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주의 감각’을 기르기 : 탈진실시대의 대화법

‘각주의 감각’을 기르기 : 탈진실시대의 대화법

Footnotes and collective wisdom

저자 김스피

(Authors) Kim, Supi

출처 인스피아 저널, (110), 2023.12.20, 1-8 (8pages)

(Source) Journal of the Inspia

지난회차 https://page.stibee.com/archives/107426

(Archi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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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워드: 진짜(Authentic), 각주, 근거, 지식공동체, 검증

1.머리말
2.우리는 어떻게 대화할 수 있을까? : ‘각주의 감각’
3.어떤 각주인가? : ‘좋은 각주’의 조건
4.우리는 천재 로봇이 아니다 : 지식공동체
5.맺음말

【1.머리말】

안녕하세요. 연구자님. 느릿하게 해찰하며 걷는 것을 좋아하는 김스피입니다.👤

지난달 말 미국의 가장 오래된 사전 출판사 메리엄웹스터가 2023년 올해의 단어로 ‘진짜Authentic’를 선정했다고 합니다. (링크) AI로 ‘그럴 듯한 가짜’를 잔뜩 만들어내게 된 시대에 ‘진짜’의 가치가 한층 더 중요해지게 됐다는 것이죠.

오늘날 우리는 우리가 보는 것, 듣는 것을 믿지 못하게 됐습니다. 올해 초엔 AI로 만들어낸 트럼프 체포 사진, 혐오 발언하는 조 바이든의 가짜 영상 등이 이슈가 되기도 했고요. (링크)

다만, 어쩌면 이를 ‘AI의 문제’로 바라보면 문제의 본질을 놓치는 게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왜냐면 애초에 사람들이 믿고 싶은 걸 믿는 데는, 대단히 그럴듯한 구실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AI 시대’에도 여전히 사람들은 고작 몇바이트짜리 텍스트 ‘주작썰’ 하나로 잘 속고, 천장 얼룩에서 신의 얼굴을 보고, 신묘한 블록체인 어쩌구 방법으로 100만원을 1억으로 만들어준다는 류의 사기는 여전히 기승을 부립니다.

<fig.1> 메리엄웹스터는 2023년 올해의 단어로 ‘Authentic’를 꼽았습니다. (왼쪽) 틱톡에는 우크라이나 전쟁 관련 ‘가짜 영상’들이 굉장히 많은데, 이중 대부분은 AI 조작보다도 과거에 있었던 다른 사건 영상에 그럴듯하게 텍스트를 입힌 것에 불과합니다. 위의 영상은 우크라이나 도심의 현 상황이라며 올라온 것이지만 실은 독립기념일 열병식 때 찍힌 영상입니다. BBC

저는 이보다도 오늘날 진짜 문제는, AI를 이용해 누구나 ‘손쉽게 그럴듯한 근거를 만들어 낼 수 있다’보다도 ‘주장의 ‘근거’ 자체에 사람들이 전혀 신경을 안 쓰게 됐다’는 부분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오늘날 인터넷에서 떠도는 정보들 가운데 상당 부분은 근거가 부족하지만, 사람들은 자신들의 커뮤니티 안에서 믿고 싶은 것을 믿습니다. 그 근거가 신빙성이 없어도, 심지어 근거가 없어도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사람들은 점차 끼리끼리 모이고, 결코 서로 의견이 다른 집단 간에 대화는 불가능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같은 불통의 상황이 사회의 많은 혐오와 갈등 등 문제를 낳고 있는 것이 현재입니다.

과연 오늘날 우리는 어떻게 ‘제대로 된 대화’를 할 수 있을까요?

오늘 레터에선 <각주의 역사>(앤서니 그래프턴), <지식의 착각>(스티븐 슬로먼 외)를 지팡이 삼아, ‘각주’라는 키워드를 중심으로 해찰해보기로 했습니다.

【2.우리는 어떻게 대화할 수 있을까? : ‘각주의 감각’】

“나는 어떤 문장 끝에 숫자가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리고 지면의 발치를 보면 그것이 모두 무엇에 관한 것인지, 두보이스Du Bois가 자신의 정보를 어떤 출전에서 그러모았는지에 관한 언급이 있었다.” -해리 벨라폰테

연구자님은 책에 적힌 ‘각주*’를 유심히 보시는 편인가요?

*각주 = 페이지의 하단에 적힌 참고문헌, 설명 혹은 첨언

저는 간혹 책을 읽다가 관심이 생긴 이야기에 조그만 숫자가 붙어 있으면 살펴보곤 합니다. 깨알같은 글씨를 더듬더듬 읽고서, 각주에 적힌 책을 실제로 구해 펼쳐볼 때도 있는데요. 그럴 때면 원래 저자의 주장이 어떤 근거와 맥락에서 나온 것인지 잘 알 수 있게 됩니다.

수많은 참고도서, 각주들을 볼 때면, ‘이 작은 책에 담길 주장을 위해 이 사람은 이렇게 다양한 근거들을 성실히 모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숙연해지기도 합니다.

그런데 문득 이런 의문이 들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인터넷에서 익숙하게 보는 영상이나 커뮤니티, 블로그 글 가운데선 이런 ‘각주’ 비슷한 것이라도 있는 경우가 얼마나 될까요?

역사학자 앤서니 그래프턴은 <각주의 역사>에서 17세기 이후 책 속 ‘각주’의 역사를 다룹니다.

각주라고 하면 왠지 딱딱해보이고, 대부분의 사람들과는 별 상관이 없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데요. 실은 이 책에서 각주의 핵심 본질은 ‘주장의 근거’이자, ‘믿고 싶은 것이 아닌, 근거 있는 것을 말하게 하는’ 책임감의 장치이기도 합니다.

