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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를 맞으며] 당신은 어떤 대한민국에 살고 있습니까?

📍 생존을 넘어 원칙의 나라를 다시 상상하며

📍 인고의 역사 이후, 우리가 감당해야 할 새로운 국가의 과제

당신은 어떤 대한민국에 살고 있습니까.


그리고 어떤 대한민국에서 살아가기를 원합니까.


이 질문은 개인의 취향이나 정치적 성향을 묻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발 딛고 있는 이 공동체가 어떤 원칙 위에 서 있는지, 그리고 앞으로도 그 원칙을 지켜낼 의지가 있는지를 묻는 질문입니다.


새해를 맞아 다소 도발적인 질문을 꺼내는 이유는, 우리가 그 답을 너무 오래 유예해왔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가 이제는 정리하고 넘어가야 할 시기에 와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 인고의 세월 위에 세워진 ‘반쪽의 나라’


우리는 긴 인고의 세월을 거쳐 이 자리에 섰습니다. 이 나라는 처음부터 단단한 설계 위에 세워진 국가가 아니었습니다. 무너진 자리에서 임시로 덧댄 기둥 위에 다시 기둥을 올리고, 그 위에 또 하루를 버티는 방식으로 이어져 왔습니다. 그래서 대한민국의 역사는 늘 위대한 결단의 역사라기보다, 무너지지 않기 위해 선택을 미뤄온 사람들의 시간에 가깝습니다.


구한말 격동의 시대상을 소재로 한 드라마 <미스터 선샤인>이 구현한 영상미, 서사미가 그토록 아름다울 수 있었던 건, 역설적으로 참혹했던 그 시대가 실제 우리가 겪어낸 현실이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 드라마의 진짜 중심에는 이름 없는 사람들의 선택 불가능한 삶이 있습니다. 나라가 사라지는 과정에서 그들은 싸울 수도, 떠날 수도 없었습니다. 선택지가 없는 상황에서 남겨진 이들은 하루하루를 견디며 살아남는 것 자체가 저항이었습니다. 총을 들지 않은 이들도, 역사의 전면에 서지 못한 이들도 모두 같은 질문 앞에 놓여 있었습니다.


“이 상황에서 나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대부분의 대답은 초라했습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내는 것. 그 체념과 인내가 쌓여 한 시대를 떠받쳤습니다.


<빠친코>의 선자는 그 인고를 더 긴 시간의 서사로 확장합니다. 그는 영웅이 아닙니다. 투쟁의 상징도 아닙니다. 단지 살아야 했고, 아이를 지켜야 했고, 다음 날을 맞아야 했을 뿐입니다. 차별과 가난, 국적 없는 존재로서의 불안 속에서 선자가 선택한 것은 언제나 ‘덜 나쁜 선택’이었습니다. 떠나지 않으면 짓밟히고, 떠나면 뿌리를 잃는 상황에서 그는 살아남는 쪽을 택합니다. 빠친코가 반복해서 보여주는 것은 바로 그 지점입니다. 이 나라는 선택의 자유 속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선택의 부재 속에서 형성되었다는 사실 말입니다.


이 두 서사가 공통으로 말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대한민국은 처음부터 시민의 존엄을 충분히 보장하는 국가로 출발하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대신 우리는 “지금은 어쩔 수 없다”는 말로 시간을 벌었고, 그 시간 위에 국가를 얹었습니다. 침묵은 미덕이 되었고, 유예는 전략이 되었으며, 견딤은 국민의 자질처럼 요구되었습니다.


우리는 잘 살기 위해 힘을 합쳤습니다. 폐허 위에서 다시는 굶지 않겠다는 집단적 결의는 압도적인 설득력을 가졌고, 그 목표 앞에서 많은 질문은 사치로 취급되었습니다. 효율은 정의보다 앞섰고, 속도는 절차를 밀어냈습니다. “먼저 먹고 살아야 한다”는 명제는 국가와 시민 모두에게 작동하는 면죄부였습니다. 그 결과, 노동의 권리는 성장의 뒷면으로 밀려났고, 불평등은 ‘감수해야 할 비용’이 되었으며, 권력의 일탈은 ‘과도기적 현상’으로 처리되었습니다.


이후 우리는 다시 반세기에 걸쳐 싸웠습니다. 거리에서, 법정에서, 투표소에서 시민들은 권리를 요구했고, 마침내 민주주의라는 형식을 쟁취했습니다. 그러나 냉정하게 말하면, 그것은 새로운 나라의 탄생이라기보다, 최악의 상태를 멈춰 세운 결과에 가까웠습니다. 군홧발은 사라졌지만, 국가가 시민을 대하는 태도는 크게 바뀌지 않았습니다. 위기 때마다 시민에게 먼저 희생을 요구하고, 책임은 위로 올라가지 않는 구조는 그대로 남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이렇게 말해왔습니다.


“지금은 생존이 먼저다.”


외환위기 때도, 안보 위기 때도, 경제 침체 앞에서도 이 말은 반복되었습니다. 원칙은 늘 다음으로 미뤄졌고, 정의는 ‘여유가 생기면 논의할 문제’가 되었습니다. 문제는 그 미룸이 너무 길어졌다는 점입니다. 원칙은 회복되지 않았고, 대신 원칙을 유예하는 방식 자체가 국가 운영의 기본값이 되었습니다.


이제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언제까지 ‘견뎌온 나라’에 머물 것인가.


언제쯤 ‘견디지 않아도 되는 나라’를 상상할 것인가.


이 질문 앞에서, 미스터 션샤인과 빠친코의 서사는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라 현재의 거울이 됩니다. 그들이 버텨야 했던 이유가 여전히 유효하다면, 우리는 아직도 완성된 나라에 도달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새해의 질문은 다시 시작됩니다.

☛ [사진 설명] 챗GPT가 형상화한 구한말과 일제강점기를 살아낸 선조들


🔹 우리는 언제부터 등대를 잃었는가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방향을 잃었습니다. 이념의 갈등은 격화되었고, 공화의 중심은 흔들리고 있습니다. 서로를 설득하기보다 규정하고, 이해하기보다 배제하는 언어가 일상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냉정하게 말하면, 지금의 혼란은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위기가 아닙니다. 무너진 것이 있다면, 그것은 애초에 단단히 세워지지 못했던 방향 감각, 다시 말해 공화국의 ‘등대’였을지도 모릅니다.


