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친배우미, 안녕하신가요?

아무도 몰랐습니다. 얼마 전 영상 20도를 기록하며 더운 겨울이라고 했다가 지금 추워서 집밖이 무서울 줄...여러분, 코로나와 독감이 기승을 부리니 건강 꼭 조심하세요! ‘마친배우미’ 인터뷰가 이제 서른한 번을 맞이했습니다. 이번 주인공은 바로 변산노을입니다. 노을은 한배곳 1기로 들어와서 2기와 함께 졸업한, PaTI의 살아있는 화석이에요. 우리에게는 독특한 푸드 인스톨레이션으로 화제를 모았던 ‘구구모’를 지난 2019년부터 2021년까지 운영했죠. 지금은 변산노을이라는 본명으로 활동하면서, 내년 홍성에 내려가서 새로운 막을 열기 위해 준비 중인데요. PaTI 소식에 꽤나 빠꼼이었던 저도 몰랐던 노을의 인생 이야기에 푹 빠져버린 시간이었어요. 살과 뼈를 만드는 음식의 이야기에 진심을 느끼고 있는 노을과의 인터뷰를 뉴스레터에서 확인해 보세요.

안녕하세요. 노을! 정말 오랜만이네요. 간단하게 자기소개부터 나눠볼까요?

안녕하세요. 저는 PaTI 한배곳 1기로 입학해서 2기로 졸업한 변산노을입니다. 지금은 음식과 관련해 제가 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일을 하고 있어요.

저는 노을 하면 ‘구구모’가 떠올라요. 2019년 마친보람 맺음전에 선보인 플레이팅은 개인적으로 정말 충격이었어요. 어떻게 먹어야 하는지, 어떤 맛을 기대해야 하는지 종잡을 수 없어서 핑거 푸드 좋아하는 제 뇌에 처음으로 지진이 왔었죠. 이후 구구모의 이름을 여기저기서 들을 수 있었는데요. 구구모는 어떻게 시작하게 되었어요?

시작은 정말 다사다난했어요. 문득 생각하면 꿈처럼 다가올 때도 있어요. ‘내가 어쩌자고 이 일을 시작했을까? 어쩌다 이렇게 고생하고 있을까?’ 이런 생각을 많이 하는데요. (웃음) 저라는 사람의 삶과 연관이 깊어요. PaTI를 졸업하고 무척 힘들고 아팠어요. 우울증도 왔고요. 다른 친구들은 적성을 나름 찾아서 사회에 진출했는데, 저는 졸업 작품이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엉망진창으로 끝냈거든요. PaTI를 마치고 1년 넘게 ‘앞으로 뭘 해야 할까?’ 스트레스를 받으면서 아주 짧게 회사도 다녀봤지만, 곧 저는 회사 생활이 안 맞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여실히 깨닫게 됐죠. 거의 부적응자처럼 다니다가 그만두고선 집안에 주구장창 머물렀어요. 그러다 룸메이트에게 맛있는 걸 먹이고 싶어서 음식을 만들었는데요. 어쩌다 보니 주변 사람들을 초대해서 같이 나눠 먹게 됐어요.

PaTI 맞이잔치를 위한 음식 설치 작업, 2020  

원래 요리에 관심이 많았나요?

친구들끼리 집에서 뭔가 만들어 먹는 거 말고는 사실 특별한 건 없었어요. ‘오늘은 파티다!’ 이러면서 음식한다고 나선 적도 없고요. 다만 집안 내력이라는 게 좀 있더라고요. 저희 부모님 모두 음식에 대한 열정이 많으세요. 엄마는 거의 30년 동안 편집 디자이너로 일하고 계신데요. 음식점을 운영하신 적도 있고, 지금도 디자인하는 짬짬이 사이드잡으로 음식을 하세요. 요리가 취미인 거죠. 밤새 일을 끝내놓고 다른 집에 가서 잔치 음식 돕는게 그냥 즐거운 분이에요. 엄마가 요즘 저를 보면 자기 옛날이랑 어쩜 그렇게 똑같냐고 말하시는데, 그냥 그 정도 감이 있는 정도였어요.

