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 일드 '하극상 야구 소년'을 중심으로
2024.09.12. 목요일
각본 없는 드라마, 교토 국제고의 우승을 기리며

 지난 8월 23일, 교토 국제고가 제106회 고시엔에서 우승했습니다. 그리고 우리말로 된 교가가 일본의 야구 구장에 울려 퍼졌죠. “동해 바다 건너서 야마도 땅은 / 거룩한 우리 조상 옛적 꿈자리 / 아침저녁 몸과 덕 닦는 우리의 / 정다운 보금자리 한국의 학원” 그 즉시, SNS에서는 교토 국제고 야구부를 연상시키는 드라마가 있다면서 TBS 드라마 <하극상 야구 소년>의 추천 세례가 쏟아졌고요. <하극상 야구 소년>을 국내에 단독 수입한 왓챠 또한 당장 메인 배너에 이 드라마를 걸 정도로 제106회 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드라마의 왓챠피디아 평균 별점은 4.6점(5점 만점)이고, 일본 간토 지방 기준으로 드라마의 최고 시청률은 10.8%에 달할 정도로 방영 당시 인기가 많았습니다. 한국 시청자에게도, 일본 시청자에게도 두루두루 인기가 있는 작품이지요. 오늘은 팟캐스트 <두둠칫 스테이션>에서 미화리 님과 이 드라마에 대해 나눈 이야기를 재구성하여 보내드립니다.

<하극상 야구 소년>의 줄거리는?

야구부원이 단 5명밖에 없는 에츠잔 고등학교의 야구부가 감독 ‘나구모 슈지’(스즈키 료헤이)와 함께 최초로 고시엔에 진출하는 일본 제일의 하극상 사건을 그린 드라마에요. 2016년부터 2018년 고시엔에 진출하기까지 3년간의 세월이 담겨 있으며, 야구부에 들어간 1학년 선수가 3학년 선수가 되기까지의 일대기를 그립니다. 이 드라마는 ‘아즈마 타쿠지’ 감독이 ‘하쿠산 고등학교’ 야구부에 부임한 뒤 5년 만에 고시엔에 진출했던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 <하극상 야구 소년>(TBS)



교토국제고, 고시엔 우승의 의미는?

교토국제고등학교는 재일한국계 국제학교로, 광복 직후인 1947년도에 ‘교토 조선중학교’라는 이름으로 설립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재일교포만 입학 가능했으나, 2003년 ‘교토 국제고’로 교명을 변경하면서 일본 국적의 학생도 입학생으로 받기 시작했다고 해요. 교토 국제고의 야구부는 1999년에 창단되었는데요. 오랜 시간 매우 열악한 환경에서 훈련이 이루어졌습니다. 학교 야구장의 직선 길이가 70m로 부원들이 안타 연습을 하기에는 매우 짧은 편이라 대부분 수비 위주의 훈련만 가능했다고 하고요. 예산이 부족한 탓에 연습장 부지 내에 운동기구를 거의 놓을 수 없어서 부원들은 맨몸 위주의 운동만 했다고 해요. 창단 후 처음으로 출전한 지역 예선에서 교토 국제고는 0:34로 완패한 기록을 가지고 있습니다. 야속하게도 그때의 기록이 사진으로 남아있어요.


(0:34)교토국제고:세이쇼고


2024년 8월 23일, 고시엔 우승 확정 직후의 교토국제고


2024년 기준으로, 교토 국제고의 전교생은 190명입니다. 남학생은 68명인데, 그 중 61명이 야구부에 소속되어 있다고 해요. 거의 90퍼센트에 달하는 거죠. 현재 야구부 구성원으로는 재일교포, 3세, 일본인, 한국인 유학생이 고루 섞여 있고요. 창단 직후 패배의 쓴맛을 보았던 교토 국제고가 고시엔에 처음 진출한 건 2021년의 고시엔 4강이에요. 그로부터 3년이 흘러 2024년, 간토다이이치고를 상대로 우승을 차지했고요. 106회 고시엔 역사상 국제계 고등학교의 우승은 최초로 있는 일이라 많은 화제를 모았습니다.


이번 우승을 계기로 지금까지 교토 국제고 야구부를 이끌어온 감독 ‘고마키 노리츠구'에 관한 이야기들도 함께 알려졌는데요. 은행원 출신이었던 고마키는 지인 소개로 틈틈이 고교 야구를 도와주다가 2007년부터 약 17년째 감독 생활 중이에요. 감독으로 부임 당시 24세였는데 어느덧 마흔이 넘은 거죠. 그는 왜 이렇게 오래 한 팀에 있는 걸까요? 바로, 한국인 유학생 선수 ‘신성현’(2009년에 일본 프로야구에 입단, 이후 고양 원더스, 한화 이글스, 두산 베어스에서 뜀)과의 만남이 고마키 감독의 경력을 유지하는 데에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고 해요. 그는 한 인터뷰에서, “신성현을 가르치면서 학생들에게 지도자가 더 많은 것을 끌어내야 한다는 걸 느꼈다”라고 전한 바 있습니다. 고마키 감독 관련한 스토리 중 가장 놀라운 건 바로 이것이에요. 바로, 고마키가 앞서 이야기했던 0:34 스코어 경기에서 당시 교토 국제고를 꺾고 승리한 상대 팀(세이쇼 고등학교) 야구부 소속 1학년 선수였다는 사실입니다. 여기까지만 봐도 각본 없는 드라마란 이런 것이구나 싶죠.



