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1. 내 방에서는 하지 않는 일

안녕 결, 민경이야.


나는 6평 방에 살고 있어.

침대 옆에 흰 책상이 꼭 붙어 있고, 그 옆에는 옷장, 그 바로 옆에는 냉장고가 있지.

창이 서쪽을 향해 나 있어서, 맑은 날 오후부터는 볕이 방에 오래 머물러.

구석구석 빠지는 곳 없이 환하게.


나는 이 방에서,

글을 쓰는 책상에서 밥도 먹고, 공부도 하고, 넷플릭스도 봐.

요가를 하려면 건조대를 접어야 하고, 친구가 와서 자고 가는 날이면 의자를 현관문까지 끌어다 놓아야 하지.

조금 번거롭긴 하지만 그래도 이 작은 방에서 하지 못 할 일은 거의 없어.


그런데 한 가지.

내가 이 방에서 하지 않는 일이 있어.

그건 바로 버거운 감정과 생각을 소화시키는 일이야.


이곳은 무언갈 숨길 여유가 있는 공간이 아니라서, 적나라해서.

그런 것들을 이 방에서 처리했다가는 오래 그 흔적에 괴롭기 때문이야.


그래서 어려운 생각과 감정이 들어차는 날이면 바로 방으로 돌아오지 않고, 동네의 작은 놀이터에 들르곤 해.


그곳 벤치에 앉아 감정과 생각이 활기를 잃길 기다려.

조곤조곤 그것들을 따져보기도 하고, 휴대폰을 붙들고 글을 쓰기도 해.

여의치 않으면 그냥 그대로 그곳에 두고 오기도 하고.


그런 후 방으로 돌아오면, 여전히 내 방은 안전해.


어떤 생각과 마음을 그곳에 풀어놨든,

다음날이 되면 놀이터는 언제나 같은 표정으로 거기에 있어.

물리적으로 너른 공간은 아니지만, 그럴 때면 그 공간이 무한하게 느껴져.

그 점이 위안이 돼.


너무 기쁜 일이 있었던 날.

너무 힘든 일이 있었던 날.

어려운 말을 전해야 할 때.

어려운 말을 들어야 할 때.

감정이 휘몰아칠 때.

생각의 늪에 빠질 때.


나는 놀이터에 가.

위안을 받아보려고, 작은 방을 내 생각과 감정으로부터 지켜내려고.


결, 너에게도 위안이 되어주는 공간이 있니?


*


요즘에는 특히 더 놀이터에 자주 들르고 있어.

요즘 나의 방은 공부하는 공간으로 주로 기능하고 있어서, 다른 자극은 줄여주어야 하거든.


하지만 마음을 움직이는 일은 매일같이 일어나고, 그래서 놀이터에서 마음껏 기뻐하고 또 슬퍼한 후에 방으로 돌아와 소화된 마음들은 일기장에 넣어두고, 공부를 하고 있어.


놀이터에게 더욱 고마운 요즘이야.


*


곧 피어날 꽃들을 기다리고 있어.

특히 밤산책 길에 마주할 흰 목련을.


따듯해지는 날씨 속에서 이번 한 주도 편안히 지내길 바랄게.



2023.03.05. 민경

추신. 어제 오랜만에 노을을 보러 한강에 다녀왔어. 나누고 싶은 풍경이라서, 함께 보낼게:) 
답장은 여기로 보내주면 돼,
보내준 답장은 우리 모두 볼 수 있다는 점 기억해줘.
모두들 너의 마음을 궁금해하고 있으니까.
#49-2. 지난주에 받은 답장을 나눌게. 참여하고 싶은 모임에 대해 물었어. 
"ai는 감히 접근 못할 영역이므로"

공연장 근무를 마치고 나서다가 시내 한 복판을 가로질러 날아가고 있는 물동이를 매단 헬기를 보았다. 그리고 얼마 있다가 앞산에 불이 났으니 인근 주민은 주의하라는 안전 문자를 받았다. 가슴이 덜커덩 내려 앉는다. 최근 오 년 가까이를 빼곡이 내 발자국을 새겨 넣었던 산에 불이 나다니! 건조주의보에, 산불 조심은 남의 나라 이야기인줄 알았더니… 다행히 4시간을 넘겨 진화되었고 하룻밤을 넘겨 오늘 아침에는 잔 불 진화를 위해 투입된 헬기의 두두두두 소리가 요란하다.

