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연구 톺아보기 53호

노동의 지형학

  올해 8월부터 10월까지 나는 부산지역의 의존계약자인 특고, 프리랜서, 플랫폼노동자 1,000여명을 대상으로 온•오프라인 설문조사를 진행했다. 부산현대미술관에 전시된 권은비 작가의 <노동의 지형학-12개의 장면들>을 보면서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는데 이번호에서는 이것을 정리해보려고 한다.

권은비 작가의 <노동의 지형학-12개의 장면들> 전시

‘노동의 지형학’이라고 하면 무엇이 떠오르는가? 지형학이 땅의 굴곡과 구조, 즉 지표의 형상과 분포를 분석하는 학문이라면, 노동의 지형학은 “노동이 어디에서, 어떤 구조 속에, 어떤 불균형으로 존재하는가”를 공간적으로 읽어내려는 시도가 될 것이다.

 

1) 보려고 하는데 보이지 않는다



<그림1> 권은비작가의 ‘노동의 지형학’작품

 



<노동의 지형학> 작품의 형태를 보면, 천장 구조물에 설치된 LED조명에 총 12개로 구성된 아크릴 조각 세트가 매달려 있다. 위 사진과 같이 투명한 아크릴 조각들로 되어 있어 잘 안보여 처음에는 어떤 형상인지 신경을 써서 보아야한다. 여기에 다른 관람객의 실루엣이 겹치고, 교차하는 아크릴 조각이 조명으로 보였다, 안보였다 한다. 각 세트가 시간을 주기로 오르락 내리락하기도 한다. 더해서 청각적으로 헤드셋을 착용하고 관람하게 되어 있어 어떤 조각을 설명하는지 모르는 와중에 작가의 나레이션이 계속 들려온다. 보려고 노력하면 시각과 청각을 상당히 집중하게 만드는 작품이었다. 나는 몇 번이나 이 작품 주변을 돌고 나서야 형상을 대충 확인할 수 있었다. 작가는 장면 12개를 나레이션하는데 작품에는 어떤 장면을 형상화한 것인지 표시되지 않아 수수께끼처럼 시각(작품)과 청각(나레이션)을 매칭하려는 관람자의 노력을 이끌어낸다. 작가의 의도는 보려고 애쓰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노동-노동의 고통’또는 ‘그림자노동’을 표현하려고 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크릴판 조각들이 투명줄에 매달려 있는 것도 지질학의 지층과 단층을 형상화하는가 하여 다양한 정규직, 비정규직, 특고, 플랫폼을 표현하고 단층과 같이 어떤 단절과 특이성을 상상하게 만들었다.

 



2) 오르는 수밖에 없었다

 

“없는 존재로 여겨졌기 때문에, 보이도록, 잘 보이도록 올라가는 방법뿐이었다”(장면6)

 

나레이션중 인상적인 것중 하나는 고공농성을 이야기하며 “노동자는 옥상에, 다리에, 굴뚝에, 망루에, 타워크레인에, 송전탑에, 오르는 수밖에 없었다”는 부분이다. 투명 계단을 타고 오르는 노동자, 투명하기에 잘 보이기 위해 계속 오르는 노동자들이 우리 현실에도 존재한다. 고용승계를 외치며 세계 최장 600일 고공농성을 한 박정혜 금속노조 한국옵티칼하이테크지회 수석부지회장는 땅으로 내려와 다음과 같이 말했다.

 

"600일이라는 시간도 저도 기억되고 싶지 않습니다. 그 시간을 채웠던 연대와 세상이 바뀌길 바라는 마음들이 기억되었으면 좋겠습니다”(영남일보, 2025년 10월 12일자)

 

그리고 아직도 고진수 관광레저산업노조 세종호텔지부장이 해고자 복직을 요구하며 10미터 높이 지하차도 안내 구조물에 올라 고공농성을 260일 넘게 지속하고 있다.