대한민국은 출발부터 온전한 국가의 조건을 갖추지 못했습니다. 헌법이 규정한 반쪽짜리 영토, 분단을 전제로 한 국가 운영, 그리고 언제나 ‘임시 상태’로 관리되어 온 평화는 이 나라의 구조적 불안정을 상시화해 왔습니다. 국가는 늘 위기 속에 있었고, 그 위기는 시민에게 설명되기보다 관리의 명분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안보와 성장, 안정이라는 이름 아래 질문은 유예되었고, 합의는 생략되었습니다. 그렇게 국가는 빠르게 움직였지만, 어디로 가는지에 대한 공유된 방향은 끝내 충분히 세워지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국가의 ‘형식’을 먼저 만들었습니다. 헌법과 제도, 선거와 권력 교체의 틀은 비교적 빠르게 갖추어졌습니다. 그러나 그 형식을 떠받칠 공화의 정신과 시민적 합의는 충분히 축적되지 못했습니다. 시민은 권리의 주체라기보다 동원의 대상이었고, 국가는 봉사자라기보다 통제자로 기능해왔습니다. 그 결과 위기의 순간마다 국가는 쉽게 흔들렸고, 시민은 반복해서 실망했습니다. 실망은 분노로, 분노는 냉소로 바뀌었고, 그 냉소는 다시 공론장의 붕괴로 이어졌습니다.


이 균열은 추상적인 이념의 문제가 아니라, 일상의 제도와 경험 속에서 체감되는 문제입니다. 판사 출신 작가 문유석이 각본을 쓴 드라마 <프로보노> 5–6화는 바로 그 지점을 정확히 겨냥합니다. 이 에피소드의 중심에는 외국인 노동자로 한국에 체류했던 ‘카야’의 성폭력 피해가 놓여 있습니다. 그러나 이 드라마가 묻는 것은 범죄의 잔혹함 그 자체가 아니라, 그 피해가 이후 어떻게 제도 속에서 ‘사라지는가’입니다.


카야의 서사는 하나의 역설로 수렴됩니다.


피해는 분명히 존재하지만, 그 피해가 말해질 수 없는 상태로 봉인되는 사회.


체류 자격, 고용 관계, 언어의 장벽, 주변의 시선, “문제 만들지 말라”는 압박이 겹치면, 피해자는 신고하는 순간부터 삶 전체를 걸어야 합니다. 안전을 위해 침묵해야 하고, 살아남기 위해 입을 닫아야 하는 상황에서 침묵은 비겁함이 아니라 가장 합리적인 선택이 됩니다.


이 대목에서 드러나는 것은 개인의 불운이 아니라, 공화국의 작동 방식입니다. 폭력은 한 번의 사건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 다음에 기다리는 것은 증명 책임과 절차입니다. 피해는 ‘설명’될 수 있지만, 제도는 그것을 ‘증명’하라고 요구합니다. 그러나 체류와 생계가 걸린 사람에게는 시간을 감당할 여유가 없고, 조력자가 없는 사람에게는 언어가 없으며, 관계가 끊길까 두려운 사람에게는 증언할 자리가 없습니다. 법은 존재하지만, 그 법에 접근할 수 있는 시민과 접근조차 할 수 없는 시민이 갈라지는 지점이 여기에서 생겨납니다.


그래서 〈프로보노〉가 던지는 질문은 단순히 “가해자를 처벌해야 한다”가 아닙니다. 더 근본적인 질문입니다.


이 공화국은 실제로 누구를 위해 작동하는가.


그리고 어떤 사람들에게는 ‘정의’가 너무 비싼 선택—즉, 선택하는 순간 삶 자체를 잃을 수 있는 선택이 되어버린 사회를 우리는 과연 공화국이라 부를 수 있는가.


이 질문은 앞서 ‘미스터 션샤인’과 ‘빠친코’가 보여준 인고의 서사와 정확히 이어집니다. 그때의 인고가 “말할 수 없음”과 “선택할 수 없음”의 역사였다면, 지금도 어떤 사람들에게 대한민국은 여전히 말하기가 위험하고 선택이 불가능한 나라로 남아 있습니다. 우리가 공화국을 말할 때, 그 공화국은 가장 약한 자리의 시민에게도 동일하게 작동해야 합니다.


바다가 가장 어두워질 때 저 멀리서 구원의 빛으로 다가오는 등대. 우리의 국가는 과연 그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습니까?


🔹 ‘쿠팡’ 사태가 묻는 것: 이 나라의 주인은 누구인가


최근의 쿠팡 사태는 이 질문을 더욱 노골적으로 던집니다. ‘검은 머리 외국인’으로 불리는 김범석이 이끄는 기업이 보여준 대응 태도는 많은 이들에게 깊은 실망과 분노를 안겼습니다. 그러나 이 분노는 특정 인물이나 기업에 대한 감정적 반발에 그치지 않습니다. 만약 이것이 단지 한 기업의 일탈이었다면, 분노는 이토록 오래 남지 않았을 것입니다.


문제는 그 장면이 대한민국의 권력 구조를 한 컷으로 압축해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사고와 죽음, 책임과 해명, 그리고 제도적 대응이 이어지는 과정에서 시민들이 목격한 것은 명확했습니다. 자본은 국경을 넘나들며 최적의 법적 지위를 선택하고, 책임은 복잡한 구조 속으로 분산되며, 국가는 시민을 보호하는 주체라기보다 기업의 논리를 행정 언어로 번역하는 중개자처럼 보였습니다.


이때 드러난 것은 기업의 태도만이 아니라, 국가의 태도였습니다. 노동자의 안전과 생명보다 ‘투자 환경’과 ‘시장 안정’이 먼저 언급되고, 제도의 미비는 개선의 대상이 아니라 현실의 조건으로 정당화됩니다. 법은 존재하지만 집행은 느리고, 책임은 규정되어 있지만 실제로 묻기에는 항상 “현실적인 한계”가 등장합니다. 그 사이에서 시민의 분노는 공감받기보다 관리되고, 문제 제기는 과도한 요구로 취급됩니다.


