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쾌한 걸작, ⟪베이비 레인디어⟫에 대하여
Zoe "범죄물/스릴러 매니아입니다."

여러분, 혹시 넷플릭스 시리즈 《베이비 레인디어(Baby Reindeer)》 보셨나요? 무명 코미디언 '도니'의 삶에 어느 날 갑자기 '마사'라는 여성 스토커가 나타나며 생기는 일련의 사건들을 다룬 작품인데요. 대략 30분 안팎의 총 7개 에피소드로 구성된 이 드라마는 지난 4월 11일 첫 공개 이후 누적 시청 시간 1억 5,060만 시간, 누적 시청수 3,790만 회를 기록하며 현재 넷플릭스 글로벌 TV부문 1위에 랭크되어 있습니다. 로튼토마토 신선도 지수는 평론가 98%, 시청자 83%를 기록하며 해외에서는 평론가와 일반 시청자 모두를 사로잡은 시리즈라는 평가를 받고 있죠. 그렇지만 한국 넷플릭스 순위에서는 아직 7위에 머무르며 국내 시청자들에게는 큰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마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방식이나 소재 자체가 국내 시청자들에게 어필하기 어려운 '문제작'이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드는데요. 오늘은 이 작품에 대해 깊게 다루며, 그럼에도 왜 한번쯤 볼만한지에 대해 풀어나가보려 합니다.


오늘 레터에는 줄거리에 대한 스포일러가 등장합니다. 스포일러를 원치 않는 분이라면 일단 드라마를 먼저 보신 후 레터를 읽기를 추천합니다. 다만 시청하면서 불편한 장면을 마주하게 될 수 있으니, 그 점은 유의해주세요. 

Baby Reindeer 포스터 © Netflix
1. 스토커와 피해자: 둘 사이의 모호한 관계
2. '피해자다움’이란 무엇인가
3. 싸울게요, 안 죽었으니까
4. 자기혐오의 늪에 대한 솔직한 고백

👁️‍🗨️ 스토커와 피해자: 둘 사이의 모호한 관계

어느 날 런던의 한 펍에 우울한 표정을 한 여성이 찾아옵니다. 차 한 잔 사 마실 돈도 없다는 여자에게 바텐더는 측은한 마음으로 공짜 차 한잔을 내줍니다. 그 차 한 잔 때문에 앞으로 몇 년 간 스토킹에 시달리게 될 지 전혀 모른 채 말이죠. 그리고 놀랍게도 이건 픽션이 아니라, 실화입니다. 

베이비 레인디어 공식 예고편 © Netflix Youtube

앞서 설명드린 내용은 《베이비 레인디어》의 간략한 줄거리인데요. 스토킹 피해자가 된 무명 코미디언 '도니 던'이 어떤 피해를 받으며 어떤 감정을 겪게 되는지 전 과정을 담고 있습니다. 제목인 '베이비 레인디어(Baby Reindeer)’는 '아기 순록'이라는 뜻으로, 스토커 마사가 도니를 부르던 별명 중 하나입니다. 


여기까지만 듣는다면 아마 1990년 방영된 《미저리(Misery)》를 떠올리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스토킹의 대명사가 된 영화 《미저리》는 인기 소설가에게 광적으로 집착하는 한 여자의 범죄 행각을 그린 스릴러물이죠. 소설가에게 집착하던 광팬이 어느날 그를 납치해 감금하면서 소설 내용에 집착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는데요. 영화 속에서 악인으로 등장하는 여자를 두려워하며 공포의 대상으로 여기는 남자 주인공의 모습이 강조되며, 관객으로 하여금 두려움과 공포를 함께 느끼게 하는 작품입니다. 


