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이 노래를 들은 건 몇 년 전 여름이었어. 그녀는 ’슬픔을 노래하는 것’으론 부족해서 스스로 슬픔이 된 사람 같았어. 관찰자로, 이야기꾼으로 남는 건 무책임한 것 같아서 아예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버리는 사람 있잖아.

화분에 꽃이 웃을 만큼 맑은 날 
왠지 나 혼자 울상인 얼굴을 짓네
그 때 한 소녀가 내게 친절히 다가와 
슬픔을 집에 가두지 말고 풀자고 했다 
슬픔을 집에 가두지 말고 풀자고 했다 

슬픔은 저기 골목 끝까지 갔다가 
내가 부르면 다시 달려오고 
슬픔은 저기 시장통에 구경갔다가 
밥 짓는 냄새에 돌아오지 

슬픔에 대해 얼마나 집요하게 생각해야 이런 가사를 쓸 수 있을까. 그녀는 슬픔을 들쳐매고 이 골목 저 골목을 얼마나 헤맸던걸까. 슬픔에 대해 함부로 단정 짓기 싫어서 슬픔과 친구 삼아 지냈을 날들. 그 때 나는 사무실에서 이어폰을 꼽고 일하는 중이었는데. 이 노래를 듣고 멍해지더니, 그런 생각이 들더라. 이 사람을 안아주고 싶다. 아무 말 안하고 꼭 안아주고 싶다. 노래를 듣고 그런 생각이 든건 처음이었어. 

내가 부르면 오고, 가라면 가는 슬픔은 훈련을 잘 받은 사냥개같아. 그녀는 결국 슬픔의 주인이 된 거겠지? 다행이라고 생각했어. 배고프다고 돌아온 슬픔에게는 밥을 주면 되는 거잖아. 내 상처와 눈물을 뜯어 먹은 슬픔은 또 제 갈 길을 가겠지. 슬픔은 왔다가 또 가는 것. 그걸 알고 나면 슬픔이 두렵지가 않잖아. 나도 덩달아 용감해졌어. 

그리고 또 몇 번의 여름이 지나고, 친구가 하는 서점에서 그녀의 공연이 열린다는 소식을 들었어. 난 그녀를 꼭 만나야 된다며, 친구에게 자리를 맡아달라고 했어. 다행히 관객석이 꽉 찼더라. 혹시나 관객석이 비어있다면 그녀가 슬플 것 같았서 걱정했거든.  그녀는 내 생각보다 큰 키의 소녀였어. 날카롭고 침착해보였고 말 수도 적었어. 숏커트 머리가 참 잘 어울렸어. 화장기 없는 얼굴과 까무잡잡한 얼굴이 참 건강해보였어. 그래, 이런 가사를 쓸 사람이면 저렇게 강한 사람이겠구나. 괜히 머쓱해졌지 뭐야. 저렇게 강한 사람을 내가 위로할 생각을 했다는 게 왠지 부끄럽잖아.

나는 얼굴 근육이 덜 발달한 사람을 부러워해. 마음과 얼굴 사이에 대응선이 100개 정도 되는 나는 표정을 숨기지 못해. 근데 그녀는 표정이 별로 없었어. 시선도 목소리도 안정적인 사람. 그래서 의지하고 싶은 사람. 의지 하고 싶은 노래가 내 눈 앞에 서있었어. 그 무표정한 얼굴에 좀 주눅이 들었던 것 같아. 내 표정은 이미 어쩔 줄 몰라서 삐죽삐죽 망가지고 있었으니까. 공연이 끝나고 한 발 한 발 무대 앞으로 나갔어. 노래를 들을 때마다 가졌던 쌓아온 마음이 어느새 입 밖으로 질질 새고 있더라. "노래를 듣고 안아주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안아드려도 될까요" 나는 그렇게 말했어. 그녀는 너무 놀라면서 감사하다고 했어. 그녀의 얼굴도 조금 뭉개지더라. 뭉개지는 웃음 있잖아. 다행이라고 생각했어. 

그리고 또 한 번 더 여름이 지났어. 오늘 그녀가 세상을 떠났다는 말을 들었어. 지난 겨울 그녀가 인스타그램에 올렸던 건축 현장 자격증 사진이 생각났어. 슬픔에게 음악을 저당잡힌 날들. 나는 왜 잘 지내냐고 안부 한 번 보내지 않았을까. “한 소녀가 내게 친절히 다가와 슬픔을 집에 가두지 말고 풀자고 했다” 그 소녀는 내게 슬픔의 주인이 되는 법을 불러줬는데 나는 왜 응답을 해주지 못했을까. 

그녀가 떠난 곳에서는 슬픔이 영영 돌아오지 않았으면 좋겠어. 한 번만더 그녀를 안아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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