닷페피플 님에게 드리는 제작 노트

PD NOTE
닷페피플 님, 반가워요! 
닷페피플에게만 살짝 보내드리는 제작 노트. 닷페이스 소현 PD의 <고백사서함> 콘텐츠의 제작 노트를 공개합니다. 

#1 기획의 시작
"가족이지만/가족이라서 OOO한 당신에게"

'오월은 푸르구나. 우리들은 자란다.' 평소에는 생각도 나지 않던 이 노래를 5월만 되면 저도 모르게 흥얼거립니다. 그리고는 깨닫죠. '아, 가정의 달이구나. 조만간 꽃집이며 빵집이며 길거리며 카네이션으로 도배가 되겠구나.' 

제가 초등학교 6학년 때, 엄마는 아빠와 친할머니 몰래 저와 동생을 데리고 친정 여수로 내려갔습니다. 엄마는 저에게 이사하는 티를 내면 안 되니 제일 좋아하는 물건 몇 개만 챙기라고 했죠. 친구들에게 제대로 된 인사 한번 못하고, 어린 시절 사진도 친구들에게 받은 편지도 다 남겨두고 그렇게 저는 여수로 갑자기 이사를 가게 되었어요. 

전학 첫날, 반 친구들은 '왜 좋은 서울 놔두고, 6학년 말에 여기로 전학을 왔는지'에 대해 궁금해했죠. 엄마는 제가 이 질문을 받을 줄 미리 알고 있었는지 '쓸데없는 소리 말고, 할아버지가 아파서 엄마가 간호하러 왔다' 고 말하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제 전학 첫날은 거짓말로 시작되었어요. 돌이켜보면 그렇게 숨겨야 할 만큼 엄청난 가정사도 아니었는데, 그때부터 저는 늘 가족에 대해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게 어려웠습니다. 

기획 회의를 하다 퀴어문화축제 때 시작한 고백부스를 이번엔 가족을 주제로 해보자는 의견이 팀에서 모아졌습니다. 재밌을 것 같았어요. 많은 사람에게 위로가 되는 영상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도 함께 들었죠. 어버이날 당연하게 카네이션 두 송이를 사는 대신, 길에 놓여있는 카네이션을 보고 마음 한켠이 불편해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싶었습니다. 
어떤 형태로든 사랑으로 맺어진 새로운 가족 이야기도 궁금했어요. 그렇게 사람들을 만날 준비를 시작했습니다. 

#2 사전 탐색
고백부스, 고백사서함 같은 콘텐츠는 일단 사람이 모여야 제작이 가능한 콘텐츠입니다. 저희가 아무리 신촌 한복판에 부스를 설치하고 기다려도, 구글폼을 열어놓고 게시글을 올려도 아무도 찾아오지 않으면 영상을 만들 수 없으니까요. 특히 이번엔 가족에 대한 이야기라 얼굴을 내놓고, 직접 찾아와서 이야기하는 게 부담스러울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오프라인 부스를 세우는 대신 '고백사서함'으로 컨셉을 바꾸고 사연자들이 직접 찍은 영상을 받아보기로 했죠. 얼굴이 안 나와도 좋고, 보내주시는 사진도 원하면 모두 그림으로 재가공하기로 했습니다. 부담 없이 이야기를 나눠주시는 것이 사실 이 콘텐츠에서 가장 중요했으니까요.

감사하게도 '서울, 단 하루 설치되는 오프라인 부스, 얼굴 공개, 사진 공개'의 요소가 사라지고 허들이 낮아지니 예상보다 많은 분이 사연을 보내주셨습니다. 덕분에 지방에 사시는 분, 군 복무를 하고 계시는 분, 평일에는 시간이 안 되시는 분 등 부스를 차렸다면 듣지 못했을 이야기들도 많이 만나게 되었죠.

그렇게 차곡차곡 모인 사연들을 하나씩 읽어나갔습니다. 여러 가지 사연을 한 번에 읽다 보니 자연스레 서로 닮아있는 사연이 보이기도 하고, 비슷한 상황에 있지만 전혀 다른 감정을 갖고 계시는 분들도 눈에 들어왔습니다. '가족의 형태뿐만 아니라 내 가족에게 느끼는 감정과 온도가 형태만큼이나 다양하구나.'를 그때 확 실감한 것 같아요. '이 복잡 미묘한 감정들을 잘 담아내야겠다.' 는 생각으로 사연 주신 분들께 촬영을 부탁드렸습니다. 
#3 제작
목소리는 참 대단한 힘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아요. 이미 한번 읽었던 사연들이었는데도 영상으로 다시 들으니 처음 듣는 이야기처럼 새로웠거든요. 제가 영상들을 보면서 울컥하다가 웃다가 울다가를 반복하니 무슨 일 생겼냐고 묻는 동료들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마지막 영상까지 모두 보고 막상 구성을 시작하려고 하니 부담감이 커졌습니다. 누군가 힘겹게 혹은 용기 내 나눠준 이 이야기와 감정들을 10분이라는 짧은 시간 안에 끝낼 엄두가 안 났거든요. 특히 출연자의 감정을 시청자들도 이해하고 공감하려면 출연자의 상황설명과 배경설명이 어느 정도는 있어야 된다고 생각했기에 이전 고백부스 콘텐츠들과는 달리 한 사람당 가져가는 분량이 훨씬 길어져야 했습니다. 무리해서 한 편에 모든 이야기를 짧게 조각내어 담는 것보다는 각 사연을 제대로 잘 전달하는 게 더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렇게 한 편으로 끝내려고 했던 고백사서함은 두 편이 되었습니다.  

