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책의 우연한 만남, 책짝꿍 구독자 여러분 반갑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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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이란 결국 내 삶의 목덜미에 맷돌처럼 매달린 사람들 아니던가?”


  『루시』와 『아이는 왜 폴렌타 속에서 끓는가』를 처음 꼽았을 때는 자전적 소설이자 어린 여자애의 시점으로 쓰인 이야기라는 공통점을 생각했어요. 다시 읽으며 무엇보다도 가족을 견디고 있는 여자 아이들의 이야기라는 점 때문에 제가 이 두 책을 좋아한다는 걸 생각했습니다.

  그러면서 이들이 왜 자전적 소설이라는 형식을 선택했을지 생각했어요. 에세이와 자전적 소설은 확실히 다른데, 독자의 읽기를 다른 방향으로 이끌기도 하겠지만 글쓰기를 다른 방향으로 이끄는 힘이 아마 더 클 것 같습니다. 자전적 소설로 분류된 책을 어떤 마음으로 읽으시나요? 저는 소설 속 ‘나’의 얼굴에 자연스럽게 작가의 얼굴을 넣어 읽으면서도 어느 문장들에서는 잠시 작가의 얼굴을 흐릿하게 만듭니다. 카메라 초점을 맞출 때 피사체가 흐릿하게 보였다 뚜렷하게 보였다 하는 것 같이요. 어떤 문장 뒤에 있는 작가의 얼굴은 뚜렷하고, 어떤 문장 뒤에 있는 작가 얼굴은 흐릿할 거라 상상해요. 마음대로 읽는다는 이야기이기도 한데, 자기 경험에 따라 쓴 글이더라도 작가가 이것에 소설이라는 이름을 붙였다는 걸 의식하는 것입니다. 자전적 소설을 작가의 삶과 무관하게 읽을 수는 없습니다. 킨케이드가 앤티가섬 출신의 흑인 여성이라는 점, 페터라니가 루마니아 출신이며 그녀의 가족이 서커스단으로 여러 나라를 돌아다녔다는 사실에 계속 주목하도록 만드는 힘이 작용합니다.

  언젠가 자전적 소설이라는 형식을 빌려 이야기를 쓰게 된다면 무엇을 의심하면서 쓰게 될까요. 에세이를 쓸 때는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그 경험을 이렇게 써도 되는 걸까, 그 일의 의미를 이렇게 정해버려도 되는 걸까, (일부러) 놓친 것은 없을까, 어떤 진실(그런 게 있다면)을 구석에 처박아버린 건 아닐까, 그 구석에 의식적으로 빛을 비추지 않으면서 사람들을 속이려 하진 않았을까. 소설이라면 조금 더 자유로울 수 있을까요? 모르겠습니다. 
『루시
저메이카 킨케이드지음, 정소영옮김, 문학동네

어머니는 종종 울면서 이런 말을 한다.
아직 내가 곁에 있는 걸 기쁘게 생각해라, 나중에 이 세상에서 혼자가 되고 나면 그게 얼마나 슬픈지 깨달을 날이 올 거다.
그렇다면 나는 나중을 기다려야 할 이유가 조금도 없다.


  ‘네 말이 무슨 뜻인지 정확히 알아!’라고 말하고 싶을 때가 있어요. 『루시』를 읽을 때 그렇게 말하고 싶은 유혹에 빠집니다. 루시가 이런 사람을 경멸하는 것을 알면서도요. 책짝꿍 3호 제목, “가족이란 결국 내 삶의 목덜미에 맷돌처럼 매달린 사람들 아니던가?”는 『루시』에서 가져왔습니다. 이 문장을 우연히 보고 『루시』를 처음 읽게 됐습니다. 목덜미의 맷돌이라니. 목덜미에 가볍게 올려놓을 수 있는 보석 목걸이도 아니고, 내 목을 댕강 썰어 순식간에 삶을 끝내버리는 것도 아닌, 내 목에 무겁게 매달려 목덜미가 가벼웠던 때를 떠올릴 수 없게 만드는. (어떤) 가족에 대한 적절한 묘사라고 생각했습니다.

  『루시』는 킨케이드가 17살에 미국 뉴욕으로 가 입주 보모로 지낸 1년간의 경험을 담은 자전적 소설입니다. 루시는 머라이어라는 이름을 가진 여성의 집에 들어가 네 아이를 돌봅니다. 머라이어는 부유한 백인이고 상냥합니다. 루시에게도 삶이 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는 부류의 고용주입니다. 머라이어는 작은 동물과 식물의 생명에 쉽게 감동하는 심성 고운 사람입니다. 루시는 머라이어를 좋아합니다. 머라이어를 고통스럽게 하는 머라이어의 남편 루이스를 경멸합니다. 루시는 머라이어가 "아름다운 꽃을 보는 그곳에서 비통함과 원한만을 본다”고 말합니다. 루시는 머라이어처럼 “눈앞에서 진행되는 세상의 피폐화와 자신들의 안락한 삶을 연결시키지 못하는”, 선량하지만 자기들만의 손바닥만 한 세상에 사는 사람들의 속내를 훤히 봅니다. 그럼에도 머라이어를 좋아하니 좋아하는 것입니다. “루이스가 매일 주식거래인과 나누는 대화를 잘 따져봐라, 그것이 당신의 눈앞에서 영원히 사라져가는 것들과 관계가 있지 않겠냐, 그런 말은 차마 할 수 없었다. 평소라면 내가 즐겨할 법한 말이었는데, 내가 그렇게나 머라이어를 좋아하게 된 것이다”라고 말할 정도로요.

