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의 신학자
#80 철학자에 관하여
#81 로완 윌리엄스의 글쓰기, 인용하기(1)
#82 아브라함의 시험과 신앙의 기억들
#83 장 칼뱅의 편지
안녕하세요, 독자님.

복 있는 사람 편집자 B입니다.

 

꽃이 흔들릴 때마다 향기를 내듯, 그리스도인은 시험을 당할 때마다 그리스도의 향기를 내는 듯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진가는 평소 모습에서도 발견할 수 있겠지만, 시험을 당할 때 그 진면목을 드러냅니다.

 

우리 삶 가운데에는 항상 난처한 일들이 많고, 어느 날은 그 갈등을 풀지 못한 채 잠에 들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갈등이 난무한 드라마를 재미있게 보는지도 모릅니다. 주인공이 갈등을 헤쳐 나가는 모습을 보며, 한편으로 우리도 갈등을 어떻게 풀어야 할지를 배웁니다.

 

오늘 우리가 다룰 아브라함 이야기에서, 아브라함은 신앙의 갈등을 겪습니다. 하지만 독자의 시선에서 그는 신앙의 갈등을 겪을수록 그 믿음이 더욱 견고해지는 것처럼 보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과의 갈등을 어떻게 풀어 나갔을까요. 그 모습을 통해 우리 신앙의 모습을 되돌아보며, 어제보다 더 멋지게 오늘 하루를 살아가길 소망해 봅니다.

#82 아브라함의 시험과 신앙의 기억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육체적인 애정보다 더 강하다는 것을 보여주십시오.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을 사랑하였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 사랑을 육체의 사랑보다 앞에 두었습니다.

_오리게네스

신앙과 믿음에 관해 이야기할 때면 복잡한 마음이 들 때가 많습니다. 은혜를 받는 순간을 경험할 때면 믿음이 굉장히 좋은 것 같다가도, 얼마 지나지 않아서 믿음이 흔들리는 경험이 많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런 상황들이 반복되는 내 자신을 보면 답답하고, 아예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포기할 때도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인간이라는 존재가 가진 한계 때문에 믿음이 자주 흔들릴 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믿음의 사람’이라고 알려져 있었던 아브라함도 그랬으니까요.


하나님에 대해 너무 좋은 믿음을 가지고 있었던 아브라함인데, 그도 역시 사람이었나 봅니다. 믿음이 흔들리는 일을 겪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강력하고 반복된 약속이었던 ‘아들’이 시간이 지나도 자신에게 오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반복해서 약속해 주시지만 아브라함은 반복해서 믿음이 흔들렸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정하신 때에 아들 이삭은 아브라함에게 왔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시험을 받습니다. 왜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시험하신 걸까요? 성경에는 그 이유를 밝히고 있지 않기 때문에 알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의 시험을 다루는 본문이 의도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우선, 성경의 저자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이 정확하게 알고 있는 그 하나님임을 표현하기 위해 관사를 사용합니다.

그 일 후에 하나님ha’elohim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창 22:1)

‘하나님’은 히브리어로 ‘엘로힘’elohim’입니다. 하지만 본문에서는 하나의 단어가 더 붙어서 ‘하엘로힘ha’elohim’이라는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하ha’는 관사입니다. 그래서 있는 그대로 직역하면 ‘그 하나님’입니다. 그리고 히브리어 본문에서는 ‘하나님’이라는 주어가 가장 먼저 등장함으로서 이 시험을 행하시는 하나님을 주목하게 합니다. 본문은 관사 사용과 어순을 통해 이 시험이 우리가 그리고 아브라함이 알고 있는 바로 그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것임을 명확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시험의 강도가 너무 강해서 웬만해선 통과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오랫동안 기다려 얻은 아들을 번제물로 드리는 것이 시험이었기 때문입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qah-na’ 모리아 땅으로 가서lek-leka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창 22:2)

아브라함은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야했습니다. ‘데리고’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라카흐kaqah’이며, 본문에서는 명령형 형태인 ‘카흐qah’가 사용되었습니다. 일반적 의미는 ‘취하다’입니다. 그리고 간청의 불변사 ‘나na’’가 함께 사용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어떤 명령을 하실 때, 이 단어는 약 5회 정도 등장했습니다. 이 단어의 의미는 ‘제발’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간청하셨다’는 의미로 봐야 할까요? 이에 관해선 몇 가지 의견이 있습니다.

 

첫째, 사르나(Nahum M. Sarna)는 명령형에 ‘나na’’가 붙으면 명령을 부드럽게 바꾸어주며, 선택권을 줄 수 있는 형태라고 설명합니다. 명령을 거절한다고 해도 죄책감을 가지지 않을 수 있는 정도라고 해석합니다(미쉬나 89b, 창세기 랍바 55:7)

 

둘째, 램딘(Thomas O. Lambdin)은 이 불변화사의 사용은 앞선 명령이나 맥락에 따른 논리적 결과일 수 있다고 봅니다. 그렇게 본다면 앞서 “내가 여기에 있나이다”와 연결되어, 취할 수 있는 결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월키(Bruce K. Waltke)는 이 의미를 따라서 “너는 내게 복종할 준비가 되어 있으니 네 아들을 취하라”라고 번역합니다.