얼굴 공개를 꺼리는 분들이 꽤 많아서 화면을 대체할 용도로 어릴 적 사진이나 가족사진을 함께 받았는데, 그 사진들을 그림으로 재가공하는 일 또한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렸습니다. 제가 맨날 책상에서 그림만 그리고 있으니 동료들이 직업이 바뀐 거 아니냐고 놀리기도 했어요. '괜히 그림 그린다고 했나?', '구성에 더 신경을 쓸 수 있는 에너지를 다른 일로 허비하고 있는 게 아닐까?' 의문이 들기도 했지만, 막상 완성하고 그림들을 화면에 올려보니 음성만으로는 끌고 가기 어려운 구성의 밀도를 시각적으로 보완해 시청자들이 훨씬 직관적으로 이야기에 집중할 수 있게 만든 것 같아 지금은 나름대로 만족 중입니다. 

* 여담이지만, 이번 고백사서함을 계기로 패드로 그림 그리는 데 푹 빠져서 얼마 전에 당근마켓에서 중고 아이패드를 하나 구매했습니다. 

#4 제작 회고
가족 이야기는 늘 어렵습니다. 대부분 다 그럴 거예요. 각자만의 가족 이야기가 있고, 그 안에서의 어려움과 관계에 대한 고민이 다 다를 테니까요.  

저도 성인이 되고 나서야 친구들에게 가족 이야기를 처음 속 시원하게 털어놓은 것 같아요. 털어놓으니 편하더라고요. 친구들이 제 이야기를 들어주고 친구들도 자기 가정사를 들려주면서 위로를 참 많이 받았어요. '이렇게 서로의 이야기를 공유하는 경험이 나에게는 꼭 필요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죠. 

이번 영상을 만들면서도 비슷한 감정을 느꼈어요. 사연 보내주신 분 중에는 아직 힘든 상황 속에 계신 분들도 있었고 이미 힘든 시기를 지나온 사람들도 있었지만, 한 가지 같았던 건, 모두들 그 이야기를 남들과 나눌 수 있을 만큼 단단한 사람들이었다는 것 그리고 사회적 통념으로서의 가족이 아니라 본인이 스스로 가족의 정의를 내릴 수 있는 분들이었다는 거였어요. 다 담지는 못했지만, 모두 자신과 비슷한 상황에 있는 사람들에 대한 응원도 잊지 않으셨고요. 용기와 희망은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살피는 것에서 출발한다는 것을 이번 계기로 또 한 번 배웠습니다. 그러니 저에게도 그랬듯, 여러분들에게도 이 영상이 작은 위로와 용기 또 앞으로 나아갈 힘을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이인성 작가님의 소설 <한없이 낮은 숨결> 속 문구를 공유하면서 글을 마칠게요.
언제가 됐든, 어떤 방식으로든 우리가 서로 연결되어있다는 느낌을 줘서 가끔 힘들 때마다 찾아보게 되는 글입니다. 

지금, 나는 쓴다. 지금, 당신은 읽는다. 이때 나와 당신은 얼마나 동시적인가? 당신과 나는 같은 공간의 같은 시간 속에서 이 글을 주고받고 있는가? 현실적으로는 이렇다. 지금, 나는 쓴다. 지금 씌어지는 이 소설은 얼마 후에 출판사에 넘겨져 편집되고 인쇄되어 책으로 제본되고 나서 책방을 거쳐 당신 손에 들어간다. 그때 당신은 읽을 것이다. 그러니까 내가 쓰고 있는 지금, 당신은 읽고 있지 않다. 그렇다면 나는 '나는 썼었다'라고 쓰거나 '당신은 읽을 것이다'라고 써야 할까? 그렇지 않다. 지금 나는 쓰고 있고, 지금 당신은 읽고 있기 때문에.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간격이 있는데 간격이 없다. 신비한 말의 모순이랄지, 현재가 과거로 불려가고 과거는 미래로 불려가 서로 엉겨 붙는다.

나의 이 지금으로부터 당신들은 시간과 공간의 거대한 좌표 위에 무수히 흩어진 점들이지만, 그러나 이 소설이 그 좌표 위에 어느 곳으로도 같은 형체로 다가가듯, 우리의 '지금' 속에서 그 간격을 지울 것이다. 
1편

2편

박소현, 닷페이스 PD
"사람과 공간, 시간과 역사를 기록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so@dotface.kr
닷페피플에게만 공개하는 PD 노트, 님은 어떠셨어요? 더 보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알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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