그래서 고시엔이란 정확히 무엇인가?

*한성윤 KBS 스포츠 기자 <청춘, 여름, 꿈의 무대 고시엔>(싱긋, 2022)을 다수 참고하였습니다.


‘고시엔’은 효고 현 아침저녁 시에 있는 야구장 이름이에요. 원래는 한신 타이거스의 홈구장인데, ‘전국고등학교 야구선수권대회’가 열리는 장소이기 때문에 이 대회 자체를 고시엔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고시엔은 일본의 각 도도부현 47개를 대표하는 49개의 학교가 출전하는 전국 규모의 대회인데요. 학교 수가 다른 지역 대비 월등히 많은 도쿄와 홋카이도에서만 두 팀씩, 나머지 45개의 현에서는 한 팀씩 출전이 가능합니다.현재, 일본에 야구부가 있는 고등학교는 3,890개예요. 그러니까 이 학교들이 각 현의 지역 대회인 예선에서 1등을 해야만, 그 지역의 대표로 전국 대회인 고시엔에 나갈 수 있고요. 고시엔 우승을 이야기하기 전에, 고시엔에 출전하는 것 자체가 대단한 일이라는 의미입니다.


<하극상 야구 소년> 또한 극 중 고교 야구부인 에츠잔 고등학교가 고시엔에서 우승하는 내용이 아니라 고시엔의 출전 자격을 주는 ‘미에 현 지역 대회’에서 우승하는 내용을 다루고 있어요. 이렇게 고시엔은 땅을 밟는 것부터가 그들에게는 엄청난 영광을 의미하기 때문에, 경기에서 패배한 팀은 구장의 흙을 퍼가는 전통이 있어요. <하극상 야구 소년>에서도 에츠잔 고등학교 야구부를 위해 야구장을 지어준 지역의 유지 ‘이누즈카’가 고시엔에 쓰이는 흙과 똑같은 흙을 사왔다고 자랑하듯 말하는 대사가 있거든요. 물론, 주변에서는 “사기당한 거 아니에요?”라고 묻지만요. 


고시엔은 사이렌 소리로 그 시작을 알리는데요. 즉, 사이렌 소리가 들리는 건 일본의 여름이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소리라고도 할 수 있어요. 고시엔이 끝나면 여름의 끝이 왔다는 걸 알 수 있고요. <하극상 야구 소년>의 1화 오프닝 또한 이런 나레이션으로 시작됩니다. “여름은 해마다 찾아오지만 단 한 번의 여름이 있다. 잊을 수 없는 특별한 여름. 에츠잔 고등학교 야구부에게 그것은 2018년 여름이었다.” 



일본 고교 야구만의 독특한 특징들

<하극상 야구 소년>을 보며 가장 신기했던 건 ‘전령’의 존재입니다. 일본 고교 야구에서는 감독이나 코치가 직접 선수들에게 전술을 전하지 않고, 벤치에 앉아있던 후보 선수를 대신 내보내서 자신들의 말을 그대로 전하도록 해요. 전령은 통신 수단이 없던 과거, 전쟁 중에 소식을 전하던 병사를 의미하는데요. 전령의 장점은 후보 선수들도 고시엔의 그라운드를 밟아볼 수 있다는 점이에요. 무엇보다, 감독이 직접 그라운드에 나서지 않음으로써 고교 야구는 오롯이 학생들이 해내는 일이라는 걸 보여주기도 하고요.


‘여자 매니저’ 또한 일본 고교 야구의 독특한 특징인데요. 매니저는 야구 이외의 모든 걸 담당한다고 보시면 되어요. 연습 전 경기장 청소, 감독이나 코치를 위한 음료 준비, 선수단 주먹밥 준비, 연습 경기 때 장내 아나운서 역할까지요. 또한, 중학교 야구부 출신의 매니저는 펑고(수비연습)를 담당하기도 해요. 일본에서 여자 고등학생은 고시엔에 출전할 수 없던 역사가 있기 때문에, 이렇게 간접적으로나마 야구에 참여하는 이들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하극상 야구 소년>에는 여자 매니저 캐릭터가 없어요. 부장 ‘야마즈미’(쿠로키 하루)가 여자라서 야구부에 들어가지 못했던 학창 시절 이야기를 언급하는 극 중 장면은, 야구가 남학생들만의 축제라는 걸 짚고 넘어가는 지점입니다. 다만, 희소식은 고시엔이 2021년부터 ‘고시엔 고등학교 여자야구 전국대회’를 개최하고 있다는 점이에요. 2023년 기준으로 일본 고등학교 여자 야구부는 총 60개라고 합니다. 앞으로 더 이 기세를 더 몰아갈 수 있다면 좋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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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극상 야구 소년>의 주요 포인트

