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이 지나갔다. 매년 이맘때쯤에 태풍이 한 번씩 지나가곤 하지만, 이번 태풍 ‘힌남노’는 역대급으로 강한 ‘초강력’ 태풍이라고 미리부터 예보되었기에 모두 잔뜩 긴장하고 있었다. 불과 몇 주 전에 있었던 폭우로 인한 피해도 채 복구가 되지 않은 시점이라 더더욱 그랬다. 오키나와로 방향을 틀었다, 대만으로 간다, 말이 많던 태풍은 결국 한반도에 상륙했다.

태풍의 영향권에 들기도 전부터 서울엔 하루 내내 비가 왔다. 엄마와 아빠와 할머니에게 차례로 전화가 왔다. 어디 돌아다니지 말고 창문 잘 닫고 집에 있으라고. 집을 떠난 지 십 년이 다 되어가는 다 큰 딸을 아직도 온 식구가 이렇게 걱정한다.

비가 오는 창가를 내다보며 청소를 하고, 오랜만에 집에서 따끈한 밥을 해 먹고, 비를 뚫고 도착한 택배를 뜯고, 왠지 우중충한 분위기와 잘 어울리는 소설을 읽었다. 태풍이 오는 날은 항상 비현실적인 느낌에 휩싸인다. 누군가가 또는 나 자신이 공중 부양하며 나의 행동들을 지켜보는 것만 같다. 또는 내가 하는 모든 행동이 다 예정되어 있는 것만 같은 느낌. 인간이 결국 순응할 수밖에 없는 자연의 위력 앞에서 위축되는 마음 때문일까.

폭신한 이불 속에서 한참을 꼬물대다가 잠이 들었다. 밤새 비가 왔는지 땅이 젖어있었지만, 아침에 일어났을 때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유독 고요한 공기를 느끼며 커튼을 젖히고 창문을 열어보니 파란 하늘이 저 멀리서부터 개이고 있었다. 태풍은 서울로 오기 전 동쪽으로 비켜나 울릉도를 지나 멀어졌다. 걱정했던것 보다는 덜했지만 직접적인 영향권 아래에 있던 제주와 포항 지역은 침수와 강풍으로 인한 피해를 피할 수 없었다.

그렇게 우리를 휩쓸어놓고도 자연은 의연했다.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순식간에 갠 하늘은 어느 때보다 푸르고 청량했다. 한결 시원해진 공기는 새로운 계절을 알렸다. 우린 또 자연의 흐름에 순응하며, 새로운 계절을 통과하고 앞으로 나아가야겠지.

미묘하게 차분한 가을의 공기는 온몸으로 느낀다. 마음이 알아채기도 전에 몸이 먼저 행동한다. 괜히 가을에 찾던 노래들을 다시 꺼내 듣고, 쓸쓸한 소설책에 손이 가고, 밤거리를 무작정 걷고 싶어지고, 따끈한 국물이나 전어회에 소주 한 잔이 생각난다. 을지로 노포 어딘가에서 한 잔 딱 하고 싶은 날이었는데 아쉽게도 버드의 유일한 술친구(여러분도 아는 그 친구 맞음, 김렛🍸)는 건강상의 이유로 요양중이라 불러 낼 수 없었다. 그래도, 아쉬운 마음에 괜히 쓸쓸해지는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가을 타기 좋은 날이었다.

<위대한 개츠비>의 한 장면에서 조던은 이렇게 말한다.

“유난 떨지마. 가을이 돼서 날씨가 상쾌해지면 인생은 다시 시작되니까.”

그렇게 가을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