그래서 쿠팡 사태는 묻습니다.


이 나라에서 결정의 기준은 무엇인가.


시민의 안전과 존엄인가, 아니면 자본의 효율과 성장 논리인가.


이 질문은 단순한 국적 논쟁으로 환원될 수 없습니다. ‘검은 머리 외국인’이라는 표현이 불편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문제의 핵심은 국적이 아니라, 자본이 국경을 넘어 이동할 수 있을 때 국가의 주권은 어디에 남는가라는 질문입니다. 글로벌 기업의 시대에 국가는 규제자이자 보호자가 되어야 하지만, 현실에서는 종종 투자 유치를 위해 스스로의 기준을 낮추는 쪽을 선택합니다. 그 결과 시민은 보호받는 주체가 아니라, 시장 질서를 감내해야 할 비용으로 밀려납니다.


이 지점에서 앞선 ‘프로보노’의 질문과 정확히 맞물립니다. 법은 존재하지만, 그것이 실제로 작동하는 범위는 모두에게 동일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에게 법은 보호막이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접근하기 어려운 장벽입니다. 쿠팡 사태는 그 장벽이 개인의 약함이 아니라 국가가 선택한 우선순위에서 만들어진 것임을 드러냅니다. 국가는 누구의 편에 서기로 결정했는가, 그리고 그 결정은 반복되고 있는가.


그래서 우리는 다시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누가 주도하는 나라가 대한민국입니까. 시민입니까, 아니면 자본입니까.


그리고 국가는 시민의 생명과 권리를 지키기 위해 존재하는가, 아니면 시장이 원활히 작동하도록 위험을 분산시키는 장치로 전락한 것은 아닙니까.


이제는 제대로 원칙을 세울 때가 되었습니다. 외부의 기준이나 강요된 현실에 끌려가는 나라가 아니라, 우리 스스로의 판단과 합의에 기반해 작동하는 국가를 다시 상상해야 할 때입니다. 성장이 필요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다만 성장의 조건과 비용을 누가, 어떻게, 어디까지 감당할 것인지에 대한 기준을 분명히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꿈꿔야 할 나라는, 가장 약한 시민의 안전을 기준으로 제도를 설계하는 나라입니다. 자본이 떠날 수 있어도 국가는 떠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리고 시민은 교체 가능한 비용이 아니라 주권의 주체라는 사실을 분명히 하는 나라입니다. 원칙은 선언이 아니라 작동 방식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원칙은 위기일수록, 가장 먼저 시험받아야 합니다.


쿠팡 사태가 남긴 질문은 불편합니다. 그러나 이 질문을 외면하지 않는 순간부터, 우리는 다시 등대를 세울 수 있습니다. 문제는 답이 아니라 누가 답할 자격을 갖는가입니다. 그 자격은 자본이 아니라 시민에게 있습니다. 이 나라의 주인은, 그래야만 합니다.


🔹 단절해야 할 것, 그리고 선택해야 할 미래


마지막으로 분명히 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시민성에 기반해 이 나라의 방향이 정해지는 새로운 정치의 방식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우리가 꿈꾸는 나라의 대척점에 있는 것들과는 단호히 선을 그어야 합니다. 윤석열 전 대통령을 위시한 내란 세력은 그 상징입니다.


이것은 특정 정권의 실패를 넘어선 문제입니다. 국가를 시민의 공동 자산이 아니라 권력을 행사하는 사유물로 인식하는 통치관, 시민을 권리의 주체가 아니라 동원과 통제의 대상으로 취급하는 정치 문화, 위기를 대화와 합의가 아니라 강경 대응과 배제의 논리로 관리하려는 국가 운영 방식—이 모두가 우리가 더 이상 되돌아가서는 안 될 구시대적 유산입니다.


계엄령 모의 사태와 대통령 탄핵, 법원과 제도 권위에 대한 물리적·상징적 위협은 우발적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정치가 사회 통합의 의무를 방기했을 때 어떤 파열음이 발생하는지를 보여준 경고였습니다. 진영의 적대가 제도와 상식을 압도하고, 헌정 질서마저 ‘편의적 해석’의 대상이 되는 순간, 국가는 더 이상 시민을 보호하는 공적 장치로 기능할 수 없습니다.


문제는 이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해법이, 지금의 정치 구조 안에서는 좀처럼 나오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양당제와 승자독식 구조, 적대적 동원에 의존하는 정치 방식은 갈등을 조정하기보다 끊임없이 재생산합니다. 정치가 사회를 통합하지 못하는 상태가 구조화된 지금, 해법은 정치의 바깥—그러나 정치를 포기하지 않는 자리에서 다시 모색되고 있습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생명중심 인간화 선언’의 의미가 분명해집니다. 지난해 12월 1일 서울 아카데미하우스에서 발표된 이 선언은, 1970년과 2010년에 이어 15년 만에 다시 꺼내든 세 번째 인간화 선언이었습니다. 이는 단순한 윤리 담론이 아니라, 한국 사회가 또 한 번 문명적 전환의 경계에 서 있음을 알리는 신호였습니다.


💊 [심화하여 읽기] ‘생명중심 인간화 선언’이 던진 질문 — 대결의 시대를 넘어, 다시 대화로 https://naver.me/IxKTQGq


강대인 이사장(배곳 바람과물 엔담)은 이 자리를 “지금은 빈들”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민주화와 인간화가 뒷걸음질할 때마다 대화를 준비해왔지만, 오늘 우리는 기후위기·양극화·기술 격차·정치 분열이라는 더 깊은 빈들에 서 있다는 인식입니다. 여기서 제안된 생명중심 인간화는 인간만을 중심에 두는 기존의 인간화가 아니라, 비인간 생명·생태계·미래세대까지 포함하는 새로운 공화의 기준을 요구합니다.


이 선언이 던지는 메시지는 분명합니다.


