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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캠핑이 좋아서! |  박찬은

빌런은 어쩌면 나일지도

“그냥 지금 치자.”
“에이, 누나 비 안 와요. 뉴스에 비 안 온다고 했어요.
타프(햇볕과 비를 막아주는 천막) 안 쳐도 되요.”


하지만 녀석의 확신에 찬 목소리는 약 5분도 지나지 않아 사나운 소나기 소리에 묻혀버렸다. 영롱했던 은빛 병어회와 쌈장 위에도, 쿨일라(Caol Ila) 위스키가 담긴 내 술잔 속에도 굵은 빗방울이 후두둑 떨어졌다. 나 같은
피트(peat)파에게도 거부감이 적은 스코틀랜드 아일라 섬의 싱글몰트 위스키가 속수무책으로 비에 희석되는 걸 바라보며 폭풍우를 만난 선원처럼 이리 뛰고 저리 뛰었다. 그러나 강하게 내리는 폭우 때문에 타프 설치가 쉽지 않다. 그러자 이미 낮에 타프 설치를 마친 옆 사이트 여자가 외친다. “자기야, 가서 도와드려.” (남편)“남자분 있잖아?” 그러나 그 남자분 A는 폴대 위치도 몰라 허둥대고 있었고, 새 타프를 처음 쳐보는 나와 환상의 복식조를 이루자 결국 옆 사이트의 홍반장들이 달려 나와 빗속에서 타프를 함께 쳐주었다. 천사세요?


안정을 되찾은 나와 A는 타프 아래에서 다시 술잔을 기울였다. 그런데 타프에 고이는 빗물의 무게가 심상치 않다. 정수리에 잔뜩 비를 머금은 타프가 벌에 쏘인 엉덩이처럼 땡땡하게 부어 있었다. 그때 갑자기 일어난 A가 내 만류에도 불구하고, 잔뜩 성난 타프 아래에 폴(pole)대를 갖다 댄다. 그 순간 터질 듯 잔뜩 팽창해 있는 타프가, 마치 넘어진 김에 울어버리듯 “찌직!” 소리를 내며 찢어졌다. 비의 무게를 이겨내지 못하고 천막에 구멍이 난 것이다. 미리 타프를 치자고 했을 때 계속 술잔만 부딪히던 A의 모습이 구멍 사이로 쏟아져 내리는 빗물에 겹쳐졌다. 저걸 죽여, 살려. 사랑이 ‘창밖의 빗물’ 같다면 증오는 타프 안의 빗물이었다. 물에 젖은 병어 맛이야 말해 무엇 하리.  

그리고 얼마 뒤 포천의 한 캠핑장. 나무에 해먹을 걸고 얼음장 같은 계곡물 속에 수박과 이동막걸리를 옹기종기 눕혀 놓을 때만 해도 좋았다. 다음 날 아침 차 키를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알기 전까지는. 함께 온 캠퍼 친구들이 혈흔을 찾는 CSI 요원들처럼 파쇄석 사이사이, 화장실과 개수대를 오가며 1시간여 바닥을 훑었지만 찾을 수 없다. “아아, 알립니다! 한 캠퍼 분이 차키 분실했다고 하시는데, 혹시 바닥에 자동차 키 보시면 사무실로 가져다 주시기 바랍니다!” 어린 시절 운동장에 에코로 메아리 치던 교장님 훈화 말씀처럼 캠핑장 전체에 차 키 분실 소식이 울려 퍼졌다. 그때 또 A가 손을 번쩍 든다. “누나! 나 차문 옷걸이로 따는 거 전문이야. 너무 잘 따서 옷걸이 차 바닥에 붙이고 다니잖아요. 문 열어주면 나 소개팅 해줘야 되요.” 하지만 내가 녀석에게 소개팅을 해주는 일은 영원히 생기지 않았다.

한 손엔 칼, 한 손엔 코란을 들고 중남미를 공략하던 13세기 이슬람교처럼 한 손엔 일자로 편 옷걸이와 한 손엔 가위 날을 펼쳐 든 A는 내 차 문과 유리 사이를 끊임 없이 공략했다. 금고를 여는 안젤리나 졸리 같은 우아하고 군더더기 없는 동작이 아니라, 뒤꿈치까지 들고 창문에 붙어 낑낑대는 모양새다. 그러나 신형 티볼리는 과하게 튼튼했다. 긴 시간 용을 쓰던 A는 창문에 부서진 실리콘과 수많은 스크래치만 남긴 채 결국 뒤로 물러났다. 물 건너 간 자신의 소개팅과 함께. 결국 자동차 보험 긴급출동 차량이 캠핑장에 도착했고, 레커 차량에 코가 꿰인 내 차는 앞 바퀴가 들린 채 쓸쓸하게 집까지 견인됐다. 뒷유리로 바라본 티볼리는 왜 그리 처량한지.