이를테면, 각주를 요구한다는 것은 - ‘그럴듯하게’ 소리지르는 웅변가를 정면으로 쳐다보며 이렇게 묻는 거죠.

“당신이 아까부터 열심히 떠드는 주장의 근거가 무엇입니까? 그리고 그 근거의 출처는 어디고, 얼마나 믿을만합니까? 그렇게 판단하게 된 경위는 무엇입니까?...”

<fig.2> <각주의 역사>를 쓴 프린스턴대 역사학과 석좌교수 앤서니 그래프턴(왼쪽) 320쪽 분량의 책 <각주의 역사>에도 총 423개의 각주가 달려있습니다. / 프린스턴 대학교 홈페이지, 테오리아

우리는 왜 ‘주장의 근거’를 물어야 할까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만약 수많은 사람들이 제각기 근거 없는 주장을 늘어놓기만 한다면 의미있는 대화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이죠.

예를 들어 ‘무상급식에 대한 찬반토론’을 한다고 할 때, 각자 ‘무상급식 해야한다!’ ‘무상급식 하지 마라!’라며 근거 없이 원색적인 비난만 한다면 10시간을 ‘토론’해봤자 목만 쉴 것입니다. 서로를 더 미워하게 되고요.

그러나 이때 제각기 주장에 대한 명확한 ‘근거’를 대게 하면, 이에 대해 검증해볼 수 있게 됩니다. 그 결과 완전한 합의에 도달하지 못하더라도, 더 깊은 숙고가 가능하죠. 이 때문에 그래프턴은 ‘각주’야 말로 대화의 전제 조건이라고 말합니다.

각주는 역사가가 들려주는 이야기와 제시하는 주장을 경험적으로 뒷받침한다. 각주 없이도 역사학의 명제를 칭찬하거나 반박할 수는 있어도 검증하거나 반증할 수는 없다 [...] 각주를 사용하고 각주와 결부된 연구조사 기술을 사용할 때에만 독재 정부이든 민주 정부이든, 근대 정부가 했던 타협, 그것이 초래한 죽음, 근대의 정부와 그 동맹자들이 자행한 고문을 은폐하기 위해 기울이는 노력에 항거할 수 있다 […] 각주를 사용해야만 자신의 글을 독백이 아닌 대화로 만들 수 있다.
-앤서니 그래프턴, <각주의 역사>(이하 동일)

이 대목에서 저는 ‘집단적 독백’이라는 말이 떠오르기도 했는데요.1) 오늘날 인터넷에서 제각기 근거 없이 자신의 주장만 외치는 상황에선 ‘소음’은 많아도 ‘대화’는 거의 존재하지 않습니다.

17세기 이후 수백년 간 이어져 온 ‘각주의 역사’를 흥미진진하게 읽어내려가다보니,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거꾸로 생각해보자면, 불과 수백년 이전엔 쭉 각주가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요? 그 시대엔 공적 대화의 필요성이 훨씬 적었기 때문입니다. “짐이 곧 진리” “경전이 곧 진리”였던 시절엔, 말하는 사람의 권위가 중요했고 - 굳이 근거를 붙일 필요조차 없었죠. 그러나 종교개혁 등으로 ‘권위’에서 ‘근거(과학)’의 시대가 되면서 다양한 주장 중 어떤 주장이 옳은지를 검증할 필요성이 생겼죠.

즉, 옛날엔 한 가지 진리에 누구나 ‘말 없이’ 복종해서 대화의 필요성 자체가 없었다면 - 17세기 이후엔 뭐가 옳고 그른지를 정하기 위해 대화, 그리고 각 주장들을 뒷받침하는 근거가 중요해진 것입니다.

1700년 경에 논쟁적인 문제에 몰두했던 작가는 모두 자신들이 지뢰밭에 들어서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 17세기에는 베이컨, 데카르트, 보일, 파스칼이 고대의 과학적 권위를 해체하는 것이 목도되었다 [...] 권위와 증거의 문제가 모든 면에서 대두했다. 바로미터나 혜성, 새로운 물질이나 새로 발견된 섬의 성질에 관해 누구의 설명이 믿을만할까? 어떤 설명은 권위 있는 것으로 만들고 어떤 설명은 그럴듯하지 않은 것으로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 17세기 말의 지식인이라면 누구나 필연적으로 지적 권위에 관한 이런 저런 물음에 직면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회의적인 독자의 의구심을 해소시킬 수 있는 확신을 제공하기 위한 프로토콜*을 고안해야 했다.
*프로토콜(protocol) : 공동의 규약, 의례

이에 사람들은 효과적인 대화를 위해 악을 쓰는 대신 ‘각주’를 활용하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자신들의 주장의 근거와 신뢰성을 밝혀 남을 설득하기 위해서요.

특히 논쟁적이고 중요한 사안일수록 각주는 필수였습니다.

<fig.3> 17세기 말 자신의 저작에서 주장의 근거, 참고한 자료를 밝혀 적어 근대적 각주를 과감하게 시도했다는 평을 듣는 프랑스의 철학자, 사전편찬자 피에르 벨(1647~1706) (왼쪽) 오늘날 많은 온라인 위키 사전들이 존재하는데요. 사전마다 편집 방향, 원칙 등에 차이가 있듯 ‘각주’ 작성 스타일에도 차이가 있습니다. 위키백과 설립자인 지미 웨일스는 위키백과 20주년 인터뷰(링크)에서 가짜 뉴스에 대항하기 위해선 반드시 출처가 있는 신뢰할만한 정보만을 참고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 위키피디아, 연합뉴스

오늘날의 상황으로 잠깐 시선을 돌려봅니다.