그런데 이 시리즈는 《미저리》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갑니다. 원래라면 스토커를 두려워하고 피하는 게 '정상'일테죠. 그런데 주인공 도니는 매일같이 펍으로 찾아오는 정체 모를 이 여자, 마사가 던지는 찬사를 때로 즐기기도 합니다. 때로는 그녀의 농담을 받아주고, 플러팅으로 들릴 수 있는 친절한 멘트를 하기도 하죠. 자신의 시덥잖은 농담에 이상한 소리를 내며 엄청나게 크게 웃어주는 그녀의 태도에 알 수 없는 희열을 느낄 때도 있습니다. 이 여자가 불편하지만 또 불쌍하고, 맹목적인 그녀의 찬사가 고맙지만 또 두려운 감정. 그는 스스로도 알 수 없는 상태에 이르러 마사의 스토킹이 점차 심해지도록 '내버려' 둡니다. 

도니(왼쪽)가 일하는 펍에 찾아온 마사(오른쪽) © Netflix

스토킹이 점점 심각해져 주변 사람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치게 되자, 도니는 경찰에 드디어 신고를 하기로 마음먹습니다. 그가 내민 이메일과 문자를 보고 경찰이 왜 그동안 신고하지 않았냐고 묻자, 도니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 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고야 말죠. 그리고 경찰은 말합니다. “피해가 심각해보이지 않는데요. 더 명확한 증거를 가지고 다시 찾아오세요.” 


드라마를 보는 시청자는 당연히 어리둥절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주인공은 왜 스토커를 내버려두지? 경찰은 또 왜 저렇지? 주인공은 왜 저렇게 안일한 대처를 하지?’와 같은 답답한 마음이 들기도 하죠. 이외에도 트랜스젠더인 여자친구와의 복잡한 관계에 더해, 부모님과의 이야기가 얽혀 드라마는 점점 더 클라이맥스를 향해 갑니다.


작품 후반에 이르면 그의 트라우마와 불안정함의 원인이 된 사건이 등장하면서 주인공 도니를 아주 조금은 이해하게 되지만, 결말에 이르러도 어쩐지 개운하게 사건이 해결되진 않습니다. 오히려 찝찝하고, 아주 불쾌한 결말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죠. 어쩌면 현실과 비슷한, 아니 현실보다 더 현실 같아서 드라마에서 보기를 원치 않았던 결말입니다. 

🤐 '피해자다움'이란 무엇인가

각본, 제작, 주연을 모두 맡은 코미디언 리처드 개드는 이 작품이 일반적인 피해자의 이야기로 비춰지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입장을 밝힌 바 있습니다. 다수의 인터뷰를 통해 도니가 처음에 마사에게 차 한잔을 공짜로 내어준 것을 '실수'였다고 말하기도 했죠. 이 작품을 보며 시청자는 처음에 마사를 불쌍하게 여기다가, 갑자기 어느 순간 도니를 불쌍하게 여기다가, 다시 또 마사가 불쌍해졌다가, 어느 순간 도니도 마사도 싫어하게 될 것이라고 언급하기도 했습니다. 

시리즈 안에서 마사가 도니에게 지속적으로 보내는 이메일 내용들. © Netflix

실제로 작품을 보다 보면 그 모호한 경계선이 불쾌하게 느껴지는 지경에 이르게 됩니다. 마사가 극단적 행동을 하도록 내버려 두거나, 때때로 그런 행동을 유도하기도 하는 도니를 보면서 도대체 어떤 감정을 느껴야 할지도 모르겠다 싶어지기도 하죠. 이해할 수 없는 일련의 행동이 깊은 자기혐오와 지속적인 학대 때문이라는 걸 이해할 때쯤이면, 이미 결말까지 다 본 이후일 겁니다. 어쩌면 도니의 행동이 쉽게 이해되지 않는 건 우리의 머리속에 존재하는 '피해자다움'과 작품 초반 묘사되는 도니의 모습이 거리가 멀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피해자라면 스토킹을 하는 상대에게 명확하게 거절 의사를 표시하고, 두려움과 불쾌감만을 내비치면서 가해자와 거리를 두어야 한다'는 생각이 기저에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온라인 스토킹 가해자 특성을 분석한 2021년 조사에 따르면 피해자의 34.4%가 본인의 친구나 가족, 연인 등으로부터 스토킹 피해를 당했다고 하는데요. 이처럼 가까운 사람들로부터 스토킹 피해를 당할 때, 과연 불쾌감만 일관되게 표현하는 게 가능할까요? 어느 순간엔 도니처럼 상대에게 연민을 갖기도 하고, 어느 순간엔 도니처럼 상대를 혐오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그 모든 감정이 뒤섞여 역으로 스스로에 대한 혐오로 찾아오기도 하고, 불면증에 시달리다 위험한 행동을 하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죠. 