 

노동현장에는 일을 지속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다. 일을 하지 않는다면 먹고 살수 없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에 살기 때문이다. 투명계단을 통해 권은비작가는 자본주의의 모습을 보여주려고 한 것이 아닐까?

미술관을 빠져 나와서도 한동안 불편했다. ‘노동’을 주제로 한 영화는 종종 그런 마음이 들었지만 ‘미술작품’을 통해 그런 감정을 느낀 것은 아주 이례적인 일이었다.

일하지 않으면 돈을 벌 수 없는 노동자, 뜨거운 여름 내내 찾아다녔던 일하는 사람들.‘의존계약자’라는 생소한 이름의 그들과 조금이라도 나은 노동이 가능한 노동의 지형은 무엇인지 생각해 본다.

당신의 이름은? -의존계약자, 플랫폼노동자, 특수형태근로자

 

우리가 주위에서 많이 만나는 플랫폼 라이더, 택배, 보험설계사, 학습지교사, 캐디, 방문설치기사, 해설사들은 통계상, 근로기준법상 노동자가 아니다. 통계적으로는 임금근로자와 자영업자로 크게 분류하는데 이들은 이 분류 사이에 있는 사람들이다. (<그림2>참고) 그리고 근로기준법상으로 노동자가 아니기 때문에 4대보험의 혜택을 모두 받지는 못한다. 정부 노동통계상으로 명확한 분류가 없어 구분이 어려워 그 규모를 제대로 파악하지도 못하고 그 사이 의존계약자는 점점 늘어나고 있다.


※ 출처 : 인구절벽에 따른 고용충격 대응방안(중대본 회의, ‘21.9.30.)

 

<그림2> 한국종사상지위 분류 변화


오늘날 다양한 국가 및 국제기구는 디지털 경제의 확산과 함께 등장한 새로운 노동 형태를 포착하기 위해 각기 다른 용어와 분류기준을 사용하고 있다. 2021년 개정한 한국종사상지위 분류에 따르면 임금근로자와 자영업자의 중간영역(grey zone)에 있는 취업자를 의존계약자(dependent contractors)로 정의한다. ‘의존계약자’는‘이윤 목적으로 다른 경제 단위를 위해 또는 통해 재화나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한 사업적 특성의 계약(노동관계)를 체결하는 자로, 다른 경제단위의 고용원은 아니나 해당 경제단위에 의존하는 취업자’이다.(2021년 12월 28일 통계청 보도자료) 국제노동기구(ILO)는 2018년 종사상 지위 분류 기준(ICSE-18)을 개정하면서 ‘종속적 자영업자(economically dependent self-emloyed)’라는 범주를 새롭게 제시하였다. 이는 독립적 자영업자와 달리, 특정 고용주 또는 플랫폼에 경제적으로 의존하며 실질적 통제를 받는 노동자를 별도로 통계적으로 포착하고자 한 시도이다. (황선웅)


현재, ‘의존계약자’통계는 국민연금공단의 「국민노후보장패널조사」(2023)에서 확인된다. 국민노후보장패널조사는 고령화 등 급격히 변화하는 사회 환경 속에서 증가하고 있는 노후소득보장의 요구와 중요도를 파악하고, 이에 걸맞는 연금 및 고령화 정책을 수립하기 위해 중요한 기초자료를 수집하고 있다. 전국 만 50세 이상 가구원이 있는 5,000여 가구가 대상이다. 이 조사에서 종사상 지위는 크게 ‘임금근로자’와 ‘비임금근로자’로 나뉜다. ‘임금근로자’는 기간의 정함이 없는 근로자, 장기 고정기간 근로자(1년이상), 단기 고정기간 근로자(3개월~1년 미만), 단기․임시근로자(3개월 미만), 유급 견습, 훈련생 및 인턴으로 나눈다. ‘비임금근로자’는 고용주와 자영업자, 의존계약자, 무급가족종사자로 나눈다. 지침서(「국민노후보장패널 부가조사 지침서(안)」, 2024.5)에서 ‘의존 계약자’에 대해 아래와 같이 보수형태와 특성을 설명하고 있다.