오늘의 위기는 환경 문제나 경제 문제의 부분합이 아니라, 경쟁·성장·기술 중심 국가 전략이 더 이상 공동체를 지탱하지 못하는 문명적 위기라는 진단입니다. 그래서 선언은 GDP와 성장률을 넘어 ‘좋은 삶’과 공공성을 국가 목표로 재설정할 것, 기후·생태 정의와 사회 정의를 하나의 문제로 통합할 것, 양당제 중심의 정치 구조를 재설계할 것을 요구합니다. 이는 곧 정치 이전에 사회가 먼저 합의해야 할 방향에 대한 제안입니다.


다시, 새해의 질문으로 돌아옵니다.


당신은 어떤 대한민국에 살고 있습니까.


그리고 어떤 대한민국에서 살아가기를 원합니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이미 선택되고 있습니다. 투표소에서만이 아니라, 일상의 분노와 침묵, 연대와 방관 속에서 말입니다. 새해의 대한민국은 그 선택 앞에 다시 서 있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생존을 이유로 원칙을 미루는 나라에 머물 것인지, 아니면 원칙을 감당할 준비가 된 공동체로 나아갈 것인지 선택해야 합니다.


정치가 사회 통합의 의무를 방기하는 시대에도, 시민사회의 노력은 멈추지 않습니다. 지금은 빈들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빈들에서 다시 대화를 시작하는 일, 그곳에서 새로운 공화국의 방향을 세우는 일만이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미래입니다.


하나만 덧붙입니다. 우리가 단절해야 할 것은 단지 과거의 권위주의 정치만이 아닙니다. 인공지능은 분명 더 많은 것을 더 싸게 만들어낼 수 있는 시대를 열고 있지만, 그 풍요가 불안을 줄이기는커녕 경쟁과 조급함을 증폭시키는 역설이 이미 나타나고 있습니다. 문제는 기술이 아니라 그 성과를 어떻게 사회적으로 조직하느냐입니다. 풍요가 소수의 효율과 독점으로 귀결될 때, 탈희소성은 ‘여유’가 아니라 새로운 불안과 예속의 조건이 됩니다. 그리하여 4차산업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우리가 어떻게 공동체의 조화와 공존, 상생을 지켜낼 것인가는 또 다른 주요한 과제로 부상합니다.


💊 [심화하여 읽기] 우리가 당장 멈춰서 돌아봐야 할 '이것' https://naver.me/5YScLPr4


🔹 국민국가 이후의 과제, 그러나 국민국가 이전의 질문


베네딕트 앤더슨이 말한 ‘상상의 공동체(imagined community)’는 어떤 이상을 제시하기 위한 개념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근대라는 특정한 역사적 조건 속에서, 왜 그리고 어떻게 국민국가가 가능해졌는지를 설명하기 위한 통찰이었습니다. 민족과 국가는 자연적 실체가 아니라, 인쇄자본주의와 교육, 행정과 법이라는 제도적 장치 위에서 사람들이 함께 속해 있다고 상상함으로써 성립한 정치적 공동체였다는 설명입니다.


중요한 점은, 앤더슨의 논의가 국민국가를 찬양하기 위해 쓰인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는 국민국가가 당대의 역사적 과업에 대한 하나의 응답이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봉건 질서가 해체되고, 제국이 흔들리던 시기에, 사람들은 혈연이나 신분이 아니라 공유된 규칙과 이야기를 통해 새로운 정치 질서를 만들어야 했고, 그 결과물이 국민국가였습니다.


이 관점에서 보면, 우리의 질문은 단순히 “국민국가를 넘어설 것인가”가 아닙니다. 오히려 더 불편한 질문에 가깝습니다.


우리는 과연 국민국가를 제대로 만들어본 적이 있는가.


한국의 근현대사는 압축과 유예의 역사였습니다. 전쟁과 분단, 개발과 독재, 그리고 뒤늦은 민주화 속에서 국가는 빠르게 작동 장치를 갖췄지만, 그 장치를 정당화하는 공화의 상상과 시민적 합의는 충분히 축적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국가는 종종 ‘함께 만들어가는 공동체’라기보다, 관리와 동원의 체계로 먼저 경험되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국가를 신뢰하지 못하고, 정치에 냉소하며, 제도 앞에서 반복적으로 좌절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또 하나의 역사적 전환점 앞에 서 있습니다. 기후위기, 불평등, 기술 권력, 초국적 자본의 이동은 서구 근대가 상정했던 국민국가의 조건을 근본적으로 흔들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변화가 곧바로 ‘국민국가의 종말’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지금의 위기는, 국민국가를 성숙시키지 못한 채 다음 단계로 넘어가려 했을 때 발생하는 균열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오늘의 과제는 서구의 경로를 반복하는 것도, 그 경로를 성급히 폐기하는 것도 아닙니다. 앤더슨이 했던 것처럼, 우리는 다시 묻고 추적해야 합니다.


이 시대에 공동체를 가능하게 하는 상상은 무엇인가.


국가는 어떤 원칙 위에서 정당화될 수 있는가.


시민은 어떤 조건에서 ‘함께 감당할 수 있는 존재’가 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이 정리되지 않은 상태에서, 더 큰 공동체를 말하는 것은 순서가 뒤바뀐 일일 수 있습니다. 지구시민이라는 개념 역시 그런 맥락에서 하나의 예시일 뿐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름이 아니라, 공동체를 작동시키는 원칙과 신뢰의 재구성입니다.


그래서 저는 여전히 국민국가 건설(nation-state building)을 고민합니다. 그것은 국경을 닫자는 말이 아니라, 이 나라가 어떤 기준으로 작동해야 하는지를 다시 묻는 일입니다. 생존과 효율이 아니라 존엄과 책임을 기준으로, 동원이 아니라 시민성을 토대로, 관리가 아니라 합의에 의해 움직이는 국가를 상상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새해를 맞아 거창한 선언을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다만 이 질문 하나는 붙들고 싶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생존을 이유로 원칙을 미루지 않는 나라가 될 준비가 되어 있는가.


완성된 나라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떤 나라를 만들 것인지는, 지금 이 순간에도 선택되고 있습니다.


어쩌면 지금이야말로, 서구의 과제를 뒤따라가는 단계를 넘어, 새로운 역사적 진전을 스스로 사유하고 선택해야 하는 시점일지도 모릅니다.