과연 오늘날 우리가 보는 논쟁적인 주제에 대한 주장, 대화, 영상 등 가운데 각주가 달린 것은 얼마나 될까요?

실은 각주라는 ‘형식’ 자체가 중요한 건 아닙니다. 브라운대 역사학과 교수인 카린 울프Karin Wulf는 워싱턴포스트 칼럼(링크)에서 오늘날 탈진실사회의 ‘각주’의 필요성에 대해 아래와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각주를 다루기"는 정보 오염의 시대에 대처하는 위생 습관hygienic practice이라고 할 수 있으며,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이 동참해야 한다. 각주는 모두를 위한 것이다 [...] 중요한 건 형식보다도, 참조 도구 뒤에 숨은 원리와 기능이다. 각주를 통해 우리는 주장의 증거를 가늠할 수 있다. 각주는 과학 연구든 역사, 법적 판결이든 간에 글을 떠받치는 하부 구조를 드러낸다 [...] 각주는 주장이 어떻게 형성되는지를 보여준다[...]또한 우리에게 적극적이고 지식이 풍부한 시민이 되는 법을 알려준다.

-Karin Wulf, 각주가 허위정보 전쟁에 승리하기 위한 열쇠가 될까요?Could footnotes be the key to winning the disinformation wars?

저는 ‘각주의 감각’이라는 문구를 떠올려봤습니다.

어떤 주장을 보더라도, 그 아래의 근거를 신경쓰는 감각입니다. 근거가 있는지 없는지 - 근거가 있는 경우 그 근거가 어디서 어떤 경로로 왔고, 그것이 신뢰할만한 것인지 등을 입체적으로 파악하려고 하는 감각이죠.

하지만 오늘날 이런 감각을 기르긴 점점 힘들어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주로 정보를 얻는 플랫폼이 각주에 대한 책임을 강조하지 않는 등의 문젭니다. (링크)

물론 사람들이 사실 여부를 떠나 재미난 이야깃거리에 끌리는 본성 자체를 탓하는 건 의미가 없는 일입니다. 인류가 이처럼 자신의 진영, 입장에 따라 ‘재미난 이야깃거리’를 조작하고 만들어온 역사는 아주 오래됐습니다.

그(피에르 벨)는 역사적 기록에 엄청난 위조 작업이 끼어들었다고 주장했다[…]’이 방법(왜곡)은 어느 시대 어느 곳에서나 사용되었다. 인간은 언제나 적의 신조와 인격을 조롱해왔고 여전히 그렇게 한다. 이를 위해 인간은 수천개의 이야기를 지어낸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이야기에 취약하다는 것을 인지하고, 흥미롭고 화나는 이야기에 입맛을 다시다가도 퍼뜩 정신을 차리고는 - ‘혹시 내가 틀렸을지도 몰라! 각주를 잘 살펴보자’라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 일입니다. 이런 것이 바로 ‘각주의 감각’이라고 할 수 있겠죠.

물론 쉬운 일은 아닙니다만, 이런 약간의 ‘냉철함’이 없다면 우리는 서로 다른 입장을 가진 사람과 대화를 나눌 수가 없습니다.

1)남의 말은 듣지 않고 각자 자신의 말만 들어놓는 현상을 가리켜 ‘집단적 독백’이라고 합니다. 얼핏 보기엔 활발한 대화가 이루어지는 상황처럼 보이지만 아무도 상대의 말을 듣지 않기 때문에 대화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3.어떤 각주인가? : ‘좋은 각주’의 조건】

다만 그래프턴은 <각주의 역사>에서 각주가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는 ‘요술지팡이’는 아니라고 강조합니다.

설령 각주가 달려있더라도 그것이 믿을 만한 출처에서 나온 것이 아니거나, 올바른 자료라도 입맛에 맞게 왜곡한 경우라면 오히려 상황은 더 나빠질 수 있죠.

각주는 그 자체로는 아무것도 보증하지 않는다. 진실의 적은-그리고 진실에는 많은 적이 있다- 정직한 역사가가 각주를 사용해 옹호할 바로 그 사실을 부정하기 위해서 각주를 사용할 수 있다. 관념의 적은-그리고 관념에도 역시 많은 적이 있다-독자가 전혀 흥미롭게 여기지 않는 간접인용과 직접인용을 그러모으거나 새로운 명제 비슷한 것을 공격하기 위해 각주를 사용할 수 있다.

이 때문에 우리는 ‘각주의 감각’을 기를 때, 단순히 각주가 있는지 여부에만 머무를 것이 아니라 그 안으로 한발짝 더 파고들어서, 그 각주가 ‘어떤 각주’인지에 대해서도 눈을 크게 뜨고 바라봐야 합니다.

저는 책을 읽으면서 ‘적합한 각주’의 요소라고 할 만한 것을 세 가지 정도로 추려보았습니다. 아래와 같습니다.

1) 원천 = 신뢰할 만한 자료, 정보원을 근거로 했는가?
2) 과정 = 자료의 선택 및, 그것을 바탕으로 한 추론/인용의 과정이 적합했는가?
3) 경제성 = 핵심 근거가 효율적으로 들어갔는가?

1)원천(출처) = 보통 우리가 각주를 이야기할 때 가장 먼저 떠올릴 부분일텐데요. 이 자료가 어디서 온 것인가!라는 것에 대해섭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사실 개미는 인류의 조상이다!”라는 말을 하고서 그 근거로 사이비 과학 서적이나, 컬트 커뮤니티의 짜깁기한 게시물, ‘조작된’ 증언 등을 든다면, 이 주장에 아무리 수많은 각주가 붙었다고 해도 엉망진창일 뿐입니다.

