Q. 다음에 나올 책과 언젠가 나올 시나리오도 기대가 되네요. 작가님 삶의 이야기들을 글로 풀어가는 과정에서 배우게 된 것, 알게 된 것들이 있을 것 같은데요.
글을 쓰면서 저에게 한가지 믿음이 생겼는데요. 포기하지 않고 세상을 향해 손을 내밀면 반드시 맞잡아 줄 이가 있을 거라는 거예요. 그렇게 탱고 선생님을 만났고 글을 배울 수 있었으며 출간까지 이어졌거든요. 하지만 희망을 찾으려면 희생도 있어요. 시행착오와 포기하지 않는 마음이 필요하죠. 저는 글을 쓰며 이런 삶의 진실을 깨달았습니다.
Q. 이야기를 들어보면 정말 꾸준하게 글을 쓰시는 것 같아요. 많은 사람들이 꾸준히 글을 쓸 시간을 어떻게 마련하는지 궁금해할 것 같아요.
지금은 원고 쓰는 시간을 늘리기 위해 마사지 일을 조금 줄였어요. 2024년 쓴 원고를 모아 보니 원고지로 1500장이 되더라구요. 올해 에세이 한 권과 단편소설집 엔솔로지 소설집까지 총 세 권이 출간됩니다. 편집자님들 이야기로는 제가 원고를 빨리 쓰는 편이라고 해요. 머릿속으로 구상이 끝나면 점자 단말기에 초고를 쓰고 귀로 듣고 손으로 점자를 읽으며 퇴고를 해요. 마사지 일의 특성상 예약제기 때문에 여유 시간이 꽤 많아요. 그 시간에 원고를 귀로 여러 번 들으며 어색한 부분을 찾고 고쳐요. 글을 쓰며 한 가지 원칙을 세웠는데 글쓰기는 오후 9시 전까지만 작업한다는 거예요. 글쓰기를 노동으로 여기고 싶지 않다는 이유에서 그런 원칙을 정했어요.
Q. 글쓰기는 나에게 위안을 주는 활동이지만 때때로 슬럼프가 왔다고 느껴질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저는 글을 쓰며 해방감을 느끼고 위로받아요. 하지만 쓰고 싶다는 의지로만 원고가 써지지는 않는 것 같아요. 그럴 때 짙은 풀 냄새가 나는 공원을 찾아 산림욕을 해요. 짙은 풀 냄새를 맡으면 머릿속 복잡한 상념이 정리되거든요. 세상을 몽땅 때려 부수는 장르 소설을 들으며 하루 종일 손걸레질을 하기도 해요. 손걸레질을 하면 마음이 차분해지거든요. 심신이 안정되면 글감이 떠오르고 원고를 쓰며 행복을 느끼죠.
그래도 충족되지 않으면 고통스러울 정도로 손톱을 짧게 잘라요. 손톱을 바싹 자르는 습관은 마사지 일을 하면서 갖게 되었는데, 제게 손톱 정리는 삶을 점검하는 시간이에요. 가지런히 정리된 손톱은 성실한 자세, 올곧은 삶의 지표처럼 느껴져서 마음까지 정돈되거든요. 이런 사소한 행동이 저에게 큰 위안과 안정을 줘요.
Q. 작가님 책 <이 지랄맞음이 쌓여 축제가 되겠지> 제목처럼 살다 보면 누구나 ‘지랄맞네’라고 생각되는 일들을 마주하게 되는 것 같아요. 작가님은 그런 순간들이 찾아왔을 때 어떤 마음으로 마주하고 계신가요?
저 자신에게 암시를 걸어요. “끝이 있을 거야! 끝이 있는 고통은 진짜 불행이 아니야!” 하고요. 그런데 정말 감당할 수 없겠다 싶으면 맞서지 않고 도망쳐요. 곤경에 빠진 이들이 내게 조언을 구할 때도 저는 안 되겠다 싶으면 도망치라고 말해요. 그렇다고 쉽게 포기하라는 의미가 아니에요. 퇴로를 열어 두고 유연하게 살자는 의미죠.
Q. 작가님에게 조승리답게 산다, 나답게 산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인가요?
명랑한 모험가며 꿈을 이루고 사는 사람으로 살고 싶어요. 꿈이 사치였던 시절이 있었어요. 오로지 바람은 안정이었죠. 새로운 꿈이 생기기까지 20년이 흘렀습니다. 노동과 절제가 과거였다면 미래는 모험과 도전으로 살고 싶어요. 그래서 저는 신나는 일을 찾아다닌답니다.
Q. 요즘 작가님에게 가장 '신나는 일'은 무엇인가요? 그리고 앞으로 해보고 싶은 새로운 '신나는 일'은 무엇인가요?
처음으로 독서 모임에 참여하게 되었어요. 타인과 문학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서 무척 즐겁습니다. 새로운 도전이자 신나는 일은 제가 소설가로 독자님들을 찾아뵐 수 있게 되었다는 거예요. 곧 출간되는 제 첫 연작 소설 많이 기대해 주세요.
Q. 마지막으로, 매주 월요일 아침 새로운 한 주를 시작하는 밑미레터 독자분들에게 한 마디 해주신다면?
저는 주말에 출근하고 월요일이 휴무예요. 평소 기상 시간에 일어나 일상을 시작하죠. 제게는 보통의 하루입니다. 변화 없는 안정된 월요일이라서 저는 큰 만족감을 느껴요. 여러분들도 안정된 보통의 월요일이 되시길 바랍니다.
삶의 지랄맞음 속에서도 자신만의 나다움을 찾아가는 조승리 작가의 이야기가 궁금하다면, 조승리 작가의 책 <이 지랄맞음이 쌓여 축제가 되겠지>에서 더 자세한 이야기를 만나보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