새해의 대한민국은, 그 선택 앞에 다시 서 있습니다.

경계에 안주하지 않는 시민을 어떻게 길러낼 것인가

― 지구시민학교, 지구시민원정대, 그리고 도덕적 야망

✍️ [편집주] 앞서 레터에서 밝힌 것처럼 랩2050은 <지구시민학교> 발족을 준비 중인 <공존의뜰>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지난해 11월 중순부터 네 차례 실무팀 회의(11/17·11/24·12/1·12/15) 등을 거친 논의 결과를 압축하여 제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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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회는 다시 한 번 민주주의의 토대를 묻는 시간 앞에 서 있습니다. 계엄 선포와 탄핵을 둘러싼 정치적 격랑은 단지 정권의 문제가 아니라, 공론장이 얼마나 취약해졌는지를 드러낸 사건이었습니다. 촛불 이후의 10년은 제도적 교체만으로는 시대가 바뀌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과정이었고, 그 공백 속에서 혐오와 배제, 단기적 분노가 공론을 대신해왔습니다. 지구시민학교를 준비하는 우리(공존의뜰)는 이 흐름을 하나의 정치적 국면이 아니라, 공론을 떠받쳐 온 시민의 감수성과 상상력이 약화된 징후로 받아들입니다. 

공존의뜰이 공유해온 성찰의 출발점은 한국 사회가 오랫동안 자신을 ‘국민국가 시민’이라는 단일한 틀에 가두어 왔다는 문제의식입니다. 국경을 넘는 자본과 정보, 노동과 위기의 시대에 우리는 여전히 내부와 외부를 가르는 오래된 시민권의 언어로 세계를 이해하려 합니다. 그 결과 이주민과 난민, 소수자는 공동의 미래를 함께 꾸려갈 동료 시민이 아니라 관리와 통제의 대상으로 밀려납니다. 준비팀 논의의 한 축을 이뤄온 조희연 전 서울시교육감은 이를 “대한민국 국적과 지구시민 국적의 이중 감수성”이라는 말로 풀어냅니다. 이는 법적 신분의 문제가 아니라, 세계를 바라보는 인식의 문제입니다. 내가 지구의 시민이라는 상상력을 가질 때, 타인은 경쟁자나 위협이 아니라 함께 살아갈 존재로 재인식되는 것입니다.

정건화 한신대 명예교수의 문제 제기는 이 상상력이 왜 지금 필요한지를 구조적으로 짚습니다. 오늘의 위기는 어느 한 국가의 정책 실패로 환원될 수 없습니다. 국가주의의 귀환, 민주주의의 후퇴, 심화되는 불평등과 기후위기, 그리고 서로 단절된 지식 체계가 맞물린 중층적 위기입니다. 이 위기는 개별 전문가의 해법이나 단기 캠페인으로는 다룰 수 없습니다. 서로 다른 위치에서 살아온 사람들의 경험이 연결되고, 지식이 경쟁이 아니라 연대로 조직될 때만 새로운 공공성이 형성될 수 있다고 봅니다. 지구시민학교는 이 위기를 ‘가르쳐야 할 주제’가 아니라, 공론이 다시 작동하기 위한 조건으로 받아들이는 실험에 가깝습니다.

이 지점에서 준비팀은 브루노 라투르의 사유를 하나의 중요한 참조점으로 삼고 있습니다. 라투르는 근대 사회가 정치·과학·자연·사회를 인위적으로 분리해 왔다고 비판하며, 우리가 다시 다루어야 할 것은 ‘사실의 문제(matter of fact)’가 아니라 ‘관심사의 문제(matter of concern)’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 무엇이 옳은가를 판정하기에 앞서, 무엇이 우리를 함께 얽어매고 있는지, 무엇이 공적으로 돌보아야 할 대상인지를 묻는 능력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민주주의의 위기는 절차의 위기이기 이전에, 무엇을 함께 걱정하고 논의할 것인가를 상실한 상태라는 그의 진단은 오늘의 한국 사회에도 깊이 공명합니다. 

이기호 한신대 교수가 제안한 ‘국경 없는 지식인’ 구상은 이러한 문제의식을 한 단계 더 밀어붙입니다. 그는 우리가 필요로 하는 존재를 더 이상 전통적 의미의 ‘지식인’으로 부르기 어렵다고 말합니다. 교과서와 논문에 축적된 지식만이 아니라, 밭을 일군 손과 현장을 지켜낸 몸, 실패와 선택을 견뎌온 삶 속에 이미 공적으로 공유할 지혜가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지식인’이 아니라, 살아온 경험 자체를 공론의 장으로 가져올 수 있는 사람들, 다시 말해 ‘지혜를 살아온 이들’을 상정합니다. 이는 라투르가 말한 행위자-네트워크처럼, 공론이 특정 전문가 집단이 아니라 다양한 행위자들의 연결 속에서 형성된다는 관점과도 맞닿아 있습니다. 

이러한 성찰들이 포개지는 지점에서 지구시민학교의 사상적 기초가 윤곽을 드러냅니다. 지구시민학교는 지식을 전달하는 학교라기보다, 사유–교육–실천이 순환하는 공론의 생태계를 지향합니다. 몇 시간의 포럼이 ‘의미 있는 이야기였다’는 이해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머무는 동안 사고방식과 관계, 자기 위치가 흔들리고 재구성되는 경험을 설계하고자 합니다. 경쟁을 넘어 연대를, 배타를 넘어 공존을 배우는 일은 교실 안 강의로 완성되지 않습니다. 함께 말하고, 머물고, 실천하며 무엇을 공적으로 돌볼 것인지를 다시 합의하는 과정 속에서만 가능합니다.

◼︎ 사상적 기초의 확장: 브루노 라투르가 다시 묻는 ‘함께 살아간다는 것’

지구시민학교의 문제의식은 단지 시민 교육의 새로운 모델을 찾는 데서 그치지 않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어떤 세계에 살고 있으며, 그 세계를 어떤 방식으로 함께 유지하고 재구성할 것인가라는 더 근본적인 질문과 맞닿아 있습니다. 이 지점에서 프랑스 철학자이자 과학기술사회학자였던 브루노 라투르의 사유는 중요한 사상적 좌표를 제공합니다.