예시로 든 주장이 허무맹랑해서 그렇지, 실은 우리가 인터넷에서 보는 게시물들 가운데, 주장에 대한 근거가 이정도 수준에조차 못미치는 경우가 의외로 굉장히 많습니다. 이런 근거들은 대체로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의 ‘울타리’ 바깥을 넘어가면 아무런 설득력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울타리를 견고하게 해주는 효과는 만점이기에, 그렇게 어떤 사람들은 자기만의 참호 안에서 엉뚱한 근거로 더욱 똘똘 뭉칩니다.

각주가 없는 경우보다도 나쁜 각주가 있는 경우 더 위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fig.4> 믿을만한, 적절한 출처의 자료를 적합하게 참고하지 않는다면, 설령 각주가 있더라도 그것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 사이 ‘울타리’ 안에서만 통용되게 됩니다. 사진은 안티백서(백신반대자) 커뮤니티 그룹 (왼쪽) 건물의 만듦새를 볼 수 있게 해주는 설계도면은 정면에서 본 입면도라든지 외관 사진과는 달리 그 건물의 구조 자체를 한눈에 파악할 수 있게 해주고, 저자는 각주가 이런 역할을 한다고 말합니다./ NBC News, State Libary Victoria

2)과정 = ‘원천’ 자료를 어떻게 활용하느냐의 얘긴데요.

우리는 얼핏 ‘근거’와 ‘주장’의 관계가 눈에 명확히 보이는 무언가라고 생각하곤 합니다. 자판기에 동전을 넣으면 주스캔이 나오는 것처럼요. 하지만 같은 책이나 기사를 보더라도 반응이 천차만별이고 또 같은 사건에 대한 언론 보도 역시 제각각인 것처럼, 자료를 참고하는 과정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때문에 원전 뿐 아니라 그 자료를 바탕으로 어떻게 추론을 했는지 ‘과정’까지 투명하게 밝혀 보여줄 필요가 있는 것이죠.

각주는 역사가가 실제 활용한 주요 사료를 나타낸다[…] 근대의 역사가들은 자신의 명제를 지지하려 할 때조차 한계를 분명히 한다 […] 각주는 그 서사가 연구 형태, 기회 그리고 역사가가 연구하는 동안 가졌던 구체적인 질문의 종류에 따라 역사적으로 조건지워진 산물임을 증명한다. 공학자가 그린 어느 웅장한 건물의 설계도면처럼, 각주는 정면의 입면도에는 감춰진 것으로서, 때때로 대충 만든 버팀대, 피할 수 없는 약한 부분, 숨어있는 응력을 드러낸다.

이처럼 ‘과정’을 투명하게 보여준다면 - 독자는 저자가 어떤 입장을 지녔는지, 또 저자가 비의도적으로 실수하거나 왜곡한 부분까지 파악할 수 있어 주장의 신뢰도를 따져보는 데 큰 도움이 됩니다.

3)경제성 = 마지막으로 ‘경제성’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앞선 항목을 끄덕이며 읽으신 분들도 ‘경제성’이라는 말엔 약간 갸웃하실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일반적으로 근거와 관련된 이야기에서 ‘경제성’이 언급되는 경우는 없기 때문이죠. 그런데 저는 이 ‘경제성이’ 오늘의 주된 이야깃거리인 대화나 AI와도 관련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프턴은 역사학에서 근대적 의미의 각주를 발전시켰다는 평을 듣는 피에르 벨(Pierre Bayle,1647~1706)의 저작들 속 각주에 대해 아래와 같이 말합니다.

벨의 설명모델에는 여전히 하나의 실질적인 특징이 결여되어 있었다. 바로 경제다[…]독자는 박식의 늪 같은 데 빠진 자신을 발견했다[…]매커니즘은 너무 우연하고 복잡했다. 늪지 위를 맴도는 하루살이처럼, 어마어마한 학식을 갖춘 심오한 해설 위에 떠 있는 홀쭉하고 가벼운 본문으로서, 그것은 비평적 성찰에는 놀라운 모델을 제공하지만 역사학의 서사에는 빈곤한 모델을 제공했다.

요는, ‘딱 필요한 것을, 필요한 만큼만’ 적확하게 인용하지 않고 - 각주가 자신의 주장마저 뒤덮을 정도로 잔뜩 늘어놓았다는 것입니다.

이 밖에도 <각주의 역사>에는 ‘각주가 지나쳐 문제’인 상황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또 경계하는 대목들이 등장합니다. 그 중 일부를 소개해봅니다.

“화이트(Richard White of Basingstoke·1539~1611)는 싸구려 글을 뒷받침하기 위해 감당할 수 없는 양의 해설을 활용했다 […] 그의 우아하고 근대적이어 보이는 조제물은 안니우스(Jeannes Annius Viterbiensis·1437~1502)의 캐서롤을 데워놓은 것, 몇 가지 새로운 성분을 가미했지만 근본적인 맛의 차이는 전혀 만들지 못하고 유통기한도 늘리지 못한 것에 불과하다”

저는 이 대목들을 읽으며 곰곰 생각해봤습니다. 인용에서 경제성이 필요한 이유는, 아마도 어떤 책이든 글이든 결국은 ‘소통(대화)’의 수단이기 때문이 아닐까 하고요.

