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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다 안녕
어제의 너는 바람을 타고 멀리
후회도 없이 미련 없이 날아가
- 조이, 안녕 (원곡 박혜경)

조이가 리메이크한 '안녕'을 들으며 새벽에 쓰고 있다. 이번 메일이 발송되고 나면 한결 기분 좋게 곧 있을 시험을 마주할 수 있을 것 같다. 다음 메일링은 다다음주에 발송될텐데 그 땐 이미 시험 후일 거다.
나는 오는 8월 11일에 검정고시를 보게 된다. 유학은 뚜렷한 목표를 가져야 한다고, 도피 유학은 망하는 사례가 꽤 된다더니 중 3의 나는 그게 내가 될 줄은 정말이지 모르고 있었다. 우울했던 중학교 3학년, 무작정 부모님의 유학 제안을 수락하고 훌쩍 떠났던 어린 나는 성공적으로 유학을 마치지 못하고 돌아와 이렇게 수능을 준비하는 동갑내기 친구들 사이에서 홀로 검정고시를 준비하고 있다.
시간이 1년만 더 있었음 얼마나 좋았을까 후회를 많이 했다. 검정고시가 끝나면 바로 미술 학원을 비롯해 여러 학원에 다니며 아주 바쁘고 빠듯하게 지낼 예정이다. 그렇다고 영어 능력자도 아니다. 아마 영어 학원도 다녀야 할 것 같다.
도망가듯 떠났던 유학은 어쩌다 보니 상처라고 부를 법한 기억으로 남았지만 어쨌든 유학이 슬펐더라도 3년 내내 슬픈 일만 있었던 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 살아있는 추억들이 있다. 비슷한 처지의 한국인이 유치원생부터 고등학생까지 모여 살던 그 기숙사에서 나는 종종 바뀌는 룸메이트들 및 다른 기숙사 사람들에게 내 온갖 치부를 들키고 흑역사를 만들어 가면서도 그렇기에 더 가-족같이 지냈다. 우리는 소등 시간 전에 몰래 보온병에 뜨거운 물을 담아 소등 후 어두운 방에서 함께 라면을 끓여 먹었다. 대청소 시간엔 그 나라에서 산 값싼 스피커에 노래를 담은 SD카드를 꽂고 한국 노래를 들으며 주구장창 한국을 그리워 했다. 조국 떠나면 다 애국자라더니 그 말 틀린 게 하나도 없었다.
우린 다 비슷한 상황에 놓여있는 애들이라 서로를 잘 알았다. 기숙사가 그다지 좋은 곳은 아니었다. 다들 각자의 과거가 있었고 그 때문에 기숙사에서 부당한 일이 있어도 우릴 믿어주지 않는 한국의 어른들에게 끊임없이 호소하는 대신 우리끼리 의지하고 털어놓고 싸웠다. 다들 개성이 강해서 애들끼리 싸우는 일도 잦았다. 헛웃음을 짓는 날들이 많았다.
거기 있으면 그토록 싫어했던 과거에 갇혀있는 것 같았고 그래서 돌아오고 싶었다. 돌아와 보니 알겠다. 인정하긴 싫지만 그 시간은 내게 필요한 것이었다. 그 시간이 없었으면 검정고시가 끝나고 있을, 처음으로 온전히 내가 내 선택을 할 그 시간이 벌써부터 기대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우울했던 중 3은 체념한 고 1이 되었고, 다시 우울한 고 2가 되었다가 다시는 우울하고 싶지 않은 고 3이 되었다. 더는 내게 남아있지 않고 그 나라에 묻어두고 온 어두운 부분들이 있다. 나는 앞으로도 천천히 그 부분들을 잊어갈 거고 다시는 그 나라에 가지 않을 거다.
하지만, 가끔 추억하는 정도는 괜찮을 것 같다. 부모님을 졸라 보내달라고 했던 작은 저가형 디카에 담긴 그 때 우리의 사진들, 그리고 당시의 우릴 남기고자 내가 직접 기숙사 사람들을 인터뷰하고 발품 팔아 만든 세상에 약 열 권뿐인 책까지. 절대 추억할 일 없을 거라 생각하고 있었는데 생각해 보면 이게 추억이 아니면 뭐야. 나쁜 일들은 다 잊자. 트라우마를 극복하자. 그리고 추억할 건 추억하자. 애들은 참 좋은 애들이었으니까.
...사실 오늘 내가 쓰려던 글도 이게 아니었다. 검정고시 얘기를 하다가 후루루 말해버렸다. 원래 하려던 말은 2주 내내 에세이를 꽤 많이 읽었다는 거였다. 인상 깊게 읽은 에세이는... 아래에서 소개하겠다.
오늘도 별 내용은 없었다. 2주 후 시험이 끝나고 집에 돌아가면 (현재 한국 어느 시골의 기숙사에 살고 있다. 집에서 무려 다섯 시간 거리다!) 더 쓸 내용이 많아지겠지? 파도의 시선은 올해 말 시즌 1이 끝날 예정이다. (라고 멋대로 정했다.) 그 때까지 여러 가지 별 볼 일 없는 얘기들을 나름대로 열심히 생각해 2주에 한 번씩 변함없이 돌아오겠다. 벌써부터 스무 살, 그리고 시즌 2에 대한 생각을 하니 두근두근하는 것 같기도 하다. 그 때가 왔을 때 어떤 말을 하고 어떤 글을 쓰고 무얼 듣고 무얼 보아야 더 나다울 수 있을까. 아직 나다운 것을 잘 모르지만 더 노력해 봐야지. 내가 '안녕'처럼 훌훌 날리고 더 나은 하루를 살아내길 기대한다.
이 글을 읽은 모두가 한없이 행복해졌으면 좋겠다. 다들 날 한 겹 덜 외롭게 해준 고마운 분들이니까.