친구들을 위해 만든 요리들

친구들에게 음식을 해주니까 마음이 좀 괜찮던가요?

음식에서 즐거움을 조금씩 찾게 되니까 사람들을 불러서 밥먹이는 일이 잦아졌어요. 일주일에 몇 번씩 계속 그러니까 친구들도 슬슬 얘기를 꺼내는 거죠. 음식으로 돈을 벌어보면 어떻겠냐고. 작은 식당을 내는 걸 권유했던 건데, 그때 저는 좀 이런게 있었답니다. ‘내가 그래도 PaTI 나오고, 디자이너인데, 식당 말고 좀 다른 거 해봐야 하는 거 아닌가?’ (웃음) 그렇게 시간을 질질 끌면서 진로에 대한 리서치를 반복했는데, 정말 우연찮게 운명의 순간이 왔어요.

오, 그게 뭐죠?

인스타그램을 쭉 보다가 프랑스에서 열리는 부아부셰 워크숍의 존재를 알게 된 거죠. ‘이게 뭐지?’ 아카이브를 살펴보던 중 2017년 진행한 푸드 인스톨레이션 워크숍 영상을 발견했어요. 프란체스카 사르티Francesca Sarti라는 분이 멘토로 참여하셨는데 국제적으로 알려진 푸드 디자인 스튜디오 아라베스키 디 라테Arabeschi di Latte를 설립하셨어요. 그 워크숍 영상이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왔어요. 아직도 1년에 몇 번씩 되새김질할 정도로요. 이걸 보자마자 부아부셰 워크숍을 들어야겠다고 결심하고, 2019년 여름에 열리는 워크숍을 바로 신청했죠.

프랑스 부아부셰 푸드 인스톨레이션 워크숍, 2019

와우. 실행력이 완전 끝내주네요.

근데 약간 문제가 있었어요. 부아부셰 워크숍을 진행하는 멘토는 매년 조금씩 바뀌거든요. 푸드 관련 워크숍이라서 신청했는데 알고 보니 멘토가 사르티 그분이 아닌 거예요. (웃음) 레일라 고하르Laila Gohar라고 되게 패셔너블하고, 작업도 그렇고, 완전 푸드 디자인 분야의 셀럽 느낌이었어요. 제가 영상에서 반한 분은 아니지만 일단 부아부셰에서 하는 푸드 워크숍을 무조건 가야겠다고 마음 먹고 비행기 표를 끊어서 1주일 동안 워크숍을 다녀온 후 바로 구구모를 시작했어요.

적성을 찾았다는 건 굉장히 반가운 일인데, 그렇게 일을 빨리 진행해도 괜찮던가요?

나중에는 가끔 그런 생각을 하긴 했어요. ‘내가 이걸 PaTI 다닐 때 알았더라면, 처음부터 차곡차곡 잘 쌓았더라면 참 좋았겠다. 이렇게 갑자기 흥미가 솟아나서, 갑자기 워크샵에 날라가 배워오는 것보다 조금 더 진지하고 탄탄하게 시작했으면 좋았을걸’ 생각이 들긴 하죠. 근데 선택의 여지가 없었어요. 이 쪽에 훅 빠지면서 마음이 급했거든요.

왜 마음이 급했어요?