오늘날 생성형 AI는 어떤 주장에 대해 엄청나게 긴 흐리멍텅한 글(근거)을 무한정 뽑아낼 수 있습니다. 그런 ‘생산성’이 각광받기도 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과연 이는 읽는 사람을 생각하는 처사일까요? 만약 저와 둘리가 논쟁을 하는데, 제가 어떤 주장을 하고서 컨테이너 박스 하나 갖다주고선(읽는 데 걸리는 시간 2개월) 이게 근거니까 알아서 읽어보라고 한다면 다시는 대화를 하고 싶지 않아질 것입니다.

오늘날은 더더욱 인터넷 검색 등을 통해 어떤 주장에 대해 수많은 근거를 줄줄이 이어붙일 수 있는 시대입니다. 이 때문에 한층 더 상대와 ‘진짜로’ 대화를 하기 위해선 그만큼 상대의 마음을 정확히 겨냥하는 ‘경제성’ 역시 중요한 시대가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각주까지 포함해 ‘대화’니까요.

진심으로 남을 설득하고 싶다면, 상대를 지루하고 진절머리나게 만들면 안됩니다.

【4.우리는 천재 로봇이 아니다 : 지식공동체】

이상, 우리는 진정한 대화를 위해 ‘각주의 감각’이 필요하고 - 나아가 그 각주가 구체적으로 ‘어떤 각주’여야 하는지(원천, 과정, 경제성) 생각해보았습니다.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세상에 논쟁이 얼마나 많고, 내가 신경 쓸 일이 얼마나 많은데 그 때마다 일일이 근거를 따져보고 그게 어디서 왔는지, 추론 과정이 어떤지를 일일이 다 파악하라고?”

확실히 이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일 것입니다. 사람은 정치, 인터넷의 모든 시끌벅적들 등 모든 중요한 것에 대해 완벽하게 파악할 수 없습니다. 이는 누구든 마찬가지고요.

그리고 그 ‘불가능성’을 인정하는 것이 실질적인 해결의 열쇠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 생각해볼 만한 책을 간단히 소개해보겠습니다.

인지과학자 스티븐 슬로먼 등이 쓴 책 <지식의 착각>은 도입부터 아주 단순한 질문을 던지며 독자들을 충격에 빠트립니다.

“당신은 지퍼의 작동 원리를 알고 있습니까?”

얼핏 보기에 간단한 질문이지만, 이를 명확하게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극히 드물죠.

저자가 이런 특이한 질문을 던진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는 상상 이상으로 알고 있는 것이 없고, 이 때문에 개인의 지능을 과하게 믿는 대신 ’지식 공동체‘에 제대로 의존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섭니다.

“누구도 어느 한 가지 물건의 모든 측면을 속속들이 이해하지는 못한다[…]커피 메이커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풀을 바르면 종이가 어떤 이유로 붙는지, 카메라 초점을 맞추는 원리는 무엇인지조차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 […] 누구도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없다. 또한 정신이 온전한 사람이라면 모든 것을 다 이해하려고 시도하지 않을 것이다[…]평범한 사람이 다양한 과학적 주제를 심도 깊게 이해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오히려 비현실적이다. 그래서 우리는 지식 공동체에 크게 의존하는 것이다.”

-스티븐 슬로먼 외, <지식의 착각>(이하 동일)

<fig.5> 두명의 인지과학자가 쓴 책 <지식의 착각> 책 표지. 핵심은 자신의 ‘무지’를 인정하고 지식 공동체에 적절히 의존하는 법을 배우라는 것입니다. (왼쪽) 상상만으로 자전거를 그려보라고 하니 체인과 페달을 엉망으로 그리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자전거처럼 친숙한 물건도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잘 모르는 거죠. / 세종서적, MIT TechReview(링크)

저자는 이 책에서 ‘모르는 것 자체’가 문제라고 하지 않습니다. 진짜 문제는 “내가 무지하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할” 때에 생기죠.

경험, 지식이 없는 사람일 수록 자신이 모른다는 것조차 모르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예를 들면 운전을 아예 해본 경험이 없는 사람이라면, 자기가 운전에 대해 무엇을 모르는지, 그리고 운전을 할 때 무엇에 주의해야할지조차 모릅니다.

이때 만약 자신이 ‘모른다는 사실’ 자체를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들은 “자기가 얼마나 아는지 평가하는 기준이 자신의 지식밖에 없”기 때문에 어떤 정보가 신뢰할 만한지 판단하는 능력이 부족합니다.

레딧(영미권의 대형 인터넷 커뮤니티)을 통해 […] 정보를 찾아보고 온 환자들이 그렇지 않은 환자들보다 눈에 띄게 많이 아는 것은 아니라고 답했다. 다만 의료 지식에 대한 자신감은 높았다. 그래서 이들은 전문가의 진단을 거부하거나 대안 요법을 찾아다니기도 한다.

다른 연구에서는 사람들에게 “주식이란 무엇인가?”같은 금융에 관한 단순한 질문의 답을 인터넷에서 찾아보게 했다. 그 다음 아무 관련 없는 투자 게임을 내주면서 자신의 플레이에 돈을 걸 기회를 주었다. 인터넷을 검색해본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돈을 훨씬 많이 걸었다. 하지만 게임을 더 잘한 것은 아니라서 결국 돈을 적게 가져갔다[…] 손끝으로 클릭해서 전 세계의 지식을 획득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머릿속에 온갖 지식이 꽉 찬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문제는 잘 모르면서도 자신감에 가득차 있기 때문에, 전문가의 말을 전혀 들으려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직 자신의 말이 맞다고 생각하며 전문가 등 ‘진짜’를 추구해 온 우리 사회의 ‘지식 공동체’의 노력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당연히 이런 사람과는 대화가 성립하기 어렵겠죠.

