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애하는, 나의 친구 에게... |

친애하는,
나의 친구 에게

Photo by Mak
당신에게 전하고 싶은 말
내가 나일 수 있기에
십 년 전쯤이었을까요. 어느 날 아침 눈을 떴을 때, 문득 이런 생각을 떠올렸습니다.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내가 스스로 인생을 망치는 순간이 있다면, 그것은 분명 술 때문이다." 그렇습니다. 저는 술을 좋아합니다. 하지만 잘 마시지는 못합니다. 잘하는 것을 좋아하면 좋을 텐데, 못하는 것을 좋아할 때는 그 모습이 얼마나 애처롭고 볼품없는지 모릅니다. 나에게는 술이 그렇습니다.

젊은 내가 예언한 것처럼, 술은 언제나 내가 세운 계획을 망쳐놓았습니다. 유난히 숙취가 심했기에 술을 마신 다음 날을 통째로 날려버리곤 했습니다. 술을 마신 다음 날이면 덜 마른빨래처럼 쿰쿰한 냄새가 났습니다. 실제로 그런 냄새가 난다기보다는 '그런 냄새가 날 것 같은 인생이 된다'가 좀 더 정확합니다. 죄책감의 냄새입니다. 숙취에 젖어있을 때 나는 마치 패배자가 된 것 같은 기분을 느꼈습니다. 그래도 며칠이 지나면, 지독한 사랑처럼 다시 술을 찾았습니다.

한때는 내가 술을 좋아하는 이유를 정신분석학적으로 찾아보려고 한 적도 있었습니다. 어렸을 적에 부모님의 사랑이 부족했다든지, 좌절되었던 욕망 때문이라든지, 미성숙한 방어 기제라든지 하는 것들 말입니다. 어쩌면 술을 계속 마시기 위해 그럴듯한 핑계를 찾고 싶었던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결론을 내리기로는, 그저 술이 좋기 때문에 좋아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엊그제는 십년지기 친구들을 만나 이른 아침부터 술을 마셨습니다. 어릴 적 친구를 만나면 내가 여전히 이십대라고 쉽게 착각하고는 합니다. 본질적으로는 다들 그때와 전혀 달라지지 않기도 했고, 어릴 적에 내가 간직하고 있던 모습을 스스로 발견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언제나처럼 새로울 것 없는 대화를 하고 시답잖은 농담을 주고받았습니다. 술잔을 부딪히며 옛날이야기를 꺼내고 서로를 놀렸습니다. 오랜 친구들이 떠올라서 문득 전화를 걸고 안부를 물었습니다. 그런 별스럽지 않은 자리가 즐거웠습니다.

속이 하루 종일 쓰라렸지만, 그럼에도 이런 날이 있어 마음이 좋습니다. 내가 나일 수 있기에, 나는 영영 친구와 술을 놓지 못할지도 모르겠습니다.
2022년 2월 22일
변함없는 우정을 위하여
윤성용 드림
당신이 읽었으면 하는 글
절대 고독과 절대 고통의 시간
나는 투명한 유리창을 건너 내 자리로 돌아왔다. 그는 다시 천장을 보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이입하던 순간 세상과 단절된 아찔한 고립감을 느꼈다. 그것은 아파보지 않은 인간의 한심한 한탄이었다. 그나마 명료한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는 반드시 무언가의 의미가 있어야 한다고. 하지만 절대적인 고독과 고통의 시간. 일 년간 매일 바라보던 천장. 죽음을 달성하는 것처럼 방 안에 쌓여가던 술병. 그 시간들을 몸이 온전한 자가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는가. 나는 몰이해를 증명하고야 말았다. 모든 세상의 질서가 나와 같다는 생각은 절대적인 착각이자 오만이다. 지금도 세상의 누군가는 우리가 한 번도 경험해보지 않은 순간들을 살고 있다.
오늘은 작가이자 응급의학과 교수이신 남궁인 님의 칼럼을 소개해드립니다. 어느 날 구급대와 함께 환자 한 명이 실려옵니다. 그는 마치 노숙자와 같은 몰골을 하고 있습니다. 가족들과 연이 끊기고 몸이 아파 일 년 전에 일을 그만두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생계지원금으로 술을 마시며 홀로 지냈던 그는 간경화 말기였습니다. 일 년 동안 가족도, 대화도 없이 무엇을 했냐는 의사의 질문에 그는 '그저 아팠다'라고 말합니다. 모두의 인생은 밀도 높은, 어떠한 의미를 지녀야 한다는 믿음이 어쩌면 나의 협소한 경험에서 나온 착각과 오만은 아니었을지, 생각하게 되었던 칼럼이었습니다.
당신에게 들려주고 싶은 음악
이고도 - 우리 같은 사람들
아 우리 같은 사람들
아 우린 같은 사람들
내가 틀리지 않을 수 있을까요
오늘은 이 고도의 '우리 같은 사람들'을 소개해드립니다. 요즘 여성 인디 아티스트들의 음악을 자주 듣고 있는데요. 김뜻돌, 베리코이버니, 박소은, 김수영 등등 개성 있는 뮤지션들 사이에서 이번 주는 이고도의 음악에 빠졌습니다. 특히 2020년에 싱글 앨범으로 발매한 '우리 같은 사람들'은 중독적인 매력이 있습니다. 리드미컬한 기타 리프와 청량한 음색, 마음속에 콕콕 박히는 노랫말까지, 어느 것 하나 놓칠 것이 없습니다. 이 노래를 듣다 보면 어느새 '아 우리 같은 사람들, 아 우린 같은 사람들-'을 되뇌게 될 거예요.
P.S  

•  개인적인 사정으로 뉴스레터를 하루 늦게 보냈습니다. 기다려주신 구독자 분들께 죄송한 마음을 전합니다.

•  새로운 팟캐스트 에피소드가 업로드되었습니다. 영화 코너 [와츄원]에서는 왓챠의 영화를 보고 이야기 나눕니다. 이번 에피소드에서는 세기말 감성의 영화 <매트릭스>를 다루었어요. 지금 바로 팟캐스트로 들어보세요.

•  주말 전까지는 추위가 계속된다고 합니다. 눈이나 비가 오는 날도 있으니 우산을 꼭 챙기세요. 그럼 안녕, 친구

"오늘 편지는 어땠어요?"

* 답장과 피드백은 늘 꼼꼼히 읽고 있어요. 좋은 말은 마음 속에 간직하고 지적은 기꺼이 반영할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