리처드 개드는 인터뷰를 통해 마사를 '괴물'로 묘사하고 싶지는 않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 Netflix

이 시리즈는 제작자이자 각본가이며, 주인공 '도니'로 연기를 하기도 한 코미디언 리처드 개드의 실화를 기본으로 한 작품인데요. 실제로 20대 초반 개드는 4년 반이라는 긴 시간에 걸쳐 스토커로부터 41,071건의 이메일, 350시간 분량의 음성 메일, 744개의 트윗, 46개의 페이스북 메시지, 106페이지 분량의 편지, 그리고 갖가지 이상한 선물을 받았다고 합니다.


리처드 개드는 이 경험을 바탕으로 원맨쇼 코메디 각본을 짰고, 해당 작품을 '베이비 레인디어’라는 제목으로 2019 에든버러 프린지 페스티벌에서 공개해 세간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가 20대에 겪었던 성폭력 실화를 기반으로 직접 만들었던 'Monkey See, Monkey Do’라는 또다른 작품과 섞어, 지금의 《베이비 레인디어》를 만들어냈습니다. 


그는 다수의 인터뷰를 통해 드라마 속에 묘사된 구체적인 에피소드 중 상당수가 본인의 실화에 기반하고 있다고 얘기하기도 했습니다. 작품 속에서 마사가 보내는 이메일의 내용은 모두 그가 실제 스토커로부터 받은 이메일의 내용에 기초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일련의 사건을 겪는 동안 주인공 도니가 보여주는 감정의 흐름은 그가 실제 겪은 감정에 기반하고 있다고 하죠. 개드는 피해자이지만 동시에 가해자에 대한 연민을 여전히 갖고 있고, 그걸 작품 속에 녹이려고 했다는 점이 독특한 지점입니다. 인터뷰를 통해 그는 "마사는 범죄자라기보다는 정신질환을 가진 사람이기 때문에, 그녀를 괴물로 묘사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사회 시스템의 실패가 낳은 결과물에 가깝다"고 밝히기도 할 정도였죠. 그리고 그의 이런 태도는 일반적인 '피해자다움'과 먼 지점이기도 합니다. 


《베이비 레인디어》는 이 부분과 관련된 화두를 던진다는 점에서 꼭 한번쯤 시청해볼 만한 가치를 가진 작품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피해자가 어떻게 저럴 수 있지’라는 생각 자체를 부숴버릴 수 있는 시리즈이기 때문인데요. 사건마다 피해자가 겪는 감정은 서로 다를 수 있고, 그 감정의 형태가 분노, 우울, 슬픔, 연민 등 어느 쪽이든 우리가 직접적으로 재단할 수 없다는 점에서 불편한 진실을 맞닥뜨리는 기분이라고 할까요. 사건을 겪는 과정에서 피해자가 느낀 감정을 개드처럼 용감하게 풀어낸다면, 사회의 잣대를 들이대는 대신 공감과 연민을 보내주는 것이 맞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 싸울게요, 안 죽었으니까

여기 또 다른 방식으로 '피해자다움'을 온몸으로 거부한 사례도 있습니다. 바로 지난 2022년 발생했던 이른바 부산 돌려차기 사건의 피해자 김진주 씨입니다. 부산 돌려차기 사건은 30대 남성 이모씨가 새벽에 홀로 귀가하던 김씨를 성폭행할 목적으로 10여분 간 쫓아간 뒤 오피스텔 공동 현관에서 발로 차며 무차별 폭행한 사건입니다. 이 사건으로 가해자는 강간 살인 미수 혐의(성폭력처벌법 위반)로 징역 20년을 선고받아 복역 중입니다.