하지만 인터넷 시대에 간편하게 모든 정보에 접근할 수 있다는 생각이 강해지며, 또한 자신과 비슷한 아집을 가진 사람들이 모이기 쉬워지면서 이런 사람들은 더 이상 ‘일부’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늘고 있다고 합니다.

이어 저자는 ‘지식의 착각’을 피하고 진짜를 추구하기 위해선 ‘시스템’차원의 노력 또한 필요하다고 강조합니다.

앞서 말했듯, 개인이 모든 사안을 일일이 다 파악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에 - 중요한 주장과 각주들을 대신 검증하고, 어떤 논쟁과 관련해선 어떤 전문가의 이야기를 들을지 등을 연결하고 돕는 공동의 시스템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백지장도 맞들면 낫듯이요.

“공동체에서 지식이 제대로 공유되려면 주어진 쟁점에 관해 신뢰할만한 정보를 많이 가진 사람이 전문가 역할을 맡아야 한다 [...] (물론) 전문지식을 가진 사람이 누구이고, 또 그 사람의 전문 지식이 편향되었는지 여부를 판단하기란 어렵다. 그렇다고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사회에는 도움을 주는 기관들이 있다 [...] 그들의 이력과 평판을 알아보고 평가할 수 있다.”

이런 신뢰할 만한 기관, 전문가, 언론 등이 있는 사회에선, 사람들은 확실한 정보를 얻을 수 있습니다.

물론 전문가나 기관, 언론이 100% 옳진 않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지식 공동체’에 의존한다고 했을 때, 중요한 것은 '완전히' 믿을 만한 곳을 찾는 것이 아니라 - '상대적으로' 더 신뢰할 수 있을 지점을 타협하고, 검증하고 찾아가는 것입니다. 이런 부분까지 포함하여 ‘각주의 감각’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런 노력을 포기하고, 기존 전문가, 언론이 다소 불완전하다고 해서, 모두 불신하고 차라리 ‘인터넷 검색을 할 수 있는 나’를 믿는 것2)은 자발적으로 ‘지식 공동체’에서 고립되는 처사입니다.

저자에 따르면, 이런 태도는 오늘날 우리 사회에 ‘대화’가 불가능하게 만든 핵심 원인이기도 합니다.

✏️

“학생들은 지식의 한계에 주목하고 공등체 안에서 공부해 지식의 공백을 메우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누구를 신뢰하고 실제 전문 지식이 어디에 있는지 배워야 한다[...]교육의 핵심은 어떤 주장이 타당한지, 누가 아는지, 그 사람이 진실을 말해줄 것 같은지를 배우는 과정이다.” -스티븐 슬로먼 외, <지식의 착각>

2)과학철학자 리 맥킨타이어는 <지구가 평평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과 생산적인 대화를 나누는 법>(위즈덤하우스, 2022)에서, 과학 부정론자들의 특징으로 ‘과학이 100% 옳지 않으면 아예 부정해버리는 것’을 짚고 있습니다. 아래처럼요.

"과학은 무조건 완벽해야 한다고 우기는 사람들은 오직 평생 어떠한 과학도 해보지 않은 이들 뿐이다. 우리는 종종 불가능한 기준에 집착하는 과학부정주의자들을 만나게 된다.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당신은 백신이 100% 안전하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나요?” 혹은 “지구 온난화에 대한 다른 더 많은 증거들이 들어오기를 기다려보는 게 어때요?” “흡연과 폐암 간의 연결을 밝히는 상관관계는 한번도 결정적으로 확증된 적이 없지 않나요.” 등이다."(링크) 하지만 100% 옳은 과학, 전문가, 언론 등은 존재할 수 없고, 어떤 지식과 주장-각주를 믿을 것인지는 언제든 상대적인 것입니다.

【5.맺음말】

그간 AI와 ‘가짜 뉴스’ 유행에 대해 생각할 때면, 올초 어떤 기사에서 읽었던 짧은 코멘트가 종종 머리 속을 맴돌곤 했습니다.

AI의 시대 가짜 뉴스가 엄청나게 많아졌기 때문에 문제라는 진단에 한 AI 업계 관계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가짜 뉴스는 나쁘죠. 하지만 그것을 ‘만드는’ 것 자체가 나쁜 게 아니라 ‘배포하는’ 게 나쁜 겁니다. 내가 개인 하드 드라이브에 가짜 뉴스 1만개를 저장해둔들, 누가 신경이나 쓰겠어요? 가짜 뉴스가 뉴욕 타임즈 1면같은 데 실리지만 않으면 되는 겁니다.”(링크)

‘가짜 뉴스를 만드는 것 자체는 나쁠 게 없다’는 그의 말이 옳은지는 둘째치고, 저는 가짜 뉴스가 신문 1면에 실리지 않으면 되는 문제라는 얘기에 왠지 모르게 오래 눈길이 머물렀습니다.

아무리 눈을 어지럽히는 거짓 정보들이 많더라도 우리가 의지하고 신뢰할 수 있는 시스템과 ‘각주의 감각’을 갖게 된다면 우리는 쉬이 휩쓸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머리말에서도 말했듯 옛날부터 사람들은 아무리 눈 앞에 명백한 증거를 가져다 대도 믿고 싶은 걸 믿었고, 이는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 많은 문제들은 최첨단 기술이 만들어낸 독특한 문제라기보다는, ‘믿고 싶은 마음’(개인)과 ‘대화하려는 마음’(사회)이 다퉈온 역사의 길 위에 있는 문제에 가까울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물론 기술 규제도 필요하겠지만 - ‘진짜’를 추구하기 위한 사회와 개인의 꾸준한 노력이 필요할 것입니다

각자의 위치에서 각주를 다루는 것, 그리고 때로 중요한 문제에 대해선 의지할만한 ‘지식 공동체’를 가꾸는 것 - 그것이야말로 ‘진짜’와 ‘대화’가 사라진 시대를 헤쳐가는 첫 걸음이지 않을까요?