구구모를 시작할 때 꿈이 하나 있었어요. ‘샤넬이나 구찌 같은 럭셔리 패션 브랜드에서 주최하는 만찬을 차려보고 싶다!’ VIP 행사 같은 특별한 자리에서 푸드 인스톨레이션을 하고 싶다는 욕망이었죠. 당시 푸드 인스톨레이션 분야가 점점 대중에게 드러나는 시기였어요. 서구에서는 이미 다들 많이 하는 상태였고요. 유명한 분들의 커리어를 살펴보니까 럭셔리 브랜드와 협업한 이후 작업의 퀄리티가 확 달라지더라고요. 창작자로서 큼지막한 프로젝트를 경험해봐야 성장하는구나, 생각이 든 거죠. 그러니까 결국 꼭 럭셔리 브랜드랑 뭔가 하고 싶다는 게 아니라, 그렇게 확 바뀌는 성장에 대한 욕심이 생긴 거였어요. 그렇지만 결과적으로 2021년 구구모를 그만둘 때까지 그런 큰 판을 겪어보진 못했죠. (웃음)

구구모 명함과 로고, 2019
첫 전시 팝업 구구모의 보석상, 티슈오피스, 2019
팝업 전시 프룻탕!, 카페 아이다호, 2020
구구모 양갱 작업, 2021

그래도 구구모는 정말 여러 행사의 푸드 인스톨레이션을 담당하면서 주가를 엄청나게 높이고 있었잖아요. 제 귀에도 구구모 이야기가 정말 많이 들렸거든요. 다양한 일을 하면서 계속 성장하지 않았나요?

사실 저는 관심 두는 분야가 너무 많았어요. 이게 일종의 성질머리 같은 건데요. 하고 싶은 건 해봐야 직성이 풀리는 거죠. 예를 들어, 패션 브랜드랑 화보를 찍고 싶으면 일단 해야 해요. 근데 궁금해서 한번 해보는 거지, 지속적으로 하지 않았어요. 전체 가이드라인을 잡고 이렇게 이렇게 하면서 성장하겠다는 계획을 정교하게 세우진 않았으니, 지금 생각해도 진짜 종잡을 수 없는 상황인 거죠. 성격이 모두 다른 일을 번갈아 가며 하니까 작업물의 격차도 심했고요. 어떤 건 진지하고 고요한데, 또 어떤 건 엄청 시끌벅적하고요. 어쩔 땐 뭔가를 팔기도 하고… 제 고유의 특성 같은 거라서 어쩔 도리가 없더라고요. 더불어 구구모를 운영할 때 PaTI에서 인연을 맺은 수지와 민수가 중간에 합류해서 협업 조직으로 발전했거든요. 그래서 좋은 말로 하면 다양성이고, 하나로 정의하지 못하는 게 구구모의 특징이라고 볼 수도 있겠네요. (웃음)

주한독일문화원 주최 ‘알렉산더 홈볼트 탄생 250주년’ 학술간담회를 위한 케이크, 2019
PaTI 마친보람 맺음전을 위한 케이터링, 2019
케이크 작업, 2020
‘이응노의 집’ 케이터링, 2022

우당탕탕 거리면서도 자리를 잡아가던 구구모가 2021년 갑자기 활동을 끝낸다고 해서 굉장히 놀라면서도, 섭섭하고, 아쉬웠어요. 업계에 정말 드물었거든요.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두 가지 이유가 있어요. 하나는 제 건강 때문이었어요. 백신 후유증으로 자가면역질환이 오면서 반년 이상 거의 반신불구 상태로 누워 있었어요. 통증이 심해서 공황장애도 왔고요. 어느 정도였냐면, 룸메이트가 숫가락으로 밥을 떠먹여 주고, 책이 읽고 싶은데 책장 넘길 힘이 없어서 친구한테 부탁하는 상황이었어요. 그게 몇 개월 지속되니까 더는 일을 못 하겠더라고요. 그리고 구구모를 포기할 수 있었던 나름의 이유 중 하나는, 이게 좀 웃긴 말이긴 한데, 제가 하는 게 하나도 멋있지 않았어요. 어느 순간 갑자기 제 작업이 너무 후지다는 생각이 들면서 너무 싫더라고요.

안목이 높아지면 그런 경우가 자주 오잖아요. 내가 한 작업이 다 엉망진창이고 남 보기 부끄럽고요.