 

- (보수형태) 일한 시간을 대가로 임금을 받지 않고 약정에 따라 일한 양의 대가 또는 서비스당 수수료를 받거나 고객에게서 봉사료만 받음

- 특성별로 ㉠자신의 노동을 타인(다른 경제단위)에게 제공하지만 상업적 계약 구조를 갖는 취업자와 ㉡자신의 기업에 상당한 자산을 투입해 왔으나 자신의 노동이나 기업활동에 대한 완전한 지휘권한․통제권을 갖지 못하는 취업자로 구분됨

- (제외) 일상적으로 고용원을 두거나 법인 기업을 소유·경영하는 경우


출처: 국민연금관리공단,「국민노후보장패널 부가조사 지침서(안)」, 2024.5

 

<그림3> 의존계약자 

정부 노동 통계에서 ‘취업자’는 근로기준법상으로 ‘근로자’가 아니다. 배달 라이더는 취업자이지만 자영업자도 아니고 근로자도 아니다. 이들은 통계상으로‘의.존.계.약.자’가 되는 것이다.

「국민노후보장패널조사」(2023) 결과에서 의존계약자는 1.7%로 나타났다. 매우 낮은 비율을 차지하지만 점점 늘어날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이후 추이를 지켜보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아직까지 이 결과는 ‘의존계약자’로 분류된 통계자료라는데 의의가 있다.

의존계약자의 노동의 지형학


‘의존계약자’들은 파편화된 노동을 하기에 그들의 목소리는 잘 모아지지 않아 이해대변도 어렵다. 특수고용형태근로자, 플랫폼노동자, 노무제공자, 프리랜서들은 흔히 4대보험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고 하고 취약노동자로 미조직노동자로 이야기한다. 의존계약자들은 일반적으로 사업장 단위의 노조조직이 상당히 어렵다.

의존계약자들의 취약성을 보완해가기 위해서는 제일 기본적으로 의존계약자 스스로의 노력이 필요하다. 여러 가지 방법중 미조직노동자의 이해대변 조직으로 ‘노동공제회’가 부상하고 있다. 현정부의 국정과제로 특고․ 플랫폼․프리랜서의 권익 향상과 함께 노무제공자의 지원조치 일환으로 ‘노동공제회’를 명시적으로 제시하였다.(이상호) 

국정과제 96 (통합과 성장의 혁신적 일자리정책) - 실천과제(든든하고 촘촘한 고용안전망)에 ‘노동공제회(특수고용·플랫폼·프리랜서 등) 지원을 위한 법적 근거 마련(26년 상반기)'

부산에는 대리운전 기사들이 스스로 조직한 ‘카부기’노동공제회가 있다. 공제회를 통해 소속감과 연대의식을 갖고 권익대변 기능을 강화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하지만 아직 실제 노동공제회 관련 법제도적 여건은 매우 미약하다. (이상호) 하지만, 여러 방도로 의존계약자들이 모이고 뜻을 이루어간다면 불안하고 어려운 지형을 바꿔 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마무리


노동의 투명 계단만을 탓할 순 없다. 보이지 않는다고 모이지 않을 순 없다. 근로기준법상의 ‘근로자’로 규정하기 힘든 ‘일하는 사람’들이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다. 이름도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고 요구하는 목소리도 하나로 모아지지 않는다면 단연히 노동조건은 점점 나빠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노동의 지형을 바꾸는 것은 권은비 작가가 말하는 다음과 같은 사람이 많아

진다면 더 나은 세상이 되지 않을까 한다.

   

당신은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려 하는 사람.

당신은 파편과 파편 사이의 틈새를 보는 사람.

당신은 당연한 것이 당연하지 않은 사람. (장면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