※레터를 쓰며 읽은 책, 이 주제에 관심이 있으신 독자들이 추가로 읽을만한 서적 등을 추천합니다.

앤서니 그래프턴, 김지혜 옮김, 『각주의 역사』, 테오리아, 2016.

-각주에 대해 고찰한 본격적인 역사학 책이지만, 저자의 유려하고 명쾌한 글 솜씨 덕에 연필을 손에 들고서 약간의 주의를 기울인다면 저같은 문외한도 즐겁게 읽을 수 있는 책이었습니다.

오늘 레터에서는 주로 ‘증거로서의 각주’라는 부분에 초점을 맞췄지만, 사실 개인적으로 주목한 이 책의 핵심 테마는 어떻게 하면 ‘글밥’에 먹히지 않고, 우아하게 문학적 서사와 사실적 논증(근거)를 조합할 것인가였습니다. 각주들만 덕지덕지 붙여서 삐걱거리는 몸집 큰 잡동사니 글뭉치를 읽고 싶어하는 사람은 없으니까요. 특히 볼테르가 역사를 서술할 때 세부사실의 '늪'에 빠지지 않기 위해 얼마나 고군분투했는지에 대한 대목과, 단순히 각주를 달았는지 여부만으로 평가할 수 없는 - 신뢰와 ‘진정성’의 영역(귀차르디니)에 대한 이야기 등도 흥미로웠습니다.

이 책에도 당연히 수백개의 각주가 붙었고, 책 자체가 수많은 각주를 달고서도 굉장히 우아하게 독창적인 서사를 내놓고 있기 때문에 이 책 자체가 책의 내용에 대한 하나의 예증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다만 안타깝게도 절판이 되었기 때문에 관심이 있으신 분들은 도서관에서 빌려보시길 바랍니다.

스티븐 슬로먼 외, 문희경 옮김, 『지식의 착각』, 세종서적, 2018.

-이 책은 예전에 다른 책에 인용된 대목을 우연히 읽고 흥미가 생겨서 읽었던 책인데 이번에 다시 읽어보았습니다. 처음 읽었을 때 ‘지퍼’에 대한 질문이 너무 인상적이어서 오래 기억에 남았었습니다.(당연히 설명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전혀 모르겠더라고요...) 이 책은 굉장히 명쾌하고 친절하게 쓰여진 대중서인데, 그러다보니 다소 '너무 투박하게 느껴지는' 대목도 있지만 - 이 시대 지식 공동체 교육에 대해 꽤 중요하고 참신한 아이디어를 주는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한편 이 책은 고스란히 Literacy에 대한 책으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아래는 ‘개인의 지식’ 구조에 대해 설명한 부분인데요. 평소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던 차라 개인적으로 인상깊게 읽었던 대목이었습니다.

“내 지식에는 사실만 있는 것이 아니라 포인터(pointer, 메모리의 주소를 가리키는 자료)와 플레이스홀더(place holder,빠진 내용을 대신하는 기호나 텍스트의 일부)가 가득하다. 가령 내가 스핑크스가 이집트에 있는 것은 알지만 스핑크스가 뭔지 모른다고 해보자[…]스핑크스라는 무언가가 그곳에 있다는 믿음을 활용한다[…]이집트에 관한 내 지식에는 자세한 정보는 다른 곳에 있다고 말해주는 포인터로 넘쳐난다.”(p.166)

‘교양’이란 어떤 정보를 달달 외우는 게 아니라, 어떤 정보가 어디쯤 있는지 아는 감각이라는 말이 있기도 하고요. 그러고보면 오늘날 인터넷 시대의 '교양'이라는 건 그저 배부른 단어가 아니라 가장 필요한 ‘능력’의 한 형태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조지 오웰, 김태한 옮김, 『조지 오웰 진실에 대하여』, 필로소픽, 2021.

-<1984> <카탈로니아 찬가> 등을 쓴 조지 오웰이 남긴 글(칼럼 등) 가운데 ‘진실’과 관련된 대목들을 엮은 책입니다. ‘2+2=4’처럼 논란이 될 이유조차 없는 명백한 사실조차도 부정당하기도 했던(2+2=5다!), ‘광기의 시대’ 한 복판을 지나며 저널리스트이자 소설가, 정치를 글쓰기로 승화하고자 했던 한 개인의 탈진실에 대한 고민을 읽을 수 있습니다.

오늘 다뤘던 맥락과 관련해 참고해볼만한 대목은 버나드 쇼의 말을 빌어 ‘우리는 과연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의 이유를 논증할 수 있는가?’를 묻고 스스로 답하는 칼럼이었는데요. 오웰은 생각보다 이 명백한 사실을 논증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깨닫고, 이는 어쩌면 오늘날 우리가 지녀야 할 지식의 짐이 너무 무겁기 때문이 아닐까...라고 착잡한 어조로 끝을 맺습니다. 그런데 이를 스티븐 슬로먼의 입장에서 읽는다면 이런 현상은 당연한 일인 것입니다.