그런 게 아니라, 어느 순간부터 제가 하는 작업의 갈피를 전혀 못 잡고 있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어요. 임정희 스승의 말이 죽비소리처럼 다가온 것도 있고요. 음식 가지고 장난 친다고 나무라신 건 전혀 아니었고요. 음식이라는 게 얼마나 신비한지, 세상에서 피와 살을 만드는 것 음식 밖에 없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라고 하셨어요. 그 얘기를 들으니까 제가 좀 자중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구구모를 시작할 때부터 저는 음식으로 장난치지 않는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서 엄청나게 발버둥을 쳤어요. 인터뷰나 워크숍에서도 매번 빠지지 않고 말했고요. 근데 임정희 스승에게 그런 말을 들으니까, 처음에는 신기하다가, 갑자기 ‘진짜 그러네’, 그러다가 ‘이상하다. 소름 돋네’가 되더라고요. 음식으로 뭔가 멋지게 만들어서 보여주는 일보다, 음식이 피와 살을 만드는 존재라는 이야기를 전달하는 게 훨씬 흥미롭고 재미있다고 믿게 됐어요. 그러면서 이제 스스로 리서치를 하고 뭔가를 알아내는 데 빠지게 됐죠.

인스타그램 중 ‘물풀들’이란 계정이 이와 연관된 건가요? 지역에서 접할 수 있는 식재료에 대한 섬세한 리포트를 보는 느낌이었는데, 굉장히 흥미롭더라고요.

맞아요. 작년 홍성에 가서 음식을 주제로 리서치를 해보자고 시도한 게 물풀들이에요. 제가 2022년 봄에 홍성에 처음 내려갔는데요. 처음에는 정말 요양이 목적이었어요. 1기 졸업생인 노디가 홍성에서 채소 생활이라는 회사를 운영하면서 농사를 짓고 있거든요. 마친배우미 인터뷰에서 한번 다루셨죠? (웃음) 노디 곁에서 지내면서 일도 조금씩 도와주고, 몸이 괜찮아지면서 그해 후반기부터 다시 서울로 돌아와 일을 재개했는데요. 홍성에 가보니 전에 보이지 않던 게 보이더라고요. 뭔가 모든 게 연결이 되는 느낌이었어요. 그러면서 내가 이런 살아가는 이야기를 해야하는 게 아닐까, 내 주변의 것을 이야기하고, 실제 내가 사는 삶을 말할 때 좀 더 건강해지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어요. 내 일과 내 작업이 내 삶을 얘기하면 건강한 몸과 마음으로 작업할 수 있겠다는 느낌이랄까요. 그래서 지역을 돌아다니면서 지역 재료와 음식을 직접 경험하고, 이걸 가지고 뭔가 만들어내는 일에 흥미를 느끼고 있어요. 내년에는 아예 홍성에 정착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서풍골 다이닝: 시간과 성장’, 2023
마르쉐 어린이 미식 워크숍, 2023

재미있는 얘기가 계속되는데, PaTI 마친배우미 인터뷰라 잠시 멈추고 PaTI 얘기를 하지 않을 수 없네요. (웃음) 노을은 PaTI를 어떻게 처음 알게 되었어요?

저는 중고등학교 모두 대안학교를 나왔는데요. 제가 다닌 학교들이 ‘인드라망’이라는 단체로 묶여 있는데, 그 로고를 만든 분이 바로 날개였어요. 인드라망 사람들이 날개 얘기를 많이 하니까 PaTI를 설립한다는 소식도 저희 부모님 귀에 들어갔나 봐요. 그래서 인드라망 로고를 만든 날개가 디자인 교육 기관을 만드는데, 거기에 가보는 건 어떠냐고 권유하셔서 PaTI 1기로 입학하게 됐지요.

PaTI가 벌써 10주년이 됐지만, 노을이 입학했던 시절만 해도 워낙 독특했잖아요. 제 기억에는 한 마디로 ‘정글’이었어요. 진정 즐기는 사람만 살아남을 수 있는! 노을에겐 어땠나요?