라투르의 작업은 오랫동안 ‘근대성’이 당연한 것으로 전제해온 구분들—자연과 사회, 과학과 정치, 인간과 비인간—이 실제 세계에서는 결코 분리되어 작동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집요하게 드러내는 데서 출발했습니다. 그는 과학이 순수한 사실의 영역이고, 정치는 가치와 이해관계의 영역이라는 이분법 자체가 현실을 설명하지 못한다고 보았습니다. 기후위기, 팬데믹, 기술 재난과 같은 문제들은 언제나 자연·기술·정치·경제·윤리가 얽힌 ‘하이브리드한 사안’으로 나타나며, 기존의 제도와 학문 분업은 이 복합성을 감당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라투르가 제안한 전환의 핵심은 “세계를 하나의 무대로 상정하고, 그 위에서 인간만이 주체로 행동한다”는 사고방식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그는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를 고정된 배경이 아니라, 인간과 비인간 행위자들이 끊임없이 관계를 맺으며 구성해가는 ‘공동의 터전’으로 다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여기서 정치란 더 이상 국가 간 경쟁이나 권력 쟁취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정치란 서로 다른 존재들이 어떤 세계를 함께 유지할 것인지 협상하고 조율하는 과정 그 자체가 됩니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민주주의에 대한 라투르의 재정의로 이어집니다. 그는 민주주의의 위기를 단순히 대표성의 위기나 참여 부족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진짜 위기는, 우리가 더 이상 무엇이 논의의 대상이고, 누가 그 논의에 참여해야 하는지조차 합의하지 못하는 상태에 빠졌다는 데 있다고 진단합니다. 기후위기처럼 명백히 모두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문제조차 ‘정치적 쟁점’이 아니라 ‘전문가의 영역’이나 ‘개인의 선택’으로 밀려나는 상황에서, 공론장은 점점 비어가고 사회는 파편화됩니다.

라투르가 말한 ‘존재양식의 다원성’은 바로 이 지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세계에는 하나의 합리성, 하나의 진리 체계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방식으로 의미를 만들어내는 다양한 삶의 양식들이 공존한다는 인식입니다. 문제는 이 다양성이 사라져서가 아니라, 서로 만날 수 있는 장이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각자의 언어와 경험, 관심사가 고립된 채 흩어질 때, 사회는 갈등을 조정하지 못하고 혐오와 배제로 기울어집니다.

지구시민학교가 주목하는 지점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다시 세워야 할 것은 ‘정답을 가르치는 학교’가 아니라, 서로 다른 존재와 경험이 같은 테이블에 앉아 세계를 논의할 수 있는 공론의 조건입니다. 라투르의 사유는 이 작업이 단순한 시민교육이나 캠페인이 아니라, 새로운 정치적·윤리적 상상력을 실험하는 장이어야 함을 일깨웁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지구시민학교는 국가의 경계 안에서만 작동하는 시민권을 넘어, 인간과 자연, 기술과 삶이 얽힌 세계를 함께 책임지는 지구적 시민성의 실험장을 지향합니다. 이는 거창한 이념의 선언이 아니라, 어떤 문제를 공론의 중심에 둘 것인지, 누구를 대화의 주체로 초대할 것인지, 어떤 방식으로 함께 행동할 것인지에 대한 매우 구체적인 선택의 문제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학교라는 형식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판단에 이르게 됩니다. 배움과 토론, 실천이 분리되지 않고 순환하는 장, 젊은 세대가 관찰자가 아니라 직접 몸을 움직이며 세계와 관계 맺는 장이 필요하다는 인식이 자연스럽게 뒤따릅니다. 그렇게 해서 구상된 것이, 학교와 플랫폼, 캠페인의 경계에 서 있는 또 하나의 실험—지구시민원정대라는 이미지입니다.

◼︎ 무엇을 하려 하는가: 학교와 플랫폼, 캠페인의 그 어느 중간 지대로서의 원정대

지구시민학교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반복적으로 한 가지 질문에 부딪혔습니다. “이걸 정말 ‘학교’라고만 부를 수 있을까?”라는 질문입니다. 학교라는 이름은 신뢰와 지속성을 주지만, 동시에 젊은 세대에게는 또 하나의 교육 코스, 또 하나의 훈육과 평가의 공간으로 읽힐 가능성도 있습니다. 문제의식은 분명한데, 그 문제의식을 대중이 ‘살아 있는 경험’으로 받아들이게 만드는 방식은 아직 열려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먼저, 지구시민학교가 무엇이 아닌지를 분명히 해야 했습니다. 이곳은 학위를 주는 교육기관이 아닙니다. 특정 이념이나 노선을 주입하는 운동 조직도 아닙니다. 성과 지표를 앞세운 단기 캠페인이나 이벤트 플랫폼도 아닙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만들고 있는가. 이 질문을 피하지 않고 길게 붙잡아둘 때, 지구시민학교의 정체성은 오히려 또렷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지향하는 것은 ‘완성된 시민’을 배출하는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세계의 복합적 위기 앞에서 질문을 멈추지 않는 사람들을 연결하고, 그 질문이 공론으로 자라날 수 있는 조건을 복원하는 일입니다. 기후, 이주, 불평등, 민주주의의 위기는 교실 안 지식만으로 다룰 수 없습니다. 현장을 건너야 하고, 타인의 삶과 접속해야 하며, 때로는 실패와 좌절을 감수해야 합니다. ‘교육’만으로는 부족하고, ‘운동’만으로는 거칠며, ‘캠페인’만으로는 얕아집니다. 그래서 지구시민학교는 학교와 플랫폼, 캠페인의 어느 한쪽으로 자신을 고정하지 않아야 할 것 같습니다. 대신 그 중간 지대를 선택합니다.