【글 속 한 문장🖍】

👤주제에 대해 더 읽을 만한 글들을 골랐습니다. 각 사진을 누르면 글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포스트 진실' 시대의 뉴스 읽기

독서시간: 약 4분 / 글자수: 약 1900자

🖍글 속 한 문장

포스트-진실 시대에 생존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비판적 사고’다. 스노든은 “가짜뉴스의 문제는 영웅적 심판의 등장으로 해결되지 않는다”며, 시민들이 비판적이고 참여적 시각으로 정보에 접근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미국 공영 라디오방송인 NPR도 정보의 사실 여부를 체크하는 방법들을 제안한 바 있는데, 그 대전제는 각자 ‘약간의 시간을 할애할 용의’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평소 의심하던 바를 해소해줘서 무릎을 치게 만드는 뉴스가 있다면, 자기 내면에서 나오는 “진짜?”라는 질문을 존중하고, 더 많은 관련 정보들을 찾아보라는 것이다.

👤김스피의 블라블라

윤태진 교수의 ‘탈진실 시대’의 뉴스 읽기, 정보 습득에 대한 칼럼입니다. 굵게 표시한 부분이 오늘 레터에서 살펴본 ‘각주의 감각’과 비슷한 맥락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어떤 주장에도 반드시 그 아래엔 의도와 근거가 있으며 이를 제대로 파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만 레터에서는 이런 개인의 비판적인 태도를 기반으로 하되, 나아가 시스템적으로 정보를 검증하는 것을 도울 수 있는 방법(언론 등 시스템)까지 고려해보았습니다.

챗GPT 시대의, 인용을 위한 직접 읽기

독서시간: 약 15분 / 글자수: 약 18000자

🖍글 속 한 문장

과연 이 ‘인용’이 정확한 것인지는 결국 직접 읽지 않으면 알지 못해요.일반적으로 사람들은 텍스트를 자신이 객관적으로 읽어낸다고 생각하는데요. 사실 인용의 핵심은 그 정보나 의견의 본질을 헤치지 않으면서 내가 쓰려고 하는 글의 맥락 맞게 가져오는 거거든요[...]읽기를 정확하게 하고 난 뒤, 그것을 내가 어떻게 나의 맥락으로 가져갈 것인가를 고민하는 거죠. ‘객관성을 유지하면서도 그것이 새로운 맥락에서 어떤 새로운 의미를 획득하게 되는가’가 인용의 핵심이예요.

👤김스피의 블라블라

지난 3월 <유튜브는 책을 집어삼킬 것인가> <영어의 마음을 읽는 법> 등을 쓴 김성우 선생님과 진행했던 인터뷰입니다.

당시 인터뷰에서 김성우 선생님은 챗GPT의 시대에도 ‘적합한 인용을 하기 위한 읽기’가 필요하다고 언급했는데요. 오늘 각주에 대한 레터를 쓰면서 그 대목이 떠올랐습니다.

아무리 AI가 많은 자료를 찾아올 수 있어도, 그 자료의 적합성과 신뢰도, 그리고 그 자료를 어떻게 활용해 나의 주장에 적용할지 등은 결국 인간이 해야될 일일 것입니다.

가짜 뉴스의 시대

독서시간: 약 5분 / 글자수: 약 2100자

🖍글 속 한 문장

다양한 정보매체가 비약적으로 발전한 오늘날[...] 소셜미디어를 통해서 누구나 자신의 정보나 의견을 전달할 수 있지만 집단이 만들어 내는 정보에 개인이 쉽게 휩쓸리는 위험도 그에 따라 커졌다[...]문제의 핵심은 사회적 신뢰의 결핍이다. 사회가 복잡해질수록 주위의 사건을 보다 단순화해서 보려는 욕구도 동시에 강해진다. 기존의 정치나 법, 또는 언론이나 전문가 집단이 이러한 욕구들을 제대로 충족시켜주고 신뢰를 쌓았다면 가짜뉴스가 들어설 공간도 그만큼 줄어들었을 것이다.

👤김스피의 블라블라

송두율 교수의 가짜 뉴스 관련 칼럼입니다. 보통 '가짜 뉴스'에 대해서는 가짜 뉴스의 생산자, 수용자 개인에 대한 이야기로 흐르곤 하는데요 (가짜 뉴스를 "생산하지 말아야" 한다. / 가짜 뉴스에 "주의해야" 한다) 물론 이런 개인의 행동, 태도도 중요하지만 이보다도 우리가 안심하고 지식 공동체에 의지할 수 있는 사회적 신뢰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반증 가능성’이 과학의 핵심이다

독서시간: 약 7분 / 글자수: 약 3200자

🖍글 속 한 문장

“과학자가 어떤 현상에 대해 가설을 제시한다. 그런데 이 가설이 검증이 불가능하다면 어떻게 될까? ‘틀리다’는 것도 증명할 수 없지만 ‘맞다’는 사실도 증명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이 가설이 ‘과학적이지 않다’고 말한다. 흔히 하는 농담으로 ‘틀리지도 못하는’ 것이다[...]반증 가능성은 그 가능성이 현실화될 때 세계에 대한 이해를 더욱 깊게 만들었으며 앞으로도 만들 것이다.”

👤김스피의 블라블라

반증가능성이란 어떤 사실이 틀리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가능성을 뜻하는데요. 왜 이 반증가능성이 과학의 핵심인지를 설명해주는 박재용 과학저술가의 칼럼입니다.

오늘 레터에서 살펴본 <각주의 역사>에서도 그래프턴은 ‘각주가 있어야 역사가의 서술을 검증, 반증할 수 있다’라고 말하기도 했죠. 설령 틀린 것으로 드러나더라도 그것이 왜 틀렸는지를 탐구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사실을 알 수 있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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