김진주씨는 일면식도 없던 남자에게 이유 없이 뒤에서 돌려차기를 당하고 수차례 짓밟힌 채 버려져 전신마비를 겪었으나, 2주 만에 기적처럼 회복한 이후 가해자를 벌하기 위해 법정 투쟁을 벌여야 했습니다. 여러 자료를 모아 '그것이 알고싶다'에 직접 사건 제보를 하기도 하고, 부산 돌려차기라는 이름의 네이밍도 직접 붙여서 사람들이 사건을 쉽게 잊지 못하게 했죠. 덕분에 사건이 '그것이 알고싶다'를 통해 보도되어 가해자에 대한 사회적 공분을 일으키기도 했습니다. 

부산 돌려차기 사건 피해자가 직접 출연한 그알저알 콘텐츠 © 그것이 알고싶다 유튜브

지난 3월 유튜브 그알저알 콘텐츠에 직접 출연한 김진주 씨는 법정에 화려한 옷을 입고 출석했던 때의 경험을 나누었는데요. 당시 '그것이 알고싶다' 담당 PD가 말하길, 그전까지 법정 안의 '피해자'를 떠올리면 우울하고 쳐져 있는 모습을 많이 생각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김진주 씨가 출석했을 때는 법정 안에 있는 사람들 중 가장 화려한 옷을 입고 등장해서 굉장히 놀라웠다고 해요. 김진주 씨는 이때 화려한 옷을 입고 법정에 출석함으로써 '가해자는 (구속되어) 죄수복을 입고 있지만, 나에게는 패션의 자유가 있다는 것을 (가해자에게) 알려주고 싶었다'고 하는데요. 또 가장 당당하고 멋진 피해자가 되고 싶었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그녀는 부산 돌려차기 사건을 겪은 이후 사법 체계 개선과 범죄 피해자 지원을 위해 다양한 활동에 참여하고 있으며, 이 경험들을 바탕으로 올해 2월 《싸울게요, 안 죽었으니까》라는 제목의 책까지 출간했습니다. 

실제 사건 피해자의 경험을 생생하게 담아낸 책 《싸울게요, 안 죽었으니까》 © 얼룩소alookso

김진주씨는 다양한 활동을 통해 범죄 피해자들에게 '숨지 말고 싸우자'라는 메시지를 일관되게 전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사회가 어떤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개선의 목소리를 내고 있죠. 한겨레와의 인터뷰를 통해 책을 내기 위해 범죄 피해자 및 가족 100여명을 직접 만났다고 밝히기도 했는데요. “피해자가 수사 단계나 재판 단계에서 어떤 지원을 받아야 하는지, 어떤 걸 해야 하는지 등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고 있다”며 범죄 피해에 대해 일목요연하게 순서대로 느낄 수 있는 내용을 다뤄 실제 피해자는 물론이고 피해를 당하지 않은 사람들도 예방주사처럼 미리 알 수 있도록 내용을 구성했다고 합니다.


이외에도 그녀는 온라인 카페 운영, 유튜브 채널 개설 등 다양한 창구를 통해 목소리를 내고 있습니다. 적극적으로 피해자 구제에 나서 범죄 피해자가 숨어 살지 않는 사회를 만들고 싶다는 게 김진주씨의 포부이기도 합니다. 