 

셋째, 인간이 망설일 수밖에 없는 수준의 시험임을 하나님이 알고 계시다는 것을 표현하는 단어일 수 있습니다. 그 명령은 인간의 이해 수준을 넘어섭니다.

 

첫 번째 해석을 따르자면 아브라함이 큰 고민을 하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 명령을 거부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더욱 큰 고민을 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또 다른 명령형인 “가라!”의 히브리어는 ‘레크lek’인데, ‘할라크halak’의 명령형입니다. 그리고 단어 하나가 더 있는데 한글 성경뿐만 아니라 다른 언어의 성경에도 이 단어의 해석은 없습니다. 그 단어는 ‘레카leka’입니다. 이 단어는 전치사 ‘레le’에 2인칭 남성 단수인 대명사 접미사 ‘카ka’가 붙은 형태입니다. 그래서 ‘가라’는 명령은 두 개의 단어 ‘레크-레카lek-leka’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전치사 ‘레’의 역할은 전치사와 연결된 주체를 위해서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가라’고 명령하신 이유는 그것이 아브라함에게 중요한 일이기 때문이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시험이 진행될 곳은 모리아 땅에 있는 ‘한 산’ 입니다. 모리아가 어디인지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지만, 브엘세바에서 약 80Km 떨어져 있는 예루살렘으로 보는 의견이 많습니다(요세푸스, 탈굼, 바빌론 탈무드 Ta’an 16a의 지지를 받는 대하 3:1). 그런데 그 산이 정확히 어딘지 눈 씻고 찾아봐도 알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전에 알려주신 적도 없고, 이 명령 이후에도 알려주신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이 명령을 들었을 때, 머릿속에 스쳐지나가는 사건이 있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비슷한 명령을 들었던 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자신이 맨 처음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입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lek-leka (창 12:1)

이 명령에서도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어디로 가야할지 보여주신 땅이 없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여기에 ‘가라’는 명령도 ‘레크-레카lek-leka’입니다. 특별하게도 이 단어는 구약 성경 전체에서 아브라함에게만 나타납니다. 그래서 이 두 구절을 서로 연결하는 역할을 합니다. 이것이 왜 중요할까요? 아브라함이 순종할 수 있는 연결점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시험을 받은 이 순간에 아브라함은 첫 소명을 받은 후, 이삭을 얻기까지 경험했던 하나님의 역사를 떠올렸을 것입니다. 그 안에는 자신의 수많은 흔들림이 있었고, 하나님의 반복된 약속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결국 하나님의 정확한 때에 이삭을 얻었습니다. 그 일련의 과정을 되새기며 지금 다시 한 번 명령을 받은 자리에 아브라함은 서 있습니다. 잠시 회상이 끝나고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을 것이고, 결국 모리아를 향해 떠났습니다. 그리고 그는 시험을 통과했습니다.


시험을 통과한 후, 하나님이 준비하신 제물을 경험한 아브라함은 그 땅에 이름을 붙입니다.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 이레YHWH yir’eh라 하였으므로 오늘날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yera’eh 하더라(창 22:14)

특별하게도 ‘이레’, ‘준비되리라’, ‘모리아’는 모두 어근이 같은 단어입니다. 그 어근은 ‘라아ra’ah’이고 의미는 ‘보다’입니다. ‘이레yir’eh’는 현재와 미완료로 번역 가능한 시제이며, 동사의 기본형인 칼(Qal)형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 이레YHWH yir’eh’라는 단어는 ‘여호와께서 보고 계신다/보실 것이다’라는 번역이 가능합니다. ‘준비되리라yera’eh’는 단어는 니팔(Niphal)형인데, 수동태 또는 강조형의 의미로 사용 가능합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에게는 이 단어로 인해 하나님의 ‘보이심’, ‘나타나심’이라는 전승이 생겨났습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이 본문을 통해 하나님의 보심이, 곧 하나님의 준비하심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보고 계시기 때문에 준비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아브라함의 시험은 분명히 쉽지 않았습니다. 우리에게 똑같이 주어진다면 통과할 수 있다고 누구도 자신할 수 없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이 시험을 통과할 수 있었던 것은 결국 하나님께서 자신의 삶에 역사하셨던 순간의 기억들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을 하나님께서 보고 계시기에 가장 최선의 것을 준비하실 수 있다는 또 하나의 믿음이 그에게 생겨날 수 있었습니다. 우리에게도 이와 같은 신앙의 경험과 기억이 쌓여가야 합니다.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그리고 그 순간에만 도움이 되는 것 같지만 우리에게 어려움이 닥칠 때 이겨낼 수 있는 힘의 근원이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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