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가 스승의 날이었죠. 저는 고등학교 2학년 여름방학 때, 반 친구들을 모두 밤기차를 타고 정동진에 가서 해뜨는 모습을 보여주셨던 담임선생님을 가끔 생각해요. 정확히는 혈기왕성한 18살 청소년 서른 명을 데리고 밤새 기차를 타는 일을 벌인 선생님이 그렇게 했던 이유에 대해서요. 누가 시키지도 않았을 텐데, 망아지 같은 저희를 데리고 다니기 정말 힘들었을 텐데. 아마 선생님은 매일 밤 12시까지 학교에 남아있던 저희에게 한번쯤 해 뜨는 바다를 보여주고 싶으셨던 게 아닐까 싶어요.
그 때는 친구들과 밤기차를 타는 게 마냥 재밌기만 했는데, 제가 그 선생님 나이에 가까워오는 지금은 그 날의 기억으로부터 직업인으로서 잊지 말아야 할 사명감과 열정을 배웁니다. 입주자님들도 기억에 남는 선생님이 있으실까요? 초중고 교육과정을 거치며 만난 선생님이 아니어도 좋아요. 내가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배웠다면 그 사람이 바로 선생님이 아닐까요.
이성현 인턴기자가 소개하는 플랫한 문화생활, 이번 주에는 배우고 가르치는 여성들의 이야기를 담은 글들을 모아봤어요. 이번주 개막한 칸 영화제에 진출한 한국 여성 감독의 애니메이션 이야기도 담았습니다.
✨따뜻한 시선으로부터
“나는 일주일에 한 번씩 10대들에게 글쓰기를 가르친다. 10대 때 글쓰기 스승을 너무 사랑했던 나머지 그들과 비슷한 일을 하고 있다.”
이슬아 작가의 <부지런한 사랑>은 작가가 글쓰기 교사로 일하며 겪은 일을 모은 에세이입니다. 그는 아파트에서 ‘글을 가르치겠다’는 전단을 돌린 것을 시작으로 청소년, 중년 여성 등에게 글쓰기를 가르쳤습니다. 책에는 아이들이 쓴 문장들이 그대로 실려있는데요. 덕분에 오랜만에 천진난만해지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이슬아 작가는 책의 서문과 후기에서 자신의 글쓰기 스승들을 떠올립니다. ‘아름답고 따뜻한 여자들. 내게 문학의 향기를 알려준 사람들. 사랑은 말과 몸을 버무려 완성하는 거라고 말해준 스승들.’ 그중에서도 ‘어딘’은 이슬아 작가를 가장 오래 가르친 스승입니다.
어딘이 운영하는 어딘글방은 양다솔, 이길보라, 이다울, 하미나 등 90년대생 여성 작가들이 거쳐간 곳으로 유명하기도 해요. 단순한 수업 공간만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이슬아 작가의 산문에서 어딘은 빼놓을 수 없는 이름이거든요. 함께 읽고 함께 쓰는, 마음을 나누는 공간이었을 겁니다.
이슬아 작가는 어딘에게 받은 사랑을 기억하며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칩니다. 그가 어딘글방에서 느꼈을 감각을 상상해 봅니다. 좋아하는 것을 마음껏 나눌 수 있지 않았을까요. 곁에는 나를 지켜봐 주는 여성들도 있고요.
제게는 요가원이 그렇습니다. 수업 후 선생님들과 차를 마시며 대화를 나눌 때면, 서로를 묵묵히 응원하고 있다는 기분이 들어요. 그런 순간 덕분에 마음이 더욱 단단해집니다. 누군가의 다정한 시선 아래에서 자란 마음은, 언젠가 또 다른 이에게 전해지죠. 입주자님께도 그런 모임이나 관계가 있으신가요? 우리 곁에 따뜻한 눈빛이 오가는 자리가 많았으면 좋겠습니다.
✨칸에 간 한국의 여성 감독들
지난 13일 칸 영화제가 개막했습니다. 한국 장편영화 초청이 불발되며, ‘한국 영화의 위기’라는 이야기가 나오는데요. 그러나 단편 애니메이션 부문에는 벌써 두 번째 칸의 초청을 받은 정유미 감독이 있습니다. 정 감독은 2009년 <먼지아이>에 이어, 올해 <안경>으로 다시 한번 칸의 초청을 받았습니다.
<안경>은 안경원에 간 여자가 내면의 그림자와 마주하고 자신과 화해하는 과정을 그린 작품입니다. 시력 검사를 받으러 온 여성은 측정 기계 속 ‘집’ 그림을 바라봅니다. (시력 검사할 때 보이는 그 그림이요!) 색채도 말도 절제돼 있어 어딘가 서늘한 기운이 감돕니다. 안경원이라는 일상적 공간은 이 ‘낯선’ 감각과 함께 인물의 내면을 보여주는 은유적 장치로 변모합니다.
정 감독의 작품은 많은 이가 겪어봤을 상황에서 출발합니다. <먼지아이>는 방 청소, <연애놀이>는 연인 간 소꿉놀이, <수학시험>은 시험 응시를 다뤘죠. 그는 이런 일상적 순간을 비틀어 철학적 메시지를 건넵니다. 정유미 감독 특유의 세밀한 연필 드로잉을 따라가다 보면, 관객은 어느새 자기 내면과 마주하게 됩니다.
라 시네프(학생 영화 부문)에는 허가영 감독의 <첫여름>이 초청받았습니다. ‘첫여름’은 손녀의 결혼식이 열리는 날 남자친구 학수의 49재에 가고 싶어 하는 노인 영순의 이야기로, 노년 여성의 시선을 섬세하게 그려냈다는 평을 받았습니다.
한국 영화의 존재감이 걱정되는 요즘, 여성 예술가의 활약이 더욱 반갑게 느껴집니다🩵 입주자님들도 플랫에 소개하고 싶은 예술가가 있다면 ‘뉴스레터 의견 남기기’를 통해 알려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