난리도 아니었죠. 1기와 2기는 정말 성향이 달라요. 1기는 2기의 활발함을 좋게 보고, 2기는 1기의 집중력에 감탄했어요. 1기는 작업도 약간 미친놈처럼 달라붙어서 하고, 2기는 발랄하게 했죠. 저는 1기, 2기를 모두 경험했는데, 아무래도 같이 졸업한 2기 친구들에게 애착이 좀 더 가요. 내가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뭔가 하자고 하면 언제든지 협업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을 줘요. 저희가 그 전설의, 돈 모아서 태국으로 졸업여행 다녀온 기수이기도 하고요. 하하.

2기 중에 특히 기억에 남는 존재가 있나요?

대표적인 존재가 없어요. 그냥 다들 너무 가족 같거든요. 가족이라고 꼭 좋은 말이 아닌 건 아시죠? 진짜 한 대 쥐어박고 싶을 때도 있으니까요. 그래도 서로가 서로에게 해결사가 되는 느낌이에요. 조언을 구하고, 도움을 구하게 되는. 심지어 진짜 그 안에서 해결이 되고요. 고급스럽게 말하면 자립가능한 컬렉티브고, 사실은 세운상가죠. (웃음) 저는 거기서 음식을 담당했고요. 실제로 제 친구들이 일감을 많이 줬어요. 첫 번째 일도 티슈 오피스의 상익이 줬고요. 서로서로 일을 챙기는 것 같아요. 자주 만나지 않아도 계속 엮여 있는 공동체 같은 느낌이에요.

PaTI를 다니면서 가장 기억에 남았던 일은 뭔가요?

이건 1기랑 함께 한 건데요.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바우하우스 관련 전시를 열었을 때, 교실 자체를 서울관으로 옮겨서 한 학기 동안 거기서 수업하고, 동아리 활동도 하고, 발표회도 했어요. 지금 생각하면 미술관에서 수업하고 생활하는 게 진짜 말이 안 되는 일이에요. PaTI가 아니라면 정말 불가능한 경험이라고 봐요. 덕분에 저도 그런 기회를 만드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했죠. 언제나 느끼지만, 정말 놀라운 일이었어요. 우리가 이렇게 해도 되는 건가, 생각이 들 정도로요.

2014년 《바우하우스의 무대실험 - 인간, 공간, 기계》전 퍼포먼스 준비 모습
전시 기간에 맞춰 파주에 있는 교실을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 통째로 옮겨갔다.

지금 PaTI에 다니는 배우미들은 노을과는 다른 경험을 하고 있을 거예요. 그래도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부탁해도 될까요?

구구모로 활동할 때 PaTI 세미나에 온 적이 있어요. 그때도 이런 말을 했었는데요. 저는 PaTI를 졸업하고 음식 관련 일을 하는 저 자신이 아직도 신기하거든요. PaTI에 다니는 친구 중 PaTI가 디자인 관련 교육기관이니까 졸업하고 디자인계에서 자기 몫을 딱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의외로 많더라고요. 사실 그렇기 때문에 그러지 못했던 제 마음이 힘들었고, 졸업 작품 때문에 스트레스도 많이 받았죠. 근데 중요한 건 자기가 만족하는 일을 찾는 것 같아요. 졸업 후 미래에 어떤 일을 할 거라고 미리 너무 매여있으면 몸과 마음이 아파지는 지름길이라고 봐요. 저처럼요. 사람들은 제가 되게 옛날부터 지금 하는 일을 시작한 줄 아는데요. 앞서 말했다시피, 저는 제게 맞는 일을 찾고 시작하기까지 너무나도 오랜 시간과 고민을 거쳤어요. 졸업할 때도 엉망, 그다음에도 엉망이었지만 그럼에도 결국 천천히 제게 맞는 일을 찾은 입장에서 다들 너무 조급해하지 말라고 말해주고 싶어요.