  머라이어 집에서 시작한 미국 생활에 큰 어려움은 없어 보이지만 루시는 엄마에게서 온 편지를 절대 뜯지 않습니다. 여기가 엄마로부터 도망쳐 도착한 곳임을 떠올리게 만듭니다. 편지는 계속 오고 루시는 뜯지 않습니다. 뜯지 않은 편지가 쌓일 때마다 제 숨이 막히는 것 같습니다. 루시가 태어나 자란 곳은 “자전축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는 곳”으로 “해가 쨍쨍하고 가뭄에 시달리는 단 하나의 계절만 있는 곳”입니다. 루시는 “잘사는(그러니까 분명 행복한) 사람들은 일 년 삼백육십오 일이 뚜렷한 네 계절로 나뉘는 지역에 산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루시가 언제나 떠나고 싶었던 곳은 단 하나의 계절만 있는 섬, 그리고 엄마입니다. 

  루시는 엄마를 경멸합니다. “나의 필요가 자신의 바람보다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결코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내 생에 일어날 거라 생각하지 못했던 대단한 경험을 만나도 루시는 그다지 대단함을 느끼지 못합니다. 루시는 친구가 동네 아저씨로부터 성폭력을 당하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됩니다. 이때 루시의 여러 감정 중 가장 압도적인 것은 질투심입니다. “토머스 씨는 몰래 만나서 자기 가운뎃손가락을 집어 넣을 사람으로 왜 내가 아니라 쟤를 고른 거지?” 이번에도 흥미롭고 대단한 경험은 루시를 피해 갑니다. 루시는 엄마를 사랑합니다. 그리고 “사랑해서 죽을 수도 있을 만큼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문장을 쓰고 하염없이 울었습니다.
『아이는 왜 폴렌타 속에서 끓는가
아글라야 페터라니 지음, 배수아 옮김, 워크룸프레스

나는 어머니의 눈을 내 눈 속에 집어넣고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어머니의 얼굴은 시계의 숫자판이었다.
시곗바늘이 살을 파고들어 회전하며 피부를 작은 조각들로 베어 냈다.


  루시와 대화하면 단박에 그녀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이는 왜 폴렌타 속에서 끓는가』에 나오는 ‘나’의 말은 그보다 조금 어렵습니다. 어려운 단어를 쓰거나 문장 구조가 복잡해서는 아닙니다. ‘나’는 여러 언어로 자신을 표현할 줄 압니다. 여러 번 떠났기 때문입니다. 이 책을 번역한 배수아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페터라니의 글은 두 번의 탈출에서 나온다. 첫 번째는 국가라는 감옥에서의 탈출, 두 번째는 가족이라는 게토에서 자신의 삶을 향한 탈출.”, “다수의 언어로 발화되는 소수의 언어.”

  ‘나’의 가족은 서커스를 합니다. '배 속에서부터 가난과 부모의 근심을 겪은 아이들이 늙은 채 태어나는' 루마니아를 떠나왔습니다. 어머니가 호텔 욕조에서 닭을 도살합니다. “도살될 때 닭은 요란하게 국제적인 비명을 지르며, 우리는 어디서나 그 의미를 이해”합니다. 곡예사 어머니는 머리카락으로 공중에 매달립니다. 나도 자라면 머리카락으로 매달려야 합니다. 그래서 어머니는 머리카락이 중요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엉덩이가 중요하다고 합니다. 나는 무엇이 중요한지 알지 못합니다.

  “외국에서 우리 가족은 유리처럼 산산이 부서졌다”. 페터라니는 충분히 말하는 작가는 아닙니다. 부서진 유리의 파편은 서커스장에, 병원에, 학교에 있습니다. 루마니아에서 온 이민자 가족이 무엇을 감당하고 있는지 뚜렷하게 알 수는 없습니다. “여기는 개가 사람보다 더 소중한 나라야! 상점 선반에 개사료가 가득하다고 가족에게 편지를 쓰면, 다들 내가 드디어 미쳐 버렸다고 생각하겠지! 이 나라 욕실에서는 어디든 따뜻한 물이 나오고, 사람들 가슴에는 냉장고가 들어 있어!”라는 말을 듣는 곳임을 알 수 있을 뿐입니다.

  '나'는 이 모든 상황을 지켜봅니다. 온몸에서 등이 자라나는 아버지, 때때로 남자들 앞에서 내 언니인 척하는 어머니, 소 물통의 물을 마시고 머리카락을 한 움큼 뽑는 언니, 죽은 자들과 대화하는 이모, 우리가 이미 무엇을 아는지 모르는 선생님, 정액을 먹으라고 말하는 늙은 남자, 바닥에 오줌을 누는 나의 인형 안두자를요. 그러면서 “나는 산산이 부서져 내리는 느낌이 든다”고 씁니다. 우리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이 책에 ‘자전적 소설’이라는 분류가 붙었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읽기는 작가의 경험을 충분히 아는 것으로 이어지지 않습니다. 추정과 잠정이 있습니다.

  이 책을 주변에 여러 번 이야기했습니다. 너무 좋다고요. 그런데 왜 좋은지는 늘 잘 설명하지 못했습니다. 이번에도 그런 것 같습니다. 책의 편집자는 이렇게 씁니다. “이야기가 최소한의 말들을 징검돌 삼아 뛴다”고요. 읽을 때마다 다른 순서와 모양으로 징검돌을 밟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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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짝꿍 4호에서 소개할 책은 『나와 타인을 번역한다는 것』, 『번역과 폭력』입니다. 다음 달에 또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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