 ㅎㅇ  저는 야구 덕질을 하지는 않거든요. 그래서 ‘내가 야구를 좋아한다고 말할 수 없는 사람인데 <하극상 야구 소년>을 보는 게 괜찮을까’ 라는 생각을 먼저 했던 것 같아요. 먼저, 아다치 미츠루 야구 만화 <H2>(1992-1999, 전 34권)를 보며 대강의 야구 게임 규칙을 습득할 수 있었고요. 이 만화의 엔딩을 보고 나서 TBS 드라마 <하극상 야구 소년>(2023, 10부작)을 보았고, 이게 재미 있어서 SBS 드라마 <스토브리그>(2019, 16부작)까지 몰아 봤어요. 총정리하자면, 야구의 룰을 몰라도 가장 보는 데에 거리낌이 없는 건 <스토브리그>고요. 그다음이 <하극상 야구 소년>입니다. 


© <H2>(대원씨아이), <스토브리그>(SBS) 


<H2>는 단짝 친구 히로(투수) vs 히데오(타자)의 승부를 그려요. 같이 야구 한 판을 뛰는 기분이 들어서 흥미진진 하지만, 90년대 시대상을 고려하더라도 남자 고등학생들이 주변의 여성 캐릭터를 대상화하는 장면들이 매 권 나오는 점이 몹시 아쉽기는 합니다. <H2>가 청춘, 땀, 욕심으로 버무려진 야구 콘텐츠라면, <스토브리그>는 프로야구구단의 꼴찌 팀 ‘드림즈’의 새로운 단장으로 부임한 ‘백승수’(남궁민)와 최초의 여성 운영팀장 ‘이세영’(박은빈)이 팀을 지켜내는 이야기예요. 그라운드를 밟는 이야기가 아닌, 하나의 야구팀을 둘러싼 각종 이해관계자가 사업적인 판단을 내리는 과정을 그려냅니다. 스토브(stove)’가 난로라는 뜻이잖아요. ‘스토브리그’는 야구 정규시즌이 끝난 겨울철의 각 구단이 팀의 전력을 강화하기 위해 선수 영입과 연봉협상에 나서는 시기를 뜻해요. 그래서 이 드라마는 “야구는 돈이 참 많이 들어!”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겨울 야구 콘텐츠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미화리  제가 보는 이 드라마의 핵심은 ‘고교 야구는 그저 부 활동에 불과하다’는 거예요. 이런 나레이션이 있어요. “그땐 어째서 그렇게까지 뜨거울 수 있었을까? 선수도 관중석도 하나였다.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 그저 부 활동일 뿐인데. 그래도 그 여름 우리는…” 이 드라마의 감동 포인트는 야구에 대한 인물들의 진심이 느껴질 때인데, 그게 바로 ‘부 활동의 무용함’이라는 본질에서 오는 감정 같아요. 그러니까 이들이 울고, 다치고, 성장하면서, 야구에 바치는 약 3년의 세월이 그저 부 활동에 온 힘을 다하고 싶어서라는 점이요. 물론 이들에게는 고시엔 진출하기라는 목표가 있지만, 성과를 내는 건 크게 상관이 없어요. 고교 야구부원으로 살아가는 시간이 무언가에 순수하게 몰두할 수 있는 인생의 유일한 시기이자 또 마지막 경험이라는 걸, 이 드라마를 보는 사람들이 모두 알 거예요.


© <하극상 야구 소년>(TBS)의 소년들


이 감동에는 일본 특유의 ‘모노노아와레 (物 ( もの ) の 哀 ( あわ ) れ)’ 정서의 영향도 있는데요. 이건, 돌아갈 수 없는 과거나 이미 상실한 것한테서 오는 슬픔이라고 해요. 모노노아와레는 벚꽃이 가지에 매달려 있는 걸 볼 때의 아름다움이라기보다는, 벚꽃이 져서 흩날리는 걸 볼 때 느껴지는 애수에 더 가깝습니다. 이건 우리나라 말로는 정확히 번역하기가 어려운데요. 한국인만이 ‘한’의 정서를 정확히 이해하는 것처럼, ‘모노노아와레’는 우리가 알기는 힘든 무엇이고 많은 일본인이 공통으로 느끼는 정서라고 해요. 고교 야구부의 이야기, 그리고 고교 야구부에 일본 사람들이 유독 열광하는 이유 또한 돌아갈 수 없는 순수한 시절에 대한 부럽고, 애틋하고, 서글픈 정서 때문 아닐까요?


📻 "각본 없는 드라마, 교토 국제고의 우승을 기리며" 풀버전은 여기서 들으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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