이 중간 지대를 가장 잘 보여주는 이미지로 우리는 ‘지구시민원정대’를 떠올렸습니다. 원정대라는 말은 학교보다 가볍고, 캠페인보다 깊다고 여겨집니다. 원정에는 정해진 교과과정도, 명확한 성공 기준도 없습니다. 대신 공통의 문제의식, 함께 이동하는 동료, 그리고 예측할 수 없는 여정이 있습니다. 누군가는 길을 안내하고, 누군가는 기록하며, 누군가는 뒤처진 동료를 기다립니다. 원정은 혼자 완주하는 프로젝트가 아니라, 함께 길을 만들고 감각을 갱신하는 과정에 가깝습니다.

지구시민원정대는 단순한 이벤트가 아니라, 지구시민학교가 선택한 ‘중간 지대’를 구체화하는 첫 번째 형태입니다. 원정대는 참여자를 수강생이나 회원으로 호명하지 않는다. 대신 같은 질문을 품은 동료로 초대합니다. 이들이 마주할 경험은 강의실의 학습이라기보다, 현장을 걷고 사람을 만나며 관계의 지도를 다시 그리는 과정입니다. 무엇을 얼마나 배웠는지가 아니라, 무엇을 다르게 보게 되었는지, 무엇을 다르게 선택하게 되었는지가 핵심이 됩니다.

이런 구상은 한 가지 현실 인식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요즘의 위기는 ‘정보가 부족해서’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정보는 넘치는데, 서로가 서 있는 자리가 달라 대화가 성립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브루노 라투르는 현대 사회의 위기를 ‘사실의 문제가 아니라 관심사의 문제’로 재정의한 바 있습니다. 같은 사실을 두고도 왜 합의가 불가능해졌는가. 그것은 우리가 무엇을 공동으로 돌보고 걱정해야 하는지—즉, 무엇이 공적 관심사인지—합의하는 능력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민주주의의 위기는 절차 이전에, 공통의 관심사와 감각을 조직하는 능력의 붕괴입니다.

지구시민원정대는 그 능력을 다시 연습하는 장치가 되어야 합니다. 원정의 핵심은 ‘정답’을 찾는 게 아니라, 서로 다른 위치에 선 사람들이 같은 땅을 밟으며 공통의 관심사를 발견하고, 말의 단위를 다시 맞추는 과정입니다. 그 과정에서 참여자들은 단지 좋은 가치에 동의하는 수준을 넘어, “나는 어디에 서 있는가, 무엇에 얽혀 있는가, 무엇을 함께 돌볼 수 있는가”를 다시 묻습니다. 공론장은 의견이 많아서 생기는 게 아니라, 서로 다른 삶의 조건을 가진 사람들이 같은 문제를 자기 언어로 말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작동합니다. 원정대는 그 최소 조건을 회복하는 출발점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지구시민학교가 선택한 ‘중간 지대’는 모호함이 아니라 의도된 설계입니다. 학교처럼 깊이와 지속성을 갖되, 평가와 위계의 언어에 갇히지 않습니다. 플랫폼처럼 연결을 확장하되, 느슨한 네트워크에 머물지 않습니다. 캠페인처럼 사회로 메시지를 던지되, 동원과 소모로도 끝나지 않아야 합니다. 지구시민학교는 이 세 가지의 장점을 취하면서도, 각각의 단점을 피하기 위해 배움–연결–실천이 순환하는 구조를 상상합니다.

결국 우리가 하려는 일은 명확해지고 있습니다. 사람들을 특정한 답으로 데려가는 것이 아니라, 같은 질문을 품고 오래 걸을 수 있는 구조를 만드는 것입니다. 지구시민원정대는 그 구조의 첫 번째 표현이며, 동시에 지구시민학교가 스스로를 시험하는 가장 솔직한 방식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더 많은 사람’이 아니라, 함께 걸을 수 있는 방식입니다. 그리고 그 방식이 만들어질 때, 학교도 플랫폼도 캠페인도 하나의 생태계 안에서 서로를 지탱하게 될 것이라 믿습니다.

지구시민학교는 아직 완성된 해답이 아니라, 이러한 질문들을 함께 감당해 보려는 하나의 시도입니다. 우리가 기대하는 것은 새로운 이념의 제시가 아니라, 공론이 다시 살아날 수 있는 조건을 차근차근 복원해 가는 과정 그 자체입니다.

◼︎ 그 다음 질문: ‘도덕적 야망(Moral Ambition)’은 어떻게 삶의 선택이 되는가

지구시민학교가 지구시민원정대라는 실천적 상을 통해 열고자 하는 장은, 단지 새로운 네트워크를 만드는 데 있지 않습니다. 그 핵심에는 한 가지 더 어려운 질문이 놓여 있습니다. 사람들은 왜, 그리고 어떻게 공공의 책임을 자신의 삶의 목표로 삼게 되는가라는 질문입니다. 여기서 지구시민학교가 주목하는 개념이 바로 ‘도덕적 야망(Moral Ambition)’입니다.

도덕적 야망은 흔히 오해되듯 ‘착해지고자 하는 마음’이나 윤리적 결단을 뜻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지금의 사회가 개인에게 강요해온 야망—더 빠른 성공, 더 높은 성과, 더 안전한 개인적 출구—과는 다른 종류의 야망을 상상하는 일에 가깝습니다. 도덕적 야망이란, 나의 능력과 선택을 오로지 나 개인의 성취로 환원하지 않고, 내가 속한 세계의 조건을 바꾸는 데 연결하려는 욕망입니다. 성공의 크기가 아니라, 책임의 범위를 확장하려는 야심이라고 말해도 좋겠습니다.

문제는 이 야망이 개인의 결심만으로는 지속되기 어렵다는 데 있습니다. 경쟁과 비교를 기본값으로 삼는 사회에서, 공공의 책임을 삶의 중심에 두는 선택은 종종 손해처럼 보이고, 고립을 동반합니다. 그래서 도덕적 야망은 미덕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의 문제가 됩니다. 같은 선택을 고민하는 사람들이 서로를 인식하고, 실패와 지연을 공유하며, 다시 시도할 수 있는 조건이 마련되지 않는다면, 도덕적 야망은 쉽게 소진될 것입니다. 