그나저나 조이 님 목소리 너어어무 좋다. 내가 다 밝아진다.
모두 다 안녕~
유학 시절 위로가 필요할 때 들었던 노래
청하 - X (걸어온 길에 꽃밭따윈 없었죠)

"그대가 놓아 버린 내 손은
'이제는 안녕' 인사가 되어
흔들리며 사라져 가요
닿을 수 없는 곳으로
(...)
온 세상이 날 버리고 떠나갈 때
그대는 선명하고 가깝게 있어줘요"

룸메이트 역시 이 노래에 빠져 있었다. 가끔 멍하니 이 노래를 들으면 기분이 묘해지고 눈물이 나곤 했다. 스포티파이를 돌아다니다 우연히 들었는데 처음 듣자마자 몇 번 더 들었다. 한 노래를 여러 번 연속으로 잘 못 듣는데 이 노래를 여러 번 들으면서 속으로 곱씹었다. 가사도 참 좋다. 잘 들어보면 백그라운드에 검정치마 목소리가 들린다. 검정치마의 보컬 조휴일 님이 만든 곡이라고 들었다.
알레프 (ALEPH) - No one told me why

"왠지 이대로 사라져도
넌 모를 것만 같아

Tell me why 난 항상 무너질 것들과
이미 지나가 버린 날들을 붙잡는 건지
나를 사랑한다면 이젠 알려줘
너무 늦지 않게 나를 사랑해줘"

이 노래를 듣고 좋기도 하고 룸메이트 취향일 것 같아서 다운 받아 스피커로 틀었더니 룸메이트가 자기가 좋아하는 노래라고 했던 기억이 난다. 너무 슬픈 노래였다. 하지만 듣고 나면 혼자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있지 - Don't Give A What

"대체 뭐가 그리 복잡해 머리 아파
이리 태어난 걸 어떡해
색안경 속에 널 가두려 하지 마
더 이상 숨지 마 너는 너야
상관없어 모두가 틀렸다 말해도
우리 모두 정답이야
너만의 방식부터 너만의 색깔까지
다 보여줘 다르건 말건
You know that I don't give a 
What
당당히 보여줄 거야 난"

개인적으로 워너비와 낫 샤이 앨범 곡들을 전부 다 좋아한다. 노래도 좋지만 가사가 다들 너무 좋았다. 나 자신에 대한 이야기가 많아서 좋았고 들을 때마다 나에게 용기를 줬다. 아직도 용기를 얻고 싶으면 이 노랠 듣는다.
지각하거나 온라인 수업 중 딴짓을 하면 성경 깜지를 엄청나게 많이 쓰는 벌이 있었다. 손이 까지고 부르터서 울고 싶던, 성경 깜지를 쓰던 어느 새벽에 이 노래를 끊임없이 재생하며 잠을 깼다. 정신력으로 성경 20장을 쓰고 잤던 기억이 난다. 그 때문에 아직도 그 생각을 하면 손이 쓰라리다.
많은 노래 중에 가장 고마운 건 단연 나 자신에 대한 용기를 주는 노래가 아닐까 싶다. 내가 틀리지 않았다는 확신을 갖지 않으면 너무 힘들었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이들의 세상이 갑자기 무너지지 않기를, 어디선가 다정한 대화들이 계속되기를.
정세랑, 『지구인만큼 지구를 사랑할 순 없어』, 위즈덤하우스 (2021)

"경이를 경이로 인식할 수만 있어도 아무렇지 않은 것들이 특별해질 것이다. 덧없이 사라진다 해도 완벽하게 근사한 순간들은 분명히 있다."

