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시.사 레터 37회 (2022.01.05) 안녕하세요? 라디오 피디로 일하고 있는 이주영입니다. 다양한 장르의 프로그램을 거쳐 지금은 시사 프로그램인 KBS <최영일의 시사본부>를 연출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제 소개를 하고 나니 ‘시사’에서 ‘시’로 어떻게 넘어가야 할지 막막해집니다. 징검다리를 놓아보겠습니다. 저는 문학 덕후, 정확히 말하면 소설 덕후이고 특히 한국소설을 사랑합니다. 좋아하는 작품에 대해 실컷 이야기하고 싶어서 문학서점 ‘고요서사’ 차경희 대표님과 함께 팟캐스트 <요즘 소설 이야기>(요소야)를 만들었습니다. 이 년 동안 신나게 소설 얘기를 했습니다. 하지만 시는 아무래도 어려웠습니다. 단어들 가운데에서 자주 길을 잃었습니다. <요즘 시 이야기> 특집 방송을 할 때마다 출연한 ‘시 선생님’들에게 빠지지 않고 물어보았습니다. “이 시는 어떻게 읽어야 하나요?” 선생님들의 대답은 한결같았습니다. “마음대로 읽으세요.” 그리하여 ‘마음대로’ 고르고 읽은 시 두 편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시를 핑계로, 제 마음을 살짝 내어놓습니다. 💕이주영 피디가 사랑한 첫번째 시💕 트럭 신봉자 (황성희, 『눈물은 그러다가 흐른다』) 완전한 문장을 쓰는 것은 어려워요. 주어나 동사의 선택은 물론이고 뭘 쓰고 싶은지, 뭘 쓰기 싫은지, 쓰고 싶은데 못 쓰는 건 뭔지, 쓰기 싫은데 써야 하는 건 뭔지, 어려워요. 완전히 미치기는 어려워요. 밥도 먹어야 하고, 쇼핑도 해야 하고, 기분 나쁜 건 기억했다가 말대꾸도 해야 하고, 완전히 잊어버리기는 어려워요. 논공 가는 버스도 기억해야 하고, 서문시장 가까운 환승역도 알아둬야 해요. 완전히 버리기는 어려워요. 아까워서가 아니에요. 저마다의 사지 속에 담긴 아이들을 보세요. 제 나이의 눈금에서 찰랑거리고 있어요. 저 인부들 지금 저렇게, 사다리 타고 올라가 가지치기하고 있어도, 남기는 가지는 따로 있어요. 남겨진 가지의 의무는 따로 있어요. 통째로 뽑는 건 쉬워요. 뽑히는 것도 쉬워요. 나무가 나무를 잊는 게 어려울 뿐이죠. 완전히 미워하는 건 어려워요. 어쩌다 하늘이 감동을 줄 때도 있다고요. 구름이 신기해서 나도 모르게 넋 놓고 쳐다볼 때가 있다고요. 그럴 때 난 구름이 새겨진 이 천장의 벽지를 완전히 미워하지는 못해요. 보도블록 다닥다닥 붙여진 땅바닥 위에서 나도 모르게 억새 사이로 달맞이꽃을 찾을 때도 있다고요. 완전히가 어려워요. 봐요. 난 지금도 안전거리 유지하며 저 트럭을 따라가요. 냅다 들이받지도 못하고. 눈앞의 트럭을 믿지 않기란 어려워요. 완전한 문장처럼 어려워요. 처음에는 시가 이렇게 들렸습니다. 삶 따위 냅다 들이받고 싶은데 그러지 못하고 있다고요. 완전히 놓아버리면 편할 텐데 그러지 못하고 죽음과 애써 ‘안전거리’를 유지하는 사람이 떠올랐습니다. 요즘 제 모습 같았습니다. 살아갈수록 트럭 짐칸에 잡동사니가 늘어갑니다. 마음만 먹으면 한 번에 싹 치울 수 있을 것 같았는데, 가볍게 비우고 운전대를 놓고 트럭도 팔아치울 수 있겠다 싶었는데…… 사는 게 참, 그렇지가 않습니다. 완전히 미치지도 버리지도 못하는, 안전거리 따위 지키고 살아야 하는 삶이여, 라고 절절히 외치며 시집 귀퉁이를 접어두었습니다. 그런데 몇 번 다시 읽다보니 ‘완전히’라는 단어가 다르게 다가왔습니다. ‘호불호주의자’인 저는 좋고 나쁨 앞에도 ‘완전히’를 붙여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었습니다. 완전히 좋은 사람과 완전히 나쁜 사람, 완전한 행복과 완전한 불행, 완전한 사랑과 완전한 미움. 모든 것을 이렇게 깔끔하게 분류하고 정리하는 데에 익숙했습니다. 삶이 워낙 안갯속처럼 느껴져 손에 쥔 것만이라도 분명하게 감각하고 싶었거든요. 하지만 실밥을 깨끗이 정리한 자리에 실밥은 다시 튀어나와 있습니다. 완전히 매끈하게 나누려고 할수록 다음 스텝이 꼬여갔습니다. 그래서 요즘은 ‘완전히’를 지우려고 노력중입니다. 깔끔함과 명쾌함을 버리고 행복과 불행, 사랑과 미움, 좋음과 나쁨 사이 어딘가에 머물러보는 연습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눈앞의 트럭을 냅다 들이받지 않고 천천히 따라가는 사람이 대견하게 느껴집니다. 삶의 비밀은 트럭과 나 사이의 안전거리에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다보면 언젠가 “보도블록 다닥다닥 붙여진 땅바닥 위에서 나도 모르게 억새 사이로 달맞이꽃을” 발견할 날을, “완전히”를 제 삶에서 완전히 지우지 않아도 되는 날을 맞이할 수 있을까요? 