낮잠을 밤잠처럼 자고도 또 실컷 잠을 자던 내게 최근 비상이 걸렸다. 말로만 듣던 불면증을 겪고 있기 때문이다. 뜬 눈으로 밤을 지내기도 하다가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어서 이른 저녁 식사 후에 가벼운 산행을 하기 시작했다. 야간 산행이 숙면에 도움을 준다고 누군가에게서 얼핏 들었는데 정말 그런 것 같다. 앞산 전망대로 가는 코스는 야간 산행을 즐길 수 있도록 잘 정비가 되어 있다. 주말이 다가오는 목요일, 금요일에는 산행을 즐기는 직장인들과 동호회 사람들로 시끌벅적하다. 하루는 네, 다섯 명 그룹의 어떤 이가 정상에 도착하면 컵라면을 먹자는 이야기를 하길래 나도 저 그룹의 멤버이면 좋겠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겠다 하면서도 늘 이런 저런 모임을 꾸리기도 하고 모임의 일원이기도 하였다. 온라인 스터디 모임의 일원이었다가 모임의 리더를 한 적도 있었다. 그 때를 생각하면 참 좋았다 만연이 피어오르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겠다. 그 때는 첫째로 젊었고 그래서 그 시절을 떠올리자면 팔팔했던 내 모습이 떠올라 좋다. 그리고 함께 했던 사람들, 온라인으로 만나 오프로 그리고 지금까지 여전히, 비록 연락을 주고 받고 있지는 않지만 여전히 언제라도 회쳐 모여 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몽글 몽글 추억이 떠오르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동네 아지매들과 함께 노래 부르던 모임의 일원이기도 했다. 합창곡을 듣는 것과 합창곡을 만들어 내는 일원으로 무대에 서 있는 것은 단원이 되어 보지 못한 사람은 절대로 맛보지 못할 차이가 있다. 다 늙은 아지매들이 드레스를 입고 빼딱 구두를 신고 잘난 체 잰다고 먼 발치에서 생각하겠지만 나는 노래 부르는, 이왕이면 함께 화음을 만들어 가며 노래하는 모임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생각한다. ai는 감히 접근 못할 영역이므로,

오늘 공연장 근무를 하면서 보니까 로비 층 카페에 똑 같은 색상의 후드 티를 입은 팬클럽 회원들이 들락 날락거린다. 오늘 무슨 행사 있었나요? 물어 보니 영화를 보고 왔다고 했다. 좋아하는 팬이 있고 똑 같은 마음으로 그 팬을 좋아하는 멤버들이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고 행사에 참석하면 어떤 느낌일까? 나도 몋 몇 팬클럽 카페에 가입은 되어 있지만 한번도 오프라인 모임에 가 본 적은 없기 때문에 궁금하다.

오 년 이상 노인 돌보는 일을 해 오면서 다양한 형태의 노후의 삶을 보아왔다. 내가 내린 결론은 노년에는 많은 것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 (팔 십 세가 되면 돈이 많이 있으나 없으나 똑같다고 우스개로 말하지만 진짜 그런 것 같아. 물론 의료비는 예외 사항이겠지만) 그리고 극단의 외로움을 겪는다는 것. 단디 노년을 준비해야겠어.
*
건조한 날씨 속에 화재 소식이 잦아지고 있어.

요 며칠, 출동하는 소방차를 보며 마음이 덜컥 내려앉곤 했어. 그런데 네가 아끼는 산에 불이 났다니 상심이 컸을 것 같아. 시간이 걸리겠지만, 그래도 앞산이 서서히 회복될 수 있기를 바랄게.

다시 한 발자국 한 발자국 새겨 넣으며.


등산 모임, 스터디 모임, 합창단, 팬클럽까지.

옆에서 지켜보거나 직접 해보았던 모임들을 알려주어 고마워. 전부 내게는 낯선 것들이어서 흥미롭게 읽어 내려갔어. ai가 접근하지 못할 영역이라는 의견도 재미있었어.


많은 것이 필요하지 않은 시기, 그리고 극단의 외로움을 겪는 시기를 어떻게 준비할 수 있을까? 나도 앞으로 계속 고민해 보아야겠어.


*이 편지를 전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이곳 주소를 통해 전해줘
*혹시 편지를 그만 받아보고 싶다면, 여기를 눌러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