💊 자기혐오의 늪에 대한 솔직한 고백

*이 부분부터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다시 《베이비 레인디어》로 돌아와볼까요. 이 작품은 사실 김진주씨의 사례처럼 희망적이거나, 당당한 결말로 끝맺지는 못합니다. 오히려 피폐해진 피해자의 감정선을 적나라하게 따라가며 일련의 범죄들이 피해자의 일상을 어떻게 파괴하는지를 불쾌할 정도로 디테일하게 묘사하죠. 그리고 스토킹이라는 범죄를 방치하는 주인공의 심리 기저에 어떤 트라우마가 있는지도 상세하게 보여줍니다. 그걸 묘사하기 위해 범죄 피해를 겪는 과정까지 적나라하게 그리고 있어, 보는 이에게 불쾌감을 넘어 트라우마를 심어줄 수도 있다는 비판이 이어질 정도입니다. 

 © Netflix

작품의 후반부에 이르러, 플래시백 형태로 도니에게 트라우마로 자리잡은 사건에 대한 묘사가 등장하는데요. 도니는 코미디언이 되고 싶은 꿈을 꾸던 20대 초반, 에든버러 프린지 페스티벌에서 우연히 한 유명 각본가 대런을 만나 서서히 그루밍을 당하게 됩니다. 유명 각본가이자 제작자인 대런은 출세를 미끼로 도니를 꼬드겨 그의 영향력 아래로 끌어들이죠. 도니는 그의 집에서 그가 권한 갖가지 마약에 무방비하게 노출되고, 마약에 취해 정신이 혼미해진 사이 성폭행을 당하기까지 합니다. 


처음 피해를 당한 뒤에도 도니는 대런이 쥐어줄 장밋빛 미래에 대한 일말의 희망을 놓지 못하고 계속해서 그를 찾아가는데요. 스스로를 이성애자라고 생각하고 있던 도니는 이 관계 때문에 거의 모든 것을 파괴당합니다. 남성성(masculinity)을 위협받고, 폭력의 희생자가 된 스스로를 불쌍해하다가, 그럼에도 또 그에게 찾아가는 스스로를 혐오하면서도 어쩌지 못합니다. 그렇게 그는 천천히 붕괴되어 가죠. 심적으로도 신체적으로도, 또 커리어 측면으로도 도니는 파괴되어 갑니다. 이 과정에서 우연히 만나게 된 마사는 도니가 가장 원하고 있던 칭찬을 아낌없이 해주는 존재가 되어버리죠. 때문에 마사가 스토킹을 하는 와중에도 도니는 그녀에게 때때로 친절을 베풀기도 하고, 그녀의 집 앞에 찾아가는 '실수’를 하기도 합니다.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 결국 마사가 실형을 살게 된 이후, 도니는 혼자 남겨진 듯한 외로움을 느끼다 성폭행 가해자인 대런의 집에 찾아가 그를 대면하는데요. 대런과 싸우는 등의 방식으로 격한 대립을 보여줄 것이라고 기대했던 시청자의 기대를 무참히 깨부숴버리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도니가 대런으로부터 새 쇼에서 일하자는 제안을 받아들이는 장면에 이르면 혼란은 극에 달하죠. 리처드 개드는 GQ와의 인터뷰를 통해 이 작품의 결말은 이전에 그려지지 않았던 학대의 한 모습을 묘사하는 방식이었다고 밝히면서, “불행하게도 학대를 당한 사람 중 상당수가 그 과정에서 부정적인 형태의 애착을 형성하게 되고, 때문에 학대자를 ‘필요’하다고 느끼는 경향이 있다”고 언급하기도 했습니다. 

"학대는 흔적을 남긴다. 특히 이런 반복적인 약속을 동반한 학대는 더욱 그렇다. 

Abuse leaves an imprint. Especially abuse like this where it’s repeated with promises."

- 리처드 개드(Richard Gadd)

누군가를 향한 학대와 스토킹은 지금 이 시간에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시리즈가 공개된 이후 팬들이 누가 성폭행범인지, 누가 스토커인지 찾아내려 온라인을 통해 신상을 털기도 해 '이 시리즈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이야기까지 나왔죠. 이 과정에서 엉뚱한 사람이 범인으로 몰려 영국 경찰이 조사에 착수했고, 리처드 개드는 자신의 인스타그램 스토리를 통해 '실제 인물을 알아내려는 시도를 멈춰달라'는 공식 입장을 내놓기까지 했습니다. 