 

레커차 기사님은 울적한 내 표정이 신경 쓰였는지 연신 말을 걸어주신다. “캠핑장에서 배터리 방전은 많아도, 키 분실은 처음이네요. 뭐 그럴 수 있죠, 하하!” 그리고는 서울로 오는 90분 동안 뷰 좋고 시설 깨끗한 캠핑장들을 여럿 추천해주었다. 그러나 ‘걱정되면서도 웃음을 감출 수 없는’ 표정으로 날 배웅하던 친구들과 캠핑장 내 모든 이들의 호기심 어린 시선을 받으며 포천에서 서울까지 무려 15만 원의 견인비를 내고 끌려온 내 귀에는 이미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들뜬 잇몸처럼 너덜거리는 차문 실리콘을 보니 내 잇몸도 들뜨는 것 같았다. 침통한 마음으로 집에 있던 스페어 키로 문을 열고 트렁크 바닥까지 뒤집어 까보았다. 그런데 저건 뭔가. 쿨러백 옆주머니에서 까맣게 빛나고 있는 저것은. 차 키다(!) 알고 보니 전날 밤, 급하게 자리를 정리하며 호주머니에 넣어둔 차 키를 급한 대로 눈앞에 있던 쿨러백 주머니에 넣어 놓은 것. 자괴감에 몸서리치다가, 헤집어 놓은 장비와 스크래치 범벅인 차를 보고 몸서리치다가 카드결제 문자를 보고 또 한번 몸서리를 친다.  

구멍이 점점 커지는 타프와 스크래치 가득한 차 유리창을 보며 A와의 캠핑은 피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마치 갖고 다니면 부정을 타는 인형 같았달까. 뭐든 없애버리는 ‘파괴왕’ 주호민처럼 그의 손이 닿는 족족 탈이 난 나의 물건들. 하지만 이젠 안다. 이 모든 일의 저변엔, 그 행동이 불러올 재앙을 미리 생각하지 않은 내 잘못이 크다는 걸. 선의에서 시작된 행동이 가끔은 많은 걸 파괴하기도 한다는 걸. A의 그 모든 행동은 빗물을 덜 고이게 하려는 소박한 바람에서, 또 강력한 소개팅에 대한 열망에서 나온 ‘선의’에서 시작됐을 것이다. 좀 귀찮더라도 내가 미리 타프를 쳐놨다면 어땠을까. 캠핑 전날 적당히 마셨다면 과연 차 키를 분실(했다고 생각)했을까. A가 내 타프를 찢어먹고, 차에 스크래치를 100만 개 냈더라도 어쨌든 검증되지 않은 ‘뒷골목 정비사’에게 물건을 맡긴 것은 최종 내 선택이다.


타인을 빌런으로 만들긴 쉽다. 그러나 내 안의 의존성이나 게으름 같은 숨은 빌런을 인정하긴 어렵다. 교훈1. 아무리 날씨가 맑아도 캠핑 타프는 미리미리 쳐 두자. 교훈2. 자동차 키는 정해둔 위치에서 되도록이면 옮기지 않는다. 교훈3. 병어회에 쿨일라 위스키는 재도전할 가치가 있다.

박찬은은 심리학을 전공했으며 캠핑과 스쿠버다이빙, 술을 사랑한다. 삐걱대는 무릎으로 오늘도 엎치락뒤치락 캠핑과 씨름하며 퇴사 욕구를 잠재우는 중이다. 그의 캠핑이 궁금하다면 인스타그램 @camping_cs을 따라가 보자.

📄 1일 3매 | 최갑수

내 기분이 세상의 기분

맛있는 음식을 드세요. 충분한 수면을 취하고, 아침에는 스트레칭을 하세요. 수채화나 피아노를 배워보는 것도 좋겠군요. 주말엔 산책을 하고, 가끔 백화점에 가서 자신만을 위한 걸 사세요. 가장 소중한 건 하루라는 일상입니다. 인생의 좋은 일은 이러는 와중에 일어나는 법이죠. 질투하지 말고, 아는 척하지 말고, 비꼬지 말고 서로 어울려서 즐겁게 지내세요. 내 기분이 곧 세상의 기분이거든요. 인생은 짧아요. 뭔가를 제대로 할 수 있는 건 고작 30년밖에 안 됩니다. 이걸 프린트해서 가지고 다니세요.

최갑수는 시인이자 여행작가자 편집자다. 쓴 책으로 『어제보다 나은 사람』 『음식은 맛있고 인생은 깊어갑니다』 등이 있다. 그의 인스타그램 @ssuchoi에 더 많은 이야기가 있다.

📎 Clip |  사는 동안에는


“언제 죽을지 모르지만, 지금은 살고 있다. 사는 동안은 살아가는 것 말고는 달리 없다. 산다는 건 무냐. 그래, 내일 아라이 씨네로 커다란 머위 뿌리를 나눠 받으러 가는 거다. 그래서 내년에 커다란 머위가 싹을 낼지 안 낼지 걱정하는 거다. 그리고 조금 큰 어린 꽃대가 나오면 기뻐하는 거다. 언제 죽어도 좋다. 하지만 오늘은 아니어도 괜찮다고 생각하며 살아간다."
- 사노 요코, 『어쩌면 좋아』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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