💛막간 우.시.사 소식: 새해에 읽기 좋은 시집 올해는 어떤 시집을 읽어보실 계획인가요? 이미 정해서 읽고 계신 분도, 아직 정하지 못한 분도 계실 테지요. 어떤 시집을 골라 읽을지 망설이고 계시다면, 이 시집 두 권을 추천할게요! 장수양의 시는 속삭이며 걷는다. 허공의 접촉, 허공의 온도를 느끼며 사람들 사이를 걷는다. 있어요 사랑이 해냈고 껴안으면 눈이 쏟아지고 그것도 함박눈이 뭉친 듯이 크게, 감히 무엇도 이처럼 하얗게 사라지지 않는다는 듯이 세차게 우리의 가슴을 두들겨 _ 「캐치!」에서 남의 일을 자신의 일로 기억하는 사람, 이문재 시인의 다섯번째 시집. 혼자 자유로워도 죄스럽지 않고 여럿 속에서 고독해도 조금 자유롭게 자유롭지만 조금 고독하게 그리하여 자유에 지지 않게 고독하지만 조금 자유롭게 그리하여 고독에 지지 않게 _「자유롭지만 고독하게」에서 💕이주영 피디가 사랑한 두번째 시💕 상해식당 (이병률, 『이별이 오늘 만나자고 한다』) 중국식당 주방에는 의자가 없었지 누구도 앉지를 않았으니까 그래도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있는 곳은 유일하게도 밀가루 포대 나는 만두를 빚는 시간을 제일 좋아했지 시간을 뚝뚝 잘라 밀대로 밀고 시간을 푹푹 퍼서 손바닥만한 세계에 담는 시간 주방에서 막일을 하는 나였는데 내가 떠나야 할 날에는 당신이 나에게 자꾸 뭐라 그랬지 난 그 말을 알아들을 수 없어 한자로 써달라고 했는데 당신이 작업대 위에 하얗게 밀가루를 뿌리고는 이렇게 썼지 가지 마요, 안 가면 안 되나요 눈빛을 교환하면 안 될 것 같아 그 시간의 반죽을 툭 잘라버리고 싶은데 어딘가에 좀 앉아야겠는데 그러지 않으면 힘 풀려 터져버린 세계가 와르르 쏟아져버릴 것 같은데 상해 중국식당 주방에는 정말이지 의자가 없었지 상해에 가본 건 까마득하고 중국식당 주방에서 일해본 적도 없지만, 시를 읽는 내내 사 년 전 겨울이 떠올랐습니다. 지쳐 있었습니다. 낯선 곳으로 떠나고는 싶은데 돌아다닐 기력은 없어 기차에 실려가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서쪽으로 흘러가기만 하면 되는 여행.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밤 기차를 잡아탔습니다. 침대는 관처럼 좁고 딱딱했습니다. 요람처럼 흔들리는 열차에서 곤한 잠에 빠졌습니다. 일주일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고 누구와도 말하지 않고, 고요히 이대로 누워 모스크바에 당도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습니다. 하지만 계획은 실행되지 못했습니다. 아니 실행하기를 기꺼이 포기했습니다. 타샤와 이고르를 만났거든요. 타샤는 제 옆 침대, 이고르는 타샤 위의 이층 침대를 썼습니다. 이고르와 저보다 스무 살가량 많아 보이던 타샤는 우리 중 가장 일찍 일어났습니다. 매일 아침, 그녀가 뜨거운 물로 홍차를 내리고 빵과 감자 수프, 햄, 과일 등을 꺼내면 이고르와 저는 아기 새처럼 타샤 주위에 모여 앉았습니다. 이고르는 조잘조잘 수다를 잘 떨었습니다. 무뚝뚝한 타샤도 이고르 옆에선 자주 웃었습니다. 이고르는 제게 빅토르 최의 음악을 들려주었고 저는 그에게 도스토옙스키와 톨스토이를 좋아한다고 말했습니다. 이들과 함께, 밀가루처럼 날리는 하얀 눈을 보고 밥을 먹고 차를 마시고 실없는 농담을 하다보니 젖은 빨래 같던 마음이 조금씩 마르기 시작했습니다. 밀린 잠을 자지도 못하고 고요히 책을 읽을 수도 없었지만 그런 건 아무렇지도 않았습니다. 이고르와 타샤가 제 곁에 있었으니까요. 우리가 함께 보낸 시간은 고작 나흘이었고 앞으로 영영 만날 수 없겠지만 저는 그들을 아직도 ‘내 러시아 가족’이라고 부릅니다. 상해 중국식당의 만두 빚는 주방이, “작업대 위에/ 하얗게 밀가루를 뿌리고는” 쓴 “가지 마요”라는 글씨가 저를 사 년 전 겨울, 러시아로 데리고 갔군요. 신기하고 기쁜 일입니다. 📢 다음주 <우리는 시를 사랑해> 시믈리에 ![]() 다음주 <우리는 시를 사랑해> 시믈리에💛 안톤 허 번역가 다음주에 아름다운 시 두 편을 추천해줄 분은 한국문학 번역가 안톤 허 님입니다. 신경숙 작가님의 『리진』 『바이올렛』과 황석영 작가님의 『수인』을 영어로 번역하여 미국과 영국에 출판하였습니다. 안톤 허 번역가가 여러분께 권하는 시 두 편을 기대해주세요. 그럼, 다음주 수요일에 만나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