결말에서 도니는 마사가 '베이비 레인디어’라는 이름으로 자신을 불렀던 이유를 깨닫습니다. 그리고 우연히 들어간 펍에서 만난 바텐더가 술 한잔을 공짜로 내어주며, 마치 마사와의 첫만남을 반복하는 듯한 순간을 맞닥뜨리죠. 그 어떤 때보다도 약해진 순간에 주어진 우연한 친절. 이 친절을 계기로 마사처럼 가해자로 돌변할지, 아니면 피해자에 머무를지는 본인의 선택으로 남은 듯한 우연을 남기며 끝납니다. 마치 마사의 모습이 도니에게 투영되는 듯한 결말 때문에, 리처드 개드가 표현하고자 했던 모호한 경계가 극대화되는 듯한 감정이 찌꺼기처럼 남아 어쩐지 찝찝함을 가실 수가 없었습니다. 

시리즈 제작 과정을 다룬 넷플릭스 메이킹 필름 © Still Watching Netflix

개드는 12분짜리 넷플릭스 메이킹 필름을 통해 이 작품은 어쨌거나 본인의 가장 사적인 경험을 다룬 자서전적인 이야기라는 부분을 강조했습니다. 특정한 의견을 형성하거나, 시청자에게 어떤 도덕성을 강요하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는 겁니다. 앞서 언급했듯 그의 경험은 물론 개인적인 것이기 때문에, 그가 겪은 모든 감정을 함께 느끼는 것은 아마 불가능할 겁니다. 어딘가에 김진주 씨가 있듯, 어딘가에는 리처드 개드가 있는 거죠. 그리고 그들이 어떤 모습을 보이든 간에, 모두가 범죄 피해자라는 사실만은 같습니다.


어쩌면 리처드 개드가 원한 것은 학대의 경험을 공유하는 행위 그 자체일지도 모릅니다. 작품을 해석하는 자유는 시청자에게 남겨두었지만, 시리즈를 통해 그가 이 작품을 만든 목적을 밝혀보려 하는 시도 자체가 어쩌면 무의미한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분명 불쾌한 작품이지만, 그럼에도 가장 솔직한 고백이라는 점에서 올해의 '문제작'임은 분명합니다. 

편집/윤문 | 찬비

어두운 밤 쫓아오는 수상한 사람... 현명한 스토커 대처법 알려드립니다 | 닥터프렌즈

에디터 <Zoe>의 코멘트

의학 크리에이터 ‘닥터프렌즈' 멤버로 활동 중인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오진승 선생님이 지난 2021년 스토킹을 당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진 적 있는데요. 실제 스토킹 피해를 겪은 경험을 바탕으로 ‘현명한 스토커 대처법'에 대해 직접 설명한 영상을 소개하며 오늘 레터를 마무리하겠습니다.


영상에서 특히 감명깊었던 부분은 '가해자의 심리를 유추하려 하지 말자'고 조언해주신 부분이었어요. 가해자가 왜 이렇게 행동하는지, 어떻게 가해자를 달래볼 것인지를 고민하다 보면 가해자를 직접 맞닥뜨리려 하는 등 위험한 행동을 하게 되기 쉽기 때문에 가해자의 심리를 이해하려는 행위 자체를 하지 말라는 조언이었는데요. 특히 이미 범죄를 저지르고 있는 중인 가해자의 심리는 일반인인 피해자가 어차피 이해할 수 없으니 노력조차 하지 말라고 강하게 말씀하시더라고요.


피해 사실을 주변에 빠르게 알려 적극적인 대처를 해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필요하다면 의사나 약물의 도움을 받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고 합니다. 주변에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있다면 언제든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 줄 수도 있어야겠죠. 생각보다 가해자도, 피해자도 가까이에 있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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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Zoe • 구현모 • 찬비 • 식스틴 • 나나 • 오리진 • 하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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