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일 수요일(현지시각)이었습니다. 실리콘밸리은행이 중대 발표를 합니다. “18억달러 세후 손실을 감수하고서라도 210억달러에 달하는 매도가능증권(AFS·만기 전 매도할 의도로 매수한 채권과 주식)을 매각을 할 것입니다.” “손실을 만회하기 위해 22억5000만달러 규모로 증자를 단행하고 벤처캐피털인 제너럴애틀랜틱(GA)으로부터 5억달러를 투자 받겠습니다.”
미국채 팔겠다는 이유
실리콘밸리은행이 27조원에 달하는 AFS, 즉 미국 국채를 내다 팔겠다고 선언을 했습니다. 이유는 스타트업의 자금 줄이 막히면서 갈수록 예금을 인출해 갔기 때문인데요. 막상 보면 평범한 발표 같았습니다. 하지만 아니었습니다. 은행은 손해 보는 장사를 잘 안하는데, 2조원이 넘는 손실을 각오한 것부터 주변에서 이상하게 보기 시작했습니다.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2021년 예금이 넘쳐났다
실리콘밸리는 불과 2021년까지만 하더라도 호황이었습니다. 투자자금이 몰려들고 스타트업은 성장했고, 투자자금은 실리콘밸리은행에 예금했습니다. 은행 입장에서도 나쁘지 않았습니다. 한데 돈이 풍부하니 대출이 적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이런 상황이 벌어집니다. (17→21년)
- 예금: 440억→1890억달러
- 대출: 230억→660억달러
은행은 보통 예금과 대출의 격차, 즉 예대금리 차이만큼 돈을 법니다. 대출이 많아야 돈을 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실리콘밸리은행은 압도적으로 예금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은행은 1200억달러 이상 미국 국채를 사들입니다. 기준 금리가 낮으면 채권 가격은 높아지고, 기준 금리가 높으면 채권 가격은 낮아집니다. 금리가 높아진다는 것은 앞으로 나올 채권의 금리가 함께 높아진다는 뜻인데요. 때문에 그 이전에 발행한 채권은 인기가 시들어 가격이 낮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2022년 연준의 정책변화
2022년 들어 미국 연방준비제도가 급격히 기준금리를 올렸습니다. 2022년 1월 0~0.25%에 불과했지만 현재는 4.5~4.75%입니다. 곧 스타트업의 어려움이 됩니다. 금리가 오르다보니 스타트업과 상장 주식에 투자하기보다 차라리 예금에 넣는 것이 수익이 많기 때문입니다. 힘들어진 스타트업은 이제 예금을 꺼내 회사를 운영하기 시작합니다. 인출이 늘어나면서 실리콘밸리은행은 어쩔 수 없이 보유했던 채권을 매각해야했습니다.
기준금리가 올랐으니 채권가격은 크게 떨어졌고, 미실현손실은 손실로 확정될 판입니다. 그래도 실리콘밸리은행은 자신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니었습니다.
뱅크런...각자도생 결정
9일 목요일이었습니다. 주가가 떨어지기 시작하더니 60% 하락했습니다. 스타트업에 투자한 벤처캐피털들은 안절부절 못했습니다. 스타트업이 망하면 벤처캐피털 역시 망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몇몇 벤처캐피털들은 돈을 꺼내라가 종용을 했습니다. 유니언스퀘어벤처는 “예금 계좌에 보장되는 25만달러만 남겨 두고 모두 꺼내라”고 조언했습니다. 핀테크 기업 브렉스는 십수억달러를 하루 사이에 인출했습니다.
속전속결 폐쇄결정
10일 금요일이 됐습니다. 은행은 당초 계획했던 증자에 실패했습니다. 뱅크런 사태가 걷잡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대신 매각으로 방향을 돌리던 찰나, 미국 캘리포니아주 금융보호혁신국한테 연락을 받습니다. “유동성과 지급불능을 이유로 당신네 은행을 폐쇄합니다.” 48시간만의 일입니다. 연방예금보험공사(FDIC)를 파산관재인으로 임명했고, 모둔 예금이 동결됐습니다. 예금액만 1754억달러, 약 232조원입니다.
"스타트업을 구해라"
11일 토요일. 문제는 이 가운데 86%는 예금 보장이 안 되는 금액입니다. 기업 고객이 많다보니 뭉칫돈을 많이 넣었기 때문입니다. 스트리밍 플랫폼 업체 로쿠가 4억7800만달러, 로블록스가 1억5000만달러 각각 현금이 묶였습니다. 이런 큰 기업도 문제지만 문제는 작은 스타트업입니다.
미국에서는 매달 두 차례 급여를 지급하는 것이 관례입니다. 통상 15일 또는 30일, 1일 또는 15일에 급여를 지급합니다. 15일은 그만큼 중요한 날입니다. 이곳에서 만난 한 스타트업 CEO는 “일부 자금이 묶이긴 했지만 급여를 지급못할 정도는 아니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또 다른 CEO는 “대출이라도 받아야하는 상황”이라고 말을 아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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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칫하면 상당수 스타트업이 지급불능 위기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목소리가 터져 나오고 있습니다. 억만장자 투자자인 빌 애크먼 퍼싱스퀘어캐피털 창버자는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바로잡을 시간이 48시간밖에 없다”면서 “월요일 주식시장 개장 전에 은행을 인수하지 않거나 예금 전체를 정부가 보증하지 않으면 예금 보호가 안 되는 모든 예금을 인출하는 소리를 듣게 될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혁신적인 실리콘밸리에서 실리콘밸리은행이 국채에만 투자한 것을 놓고 "돌(고정관념)로 돛을 달아 움직였다"는 평가(오펜하이머)마저 나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