『보건교사 안은영』을 비롯해  『지구에서 한아뿐』, 『시선으로부터,』를 읽고 팬이 된 작가님의 에세이라니, 고민없이 골라 읽었다. 역시 좋았다. 9년간 세계의 다섯 도시를 종종 여행했던 기록을 담은 책인데, 술술 잘 읽혔고 재미있었으며 무엇보다 너무 여행하고 싶어졌다. 덕분에 부모님 없이 혼자 혹은 친구들 몇 명과 여행을 해보고 싶어져서 혼자 이것저것 생각해 보는 중이다.
이 책에서는 여행의 좋은 점만을 담고 있지는 않다. 여행지에서 흔히 겪을 법한 당황스러운 상황들도 분명히 담고 있다. 우리 모두 여행이 마냥 낭만적인 것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다. 그럼에도 항상 떠나고 싶어하는 이유가 뭘까. 우릴 아는 시선들에서 벗어나 모르는 사람들이 가득한 곳에서 온전한 나로 존재하고 싶어서도 있겠지만, 결국 지구를 너무 사랑해서가 아닐까. 나도 정세랑 작가님처럼 종종 지구를 산책하는 어른이 되고 싶다.
유학 시절 가장 기억에 남는 영화 두 편
<어스 (Us)> (2019)

"우리도 똑같은 사람이야. 눈, 이빨, 손이 있고 피가 흐르는... 너희랑 똑같다고."

이왕 유학 이야기가 나온 거 유학 시절 봤던 영화 중 가장 인상 깊었던 영화를 소개해야지 싶었다. 근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 영화 + 두번째로 소개할 영화가 제일 인상깊었다. 하나는 무서워서, 하나는 너무 웃겨서 인상 깊었다.
먼저 <어스>는 겟 아웃을 연출한 조던 필 감독의 영화이다. 귀신이 나오지 않는 공포 영화를 좋아하는 편인데 역대 본 공포 영화 중 제일 무서웠던 것 같다. (본 공포 영화가 몇 안 된다는 건 참고로 알아두세요) 무서운 소리도 적절한 타이밍에 나왔고 왠지 얼마든지 일어날 법 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더 무서웠던 것 같다. 무섭긴 무서운데 보고 나서 인류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게 됐고 개인적으로 겟 아웃보다 더 공포스럽고 재미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조던 필 감독님... 진짜 좋아하는데... 그 이유가 공포 영화계의 웨스 앤더슨 님 같기 때문이다. 이 영화 하면 무서운 것도 떠오르는데 색감이 예쁘고 화면도 예쁘고 했던 것도 떠오른다. 그리고 공포를 너무나도 세련되게 잘 표현한 것 같다. 무섭긴 한데... 영화가 되게 세련됐다. 그리고 뮤직 비디오처럼 무심코 지나갈 만한 부분에 의미를 둔 것이 많아 그런 이스터 에그를 찾는 것이 즐거웠다. 예레미야 11:11 팻말이라던가 '어스라는 제목이 우리들을 뜻함과 동시에 US, 즉 미국을 뜻하기도 한다' 같은 것 말이다. 섬뜩한 느낌을 주는 영환데 또 트라우마에 걸릴 정도는 아니고 삐에로 같이 공포증을 유발하는 것도 나오지 않았다. 그냥 보는 동안, 그리고 그 날 밤 정도만 무섭다. 그래서 입문용 공포 영화로 추천한다. 참고로 마지막에 반전이 있다. 그 반전이 소름끼친다.

*개인적으로 포스터가 섬뜩해서 포스터 대신 어스 한국 공식 티저 영상에 나온 사진으로 대체합니다.
<나를 차버린 스파이> (2018)

"너 졸라 멋지다고. 제발 인정해."

역대껏 본 영화 중에 제일 골때리는 영화였다. 물론 좋은 의미로. 멋있는 액션도 액션인데 주인공들 (특히 주인공 친구) 말하는 게 너무 웃겨서 보면서 제일 많이 웃었던 영화이다. 내가 좋아하는 배우가 나오는 것도 아니고, 좋아하는 감독님 영화도 아니고, 분위기도 평소에 내가 좋아하는 분위기의 영화가 아닌데... 진짜 너무 재밌게 봤다. 기숙사에서 애들이랑 다같이 봤는데 다들 대굴대굴 웃었음. (?)
주인공이 자기 남자친구가 스파이라는 걸 알게 되고 영화가 시작하는데 영화 후반부 즈음엔 주인공이 더 훌륭한 스파이가 되어있다. (??)
미국식 밈들이 많이 나와서 재미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SNL 출연자였던 배우가 나온다) 지금도 이 글을 편집하면서 다시 보고있는데... 역시 웃기다. 액션 코미디 좋아하시면 꼭 보세요.


피드백 혹은 하고 싶은 말은 boyifall@naver.com으로 보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 맞춤법 지적이나 이렇게 하는 게 좋겠다 싶은 인생 조언 등 다 받습니다 모르는 게 많기 때문...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