PaTI 마친보람 맺음잔치, 2020

다행히 건강을 찾은 후 요즘 일을 계속하고 있어요. 그런데 홍성에 내려간다고 하니 앞으로 어떻게 삶을 꾸려나갈지 굉장히 궁금해지네요. 현재 가장 관심 가는 일은 뭐에요?

지금은 공부를 하고 싶어요. 제가 왜 음식을 계속 다루고, 왜 이 일을 계속할 건지, 그 이유를 명확하게 정리하고 싶거든요. 이런 생각의 연장선에서 지금 학교에 다니고 있어요. 온라인 학교요.

푸드 아트를 가르치는 온라인 학교가 있어요?

이게 외국에서 프로젝트처럼 운영하는 사설 교육 과정인데요. 온라인으로 일주일에 한 번씩 다양한 연사의 강의를 듣고, 개인 프로젝트도 진행하는 커리큘럼이에요. 지난 10월에 시작했고, 내년 6월에 끝나요. 기간이 짧지만, 여기에는 푸드 아트에 대한 본질적인 성찰을 할 수 있어요. 사실 음식은 우리 인생, 그 어느 분야와도 다 관련이 있잖아요. 그래서 여기서는 음식뿐 아니라, 지리, 성평등, 과학, 발효, 음악 등 엄청나게 다양한 분야를 커버해요. 말하고 보니까 PaTI랑 되게 비슷하네요. 암튼, 임정희 스승이 예전에 말했던 ‘피와 살을 만드는 음식’이란 말과 되게 잘 맞물리기도 하고, 이런 게 가장 중요한 지점이라면 나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까, 질문을 가지고 학교에 다니고 있습니다.

학교 커리큘럼은 100% 온라인인가요?

수업은 온라인으로 이뤄지는데, 3개월에 한 번씩 실제 모여서 워크숍을 해야 해요. 그래서 지난 10월에 스페인으로 10일 정도 워크숍을 다녀왔고요. 내년 3월에 또 가고, 6월에는 개인 프로젝트를 진행해서 발표해야 해요. 전시든, 출판이든, 퍼포먼스든, 그 어떤 식으로든지요. 제가 요즘 한국의 구전 설화나 미신 등 샤머니즘에 흠뻑 빠져있는 상태라, 이와 관련한 자료를 공부하고 음식으로 풀어내려고 생각 중이에요. 전에는 공부하라고 하면 싫었는데, 지금은 마음가짐이 달라서 그런지 생소하면서도 너무나도 재미있어요. 참 신기한 일이죠. 

스페인의 푸드아트 학교

내년에 홍성으로 내려가면 구구모 같은 푸드 인스톨레이션 작업은 더 이상 안 하는 건가요?

음. 완전 안 하는 건 아니고 한 달에 한 번 정도? 일단 제가 구구모로 활동할 때 마음이 안 좋았던 경우가 종종 있었어요. 화보를 잘 찍기 위해서 음식에 구두약을 바르고, 물감으로 채색하고, 똑같은 음식을 여러 세트로 준비한 후 나중에 다 버렸거든요. 이런 게 절차상 필요하다는 점은 알고 있지만 거부감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어요. 그러다 이제 구구모 시절을 떠올리면, 화보와 꾸미는 일이 진짜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아닌 것 같다는 확신이 들어요. 사실 이걸 인정하기까지 되게 오랜 시간이 걸렸어요. 쿨해 보이고 힙해 보이는 이런 일을 사실 못 버리는 게 아닐까, 좀 쉬었다가 다시 일하면서 자신감이 떨어지니까 이런 식으로 커버치는 거 아닐까, 고민을 엄청 했거든요. 그렇지만 결론적으로, 저는 ‘그것을 더 이상 멋지다고 말하지 못하는 사람’이 되었다고 생각해요.

혹시 홍성에 내려가면 어떤 일을 할 건지 생각해둔 게 있나요?

