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서 잠시 언급한 것처럼 현재 나는 프리랜서 신분이다. 잡지사 에디터로 일을 할 때 진중하게 미래에 대해 고민하지 않은 업보(?)다. 실상 에디터들의 직업적 수명은 프로야구 선수만큼 짧다(프로야구 선수만큼 연봉을 받으면 좋으련만). 편집장 혹은 디렉터처럼 팀을 이끄는 위치에 올라가면 다소 수명이 연장될 수는 있겠다. 또 매체를 옮기는 경우라면 연봉이든, 직급이든 상승의 기회가 찾아오기 마련이다. 비록 내가 앞선 글에서 몇몇 불만을 토로하긴 했지만, 나는 여행 잡지 에디터의 직업적 속성이 꽤 마음에 들었고, 초기의 방황기를 거치고 나니 제법 적성에 맞는다는 생각도 들었다. 뻔하지 않은 여행지를 집요하게 들춰내는 『론리플래닛 매거진』이라는 매체에도 애정이 생겼기에 다른 매체로의 이직은 염두에 둔 적도 없다.
그렇다고 언제까지 한 잡지사에서 일평생 몸담을 수 없다는 건 예감하고 있었다. 대략 10년 정도 채우면 되지 않을까 라고 막연하게 생각했던 것 같다. 그렇게 흘러가는 대로 『론리플래닛 매거진』에서 일한 지 8년 차가 되었을 무렵, 뜻하지 않은 일이 연거푸 찾아왔다. 내가 입사한 이래 가장 든든한 버팀목이 되었던 편집장님의 퇴사가 시발점이었다. 창간호부터 거의 만 10년을 채운 그야말로 매체의 산증인이 자리를 떠난 일종의 사건과 같았다. 문제는 어쩌다 보니 편집부에서 가장 연차가 쌓여버린 내가 다음 편집장을 맡게 된 것이었다. 전혀 생각해 보지 않은 느닷없는 상황이었다. 뭔가 몸을 제대로 풀지 않고 마운드에 오른 패전 투수의 심정으로 엉겁결에 직을 이어받았다. 2020년 1월의 일이었다.
연도에서 짐작할 수 있듯, 그다음에 벌어지는 일들은 가히 블록버스터급이었다. 편집장이라는 어울리지 않는 직책을 맡자마자 전례 없는 코로나19로 인해 ‘팬데믹’이라는 단어가 연일 뉴스를 떠돌았다. 여행 업계의 사정은 그야말로 속절없는 패닉에 가까웠다. 국경은 폐쇄됐고, 여행은커녕 평범한 외출 자체를 불안하게 여겨야 하는 시대를 맞이해야 했다. 잡지 지면은 번역 기사나 ‘집콕 챌린지’ 같은 쥐어짜 낸 기획으로 채워야 했다. 그렇게 당황스럽고 불안한 시기를 통과하던 중, 론리플래닛 본사가 매거진 발행을 중단한다는 소식을 알려왔다. 라이선스 계약 기간 동안 잡지를 발행할 수 있다는 단서를 달았지만, 유의미한 일로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회사는 사무실을 옮기고 조직을 개편하는 어수선한 상황이기도 했다. 그렇게 2020년 5월 31일, 『론리플래닛 매거진』 편집부의 해체와 함께 퇴사를 하게 됐다.
언젠가 이런 순간과 마주칠 거라 예감은 했지만, 전혀 생각해 보지 않은 방식이었다. 한편으로는 잠시 쉬어가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일단 퇴사를 하고 나니 마감의 편두통에서 완전히 해방됐다. 그간 미뤄둔 일을 하거나 사람들과의 만남을 갖는 등 제법 분주하게 시간을 보냈다. 캠핑 위스키의 진가를 알게 된 것도 바로 그때였다.
마침 아내도 이런저런 사정으로 재택근무를 하는 중이었다. 집에서 단둘이 보내는 시간이 생경하게 다가왔다. 그동안 출장이며 마감이며 한 달에 같이 저녁을 먹는 날이 다섯 번이나 되었을까. 심지어 아내와 내 생일 모두 불행히도 마감 기간과 겹친 탓에 느긋하게 시간을 보낸 기억조차 없다. 어쩌면 상대적으로 우리 부부가 원만했던 이유도 주기적인 마감과 출장으로 인해 떨어진 시간이 길었기 때문이란 생각도 들었다. 마치 채무상환을 받는 것처럼 보상으로 주어진 아내와의 시간이 제법 좋았다. 요리도 해 먹고, 저녁이면 산책도 다니고, 뭔가 여유를 누릴 줄 아는 선진국의 부부가 된 기분이었다.
그러기도 잠시. 어느 순간 나의 하루는 덧없이 게으르게 흘러갔다. 아침에 일어나 커피를 내리고, 소파와 한 몸이 되어 핸드폰을 뒤적거리고, 잠시 노트북을 켰다가 느지막이 밥을 먹고, 다시 소파나 침대에서 뒹굴고, 술 약속이 있으면 나가고 집 앞에서 어슬렁거리며 산책을 하고. 마치 생산적인 일을 하면 벌이라도 받는 것처럼 누구보다 치열하게 무용한 시간을 보냈다.
더는 이렇게 지내면 곤란하다는 압박이 슬금슬금 찾아왔다. 여행 잡지 에디터로의 삶을 더는 지속할 수 없는 상황이고, 그렇다면 프리랜서로서 어떤 돌파구를 찾아야 했다. 그러고는 다소 무모하게 작업실을 하나 구하면 좀 더 체계적으로 프리랜서의 삶을 시작하게 되리라는 헛된 희망을 품기 시작했다. 일을 구하지 않고, 일하는 공간부터 구하겠다는 순서가 단단히 잘못된 판단이었다. 그 무모한 판단이 내 삶의 터닝 포인트가 된 건 분명하다. 더구나 출장 혹은 일상 중 취미로만 가벼이 즐기던 위스키와 좀 더 내밀한 관계를 맺게 된 것도 그 판단 미스로부터 시작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