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에 임진강이 내려다보이는 카페에서 회의를 했다. 회의하는 내내 오른쪽 어금니가 욱신거렸다. 임진강은 뿌연 안개 속을 흐르고 있었다.
회의를 마치고 다음 달에 나올 새 책 교정을 보다가 어느 남미 작가의 소설을 읽었다. 소설을 읽다가 아주 오랜만에 연락이 닿은 후배와 통화를 했다. 통화를 마치고 사무실로 돌아가는 길, 십몇 년 전인가, 소설을 쓰고 싶다는 그의 전화를 받은 적이 있다는 게 기억 났다. 그에게 뭐라고 답했는지 생각나지 않았다. 아마 열심히 써보라고, 하다 보면 쓸 수 있을 거라고 하지 않았을까.
사무실에서 지난달 거래처 정산을 하고 치과에 갔다. “아이고, 감독님, 오랜만에 오셨네요.” 예전에 촬영 때문에 예약을 바꾸고 싶다고 했는데, 그 이후부터 원장은 나를 감독님이라고 부른다. “치과는 언제나 다 망가지고 나서야 오는 거 같아요.”
이를 뺐다. 뿌리가 부러져 있다고 했다. “예전에 신경치료 했던 거라, 아프지 않으셨을 수도 있어요.” 그렇군. 이젠 신경이 무뎌져서 웬만큼 부러진 건 그냥 모른 척하고 몸에 지닌 채 살아가는 모양이다. 이가 빠진 자리에 거즈를 대고 꽉 물었다. 간호사가 두 시간 동안 그러고 있으라고 해서 휴대폰 타이머를 두 시간 후로 맞췄다. 수납을 기다리는 동안 페이스북에 “이를 빼고 나니 앓던 이가 빠진 기분이다”라는 시시껄렁한 말을 써댔다.
사무실에 돌아가기도, 집으로 가기도 애매한 시간이었다. 차를 몰고 자유로를 달렸다. 해는 11시 방향, 30도 정도로 기울고 있었다. 거즈에서는 피가 배어 나오는 듯했다. 뱉지 말고 삼키라는 간호사의 말이 기억났다.
임진각 공원에는 반팔 티셔츠와 반바지를 입은 사람들이 많았다. 어느새 꽃은 졌고 봄은 가고 있구나. 살아가면서 우리는 인생에게, 서로에게, 스스로에게 점점 무뎌지겠지. 기억은 안개 속을 흐르는 강물처럼 어렴풋해지고 희미해지겠지. 계절과 인연은 타이머를 맞춰 놓은 듯 어김이 없어서, 가야 할 것들은 어떻게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가버리는구나. 세상은 이토록 당연한 사실로만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 앞에서, 나는 무슨 대단한 비밀이라도 알게 된 것처럼 약간은 시무룩한 마음이 되었다.
해 지는 자유로를 따라 집으로 돌아왔다. 배가 고파 편의점으로 들어가 점원에게 “일회용 죽이 어디 있어요?” 하고 물었다. 휴대폰을 보고 있던 점원은 오른쪽 끝을 가리켰다. 야채죽 하나와 무알코올 맥주 한 캔을 샀다. 계산을 하고 나오며 점원에게 ‘일회용 죽’이라고 했다는 걸 깨달았고 거즈가 빠질까봐 이를 깨물었다.
십몇 년 전에 나는 무엇을 하고 싶었을까, 기억나지 않았다. 지금처럼 글을 쓰고 살고 싶진 않았다는 건 분명한데, 결국 지금처럼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들도 다들 그렇게 살고 있을까, 그럴까? 세상은 당연한데, 사는 덴 왜 당연한 일이 하나도 없는 걸까. 서쪽에서 번져 온 빛이 발등 위에 엽서처럼 머물고 있었다. 지금 이 빛 속, 가만히 멈춰 서 있는 모든 것들의 이마에 입술을 대고 싶은 저녁이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