작년 홍성에서 머물렀을 때 노디와 함께 일하는 청년 공동체 모임을 겪으면서 뭔가 제 자리를 찾은 느낌이 들었어요. 그래서 그들과 같이 일해보고 싶어서 다시 내려가겠다고 결정했죠. 디자인 계에 종사하지 않는 사람들을 만나는 게 요즘 무척 즐거워요. 예술이나 디자인이 아니라, 진짜 그냥 일을 하고 싶을 때가 있거든요. 지금까지 살면서 1년 계획을 세워본 적이 없는데요. 태어나서 처음으로 2024년 계획을 세우고 있어요. 일단 음식에 관한 리서치를 하면서 저같은 사람들을 더 만나보고, 모으고 싶고요. 홍성에 있는 다른 청년분들이랑 레지던시를 하나 운영할까 해요. 레지던시는 보통 아티스트가 머물잖아요. 저희는 셰프를 위한 레지던시를 시작하고 싶어요.

말만 들어도 인생의 새로운 막이 열리는 느낌이에요. 그럼 이제 노을이 궁극적으로 하고 싶은 일에 대한 감이 좀 오려나요?

내년은 아주 아주 새로운 막이에요. 이걸 스스로 열기 위해서 온라인 학교를 다니기로 결정했고, 졸업하면 작은 실마리라도 찾지 않을까, 기대도 조금 하고 있고요. 저는 이 일을 왜 하는지, 왜 해야만 하는지, 왜 해야 행복을 느끼는지에 대한 이유가 꼭 필요한 사람인데요. 아직까지도 감이 안 온 걸 보면 계속 찾는 중인 것 같아요. 어쩌면 죽을 때까지 못 찾을 수도 있죠. 정말 우유부단하고, 결정도 잘 못하고, 흘러가는 대로 이거 했다가 저거 했다가 하는 식이라, 제게 과연 명확한 게 있을까 싶기도 해요. 그래도 요즘은 이렇게 마음껏 살고 있다는 사실이 즐겁습니다. 즐겁기에 그냥 해본다는 마음으로 내년을 맞이하고 싶어요. (웃음)

↓  인터뷰 영상  

2024학년도 새배우미 모집

원서접수: 2023.12.3.해 - 2024.1.7.해

2024학년도 새배우미 모집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동안 파티 지원에 관심있었던 분들 또는 주변에 디자인과 예술에 관심있는 반짝이는 학생들에게도 이번 소식이 잘 전달되었으면 합니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 링크를 통해 확인해주세요!
파주타이포그라피배곳(Paju Typography Institute, PaTI)은 2013년 봄, 파주에서 움튼 독립 디자인 학교입니다. 새로운 디자인 교육의 필요성에 동감한 시각 디자이너 안상수와 여러 스승이 꾸린 교육협동조합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동아시아의 지혜와 정체성에 바탕을 두고 무권위와 무경쟁을 지향합니다. 배우미는 스승과 함께 학교를 디자인하며 스스로 뜻한 바를 자발적으로 성취합니다. PaTI는 일반 대학에 준하는 4년제 바탕 과정 ‘한배곳’과 대학원에 준하는 2년제 심화연구 과정 ‘더배곳’, 1년제 ‘PaTI.is(일러스트레이션)’, ‘PaPA(프로덕션디자인)’ 특별과정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파티를 후원해주시는 분들

(주)아모레퍼시픽, (주)신세계, (주)안그라픽스, (주)두성종이, C-program, AGI국제그래픽연맹
강경선, 고영은, 구익환, 김경희, 김재민, 민병걸, 박영숙, 박예나, 박은영, 박진희, 박하얀, 안상수, 안웅비, 안지용, 양혜규, 오동엽, 오진경, 이동국, 이민영, 이찬, 임준, 정소현, 정후주, 최창희, 홍선애, 홍채원

2023.12.20.물날
인터뷰·글: 전종현  |  편집·발행: 박하얀
영상 촬영·편집: PaTI 영상연구소 이형곤, 한수현
Paju Typography Institute Coop.
경기도 파주시 회동길 330  |  031-955-9254  |  
news@pati.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