지구시민학교가 지향하는 다음 단계는 바로 이 지점에 있습니다. 아시아의 시민·활동가·지식인이 국경을 넘어 만나는 대화의 장을 축적해 공공 담론의 허브를 만들고, 그 대화가 삶의 선택과 실천으로 이어지도록 교육 프로그램과 시민 프로젝트 랩을 결합하며, 이 과정을 기록하고 번역해 다음 세대가 다시 꺼내 쓸 수 있는 공론의 토양으로 남기는 것. 이는 단기 성과를 과시하는 프로젝트가 아니라, 도덕적 야망이 개인의 결심을 넘어 집단의 선택으로 축적되는 경로를 설계하는 작업입니다.

이때 지구시민학교가 맡고자 하는 역할은 사람을 계몽하는 학교가 아닙니다. 오히려 이미 각자의 자리에서 고민하고 실천해온 이들이 서로를 알아보고, 자신의 선택이 고립된 특이점이 아니라 더 큰 흐름의 일부임을 확인할 수 있게 하는 장에 가깝습니다. 도덕적 야망은 누군가에게 주입될 수 있는 가치가 아니라, 함께 있을 때만 유지되는 야심이기 때문입니다.

공존의뜰이 지구시민학교를 통해 이루고자 하는 것은 거창한 이상이 아닙니다. 한 사회가 다시 질문할 수 있는 능력, 타인의 삶을 통해 자신을 재사유할 수 있는 감수성, 그리고 경계를 넘어 공존을 상상할 수 있는 시민을 키우는 일입니다. 민주주의의 위기는 결국 시민의 상상력의 위기이기도 합니다. 지구시민학교는 그 상상력을 회복하기 위한, 작지만 지속적인 실험의 이름입니다. 그리고 도덕적 야망은 이 실험을 앞으로 밀어붙이는 '조용하지만 가장 긴 호흡의 동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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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년, 해체와 재조립의 문턱에서

— 구정치의 종언 신호와 다음 질서의 조건


1️⃣ 격주 흐름 요약


2025년은 명백히 ‘해체와 재조립’의 해였습니다.


제왕적 대통령제의 한계, 검찰 중심 형사사법 체계에 대한 불신, 성장 중심 국정 운영에 대한 회의가 동시에 표면화되며, 기존 질서가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다는 문제의식이 정치·사회 전반으로 확산됐습니다. 다만 새로운 질서가 명확히 자리 잡았다기보다, 제도적 실험과 정치적 갈등이 뒤엉킨 과도기가 1년 내내 지속됐다는 점이 이 해의 특징입니다.


정치 지형에서도 균열은 분명했습니다. 이재명 대통령은 인수위 없는 즉시 취임 체제 속에서 국정 공백 최소화와 정책 집행 속도를 강조하며 ‘일하는 대통령’ 이미지를 부각시켰습니다. 반면 윤석열 전 대통령 탄핵 이후 국민의힘은 지도체계·노선·정체성 혼란을 장기간 겪으며 정치적 수세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연중 이어진 특검 논의와 사법 리스크는 국정 전반의 가용 에너지를 제약하는 요인으로 작용했습니다.


여당인 더불어민주당 역시 구조적 한계를 드러냈습니다. 극단적 대립 정치의 폐해가 확인됐음에도, 새로운 정치 질서와 중장기 비전 제시에 충분히 성공하지는 못했다는 평가가 적지 않습니다. 권력기관 개편·사법·언론 입법 과정에서 위헌 논란과 정치적 오해가 동시에 제기되며, 개혁의 방향과 속도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충분히 축적되지 못한 채 개별 입법이 앞서 나갔다는 지적도 이어졌습니다.


2026년을 향한 정치의 과제는 분명합니다. 시민 참여에 기반한 정책 설계, 갈등을 흡수할 공론화 구조, 제도 개편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절차—정치는 이 세 가지 질문을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지점에 와 있습니다.

 

2️⃣ 어젠다뉴스가 뽑은 2025년 정책 의제 중심 10대 뉴스

🔹 파국을 넘어 재건으로


① 3.10 헌법재판소, 윤석열 대통령 파면
→ 헌정사상 두 번째 탄핵 인용. ‘국가 권력의 사유화’에 대한 명확한 헌법적 선 긋기이자, 87년 체제 이후 누적된 제왕적 대통령제에 대한 국민적 청산 요구가 확인된 순간.


② 6.3 조기 대선, 이재명 정부 출범
→ 헌정 위기 속 즉시 취임 정부. 혼란 수습과 동시에 ‘기본사회’·‘에너지 대전환’을 병행하며 속도 중심 국정 운영의 시험대에 오름.


③ 9.26 검찰청 폐지·수사-기소 분리
→ 검찰 중심 형사사법 체계 해체. 공소청·중대범죄수사청 분리로 권력기관 개편의 정점에 도달했으나, 사법 안정성과 재수사 논란이라는 숙제 남김.


④ 내란·김건희·채상병 3대 특검 동시 가동
→ 군·정보기관의 정치 개입, 권력형 비리, 수사 외압을 동시에 겨냥한 ‘과거 청산’ 국면 본격화.


⑤ 노란봉투법 공포
→ 16년 만의 입법 완결. 노동권의 실질적 보장이라는 사회적 합의가 제도화된 상징적 사건.


⑥ 트럼프 2.0과 ‘K-반도체 700조 전략’
→ 보호무역 강화 속 국가-대기업 연합형 경제안보 전략 가동. 안보와 산업의 결합이 국정 최우선 과제로 부상.


⑦ ‘생명중심 인간화 선언’
→ 성장 중심 국가 운영에서 존엄·돌봄·생명 가치로의 전환을 모색하는 시민사회 기반의 철학적 시도.


⑧ 딥페이크 성범죄 확산과 플랫폼 책임 논쟁
→ 기술의 윤리와 플랫폼의 징벌적 책임을 묻는 디지털 재난 수준의 사회적 경고.


⑨ 조진웅 사건과 공론장의 사법화
→ 처벌 이후에도 계속되는 사회적 징벌과 여론 재판 문제 부상. 용서·회복·공인의 기준에 대한 집단적 질문 제기.


⑩ 의대 증원 갈등 봉합과 의료 공공성 과제
→ 단계적 증원으로 타협 도출, 그러나 붕괴된 지역·응급 의료 복원은 2026년 과제로 이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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