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늦게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를 정주행하고 있습니다. 주변에서 칭찬이 워낙 자자하기에 언젠가 꼭 볼 생각으로 남겨두었다가 최근에 일단 맛만 보자!하는 생각으로 1편을 틀었었는데요. 근데 첫 화부터 너무 재밌어버려서 여러 편을 연달아 보게 되어버렸습니다. 그중 1편에 특히 기억에 남는 재밌는 대사가 하나 있었습니다. 바로 우영우의 친구 동그라미가 영우에게 ‘변론 잘하는 법’을 알려주면서 했던 대사입니다. “야, 변호사는 그것만 잘하면 돼. 따라해 봐. 이의 있습니다!”



[NO.29]


등장 있는 임팩트


2022년 9월 24일



이 장면의 웃음 포인트는 그라미가 재판장에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일반인이라는 점입니다. 그럼에도 영우가 그라미에게 조언을 구하게 된 이유는, 영우가 이제 곧 첫 재판에 참석해야 하기 때문인데요. 첫 재판을 앞두고 스스로 말을 잘 하지 못하는 것을 알고 있는 영우가 절친 그라미에게 도움을 청한 것입니다. 이에 그라미는 그저 자신이 본 <증인>이나 <변호인> 같은 영화에 나온 변호사들의 모습을 보고 흉내를 낼 뿐입니다. 그중에 가장 눈에 띄는 특징 하나를 잘 골라잡은 것이지요. 법정 영화 치고 “이의 있습니다!”라는 대사가 나오지 않는 영화는 없으니까요. 반대로 생각해 보면, 어떤 영화의 첫 장면에 “이의 있습니다!”라는 말을 ‘멋지게’ 하며 등장하는 사람이 있다면, 우리는 그 사람을 분명 변호사든 검사든, 아무튼 법에 상당한 전문성을 가진 사람으로 인식하게 될 것입니다. 그 뒤에 그 사람이 제시하는 근거의 디테일은 크게 중요한 것이 아닐 지도 모릅니다. 일단 처음 등장할 때 근엄한 표정과 함께, 배를 꽉 채운 복식 호흡으로 ‘이의 있습니다’를 외친다면, 벌써 반 이상은 분위기를 먹고 들어간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최근 넷플릭스에 공개된 <수리남>은 그런 점에서 다소 아쉬웠습니다. 마약, 폭력 집단, 카르텔 이권 싸움과 같은 자극적인 소재를 다루는 영화/드라마들은 작품 초반에 분위기를 확 휘어잡는 것이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수리남>은 신기하게도 앞서 말한 ‘임팩트 있는 등장’과는 정 반대의 형태로 주요 인물들을 등장시킵니다. 극을 이끌어가는 인구(하정우), 메인 빌런 목사(황정민), 그리고 목사의 오른팔 전도사(조우진)까지, 모두 평범한 대사와 함께 극에 나타는데요. 이는 정체를 숨기고 있는 세 인물의 특성상 어쩔 수 없는 선택일 수는 있겠지만, 그럼에도 극의 몰입엔 큰 도움이 되지는 못했다고 생각합니다. 이들이 얼굴이 익숙한 유명 배우라는 점을 제외하고는 특별한 흥미가 느껴지지 않았고, 그래서 더욱 배우들이 연기했던 다른 캐릭터들이 떠올랐던 것 같기도 합니다.


물론 이 드라마의 제목은 ‘인구’도, ‘목사’도, ‘전도사’도 아닌 ‘수리남’입니다. 그 어떤 인물보다 수리남이라는 공간 자체가 더 중요한 이야기로 느껴지는 제목입니다. 말하자면 ‘수리남’이 가장 핵심 주인공이라는 뜻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수리남>의 첫 등장은 꽤 임팩트가 있는 편입니다. 수리남이라는 나라는 극의 가장 초반에 인구의 나레이션을 통해 간략히 소개가 되는데요. 먼저 나라의 위치와 인구수를 밝힌 인구가 바로 이어서 관객들에게 알려주는 정보는, 이 나라의 국민 절반 이상이 마약 산업에 종사하고 있다는 얘기입니다.


인구의 이 대사는, 마치 이 나라를 알려면 이 사실을 제일 먼저 알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실제로 이 대사를 듣고 꽤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국민 절반 이상이 마약과 관련한 일을 하고 있는 나라가 지구에 존재한다는 사실이 놀라웠습니다. 그런 점에서 ‘수리남’이라는 주인공은 극에서 상당 수준의 임팩트 있는 등장을 한 셈입니다. 다만 나중에 실제로 수리남에서 촬영된 장면이 하나도 없다는 점을 알게 된 다음엔 그 충격이 많이 줄어들기는 했습니다. 물론 영화는 꼭 실제 그 장소에서 찍을 필요가 없기는 합니다. 다만 ‘수리남’이라는 실제 존재하는 국가를 이렇게 부정적인 이미지, 덜 문명화된 국가로 그릴 작정이었다면 어느 정도의 사실성을 통한 설득력을 확보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그곳에서 그 나라 사람들이 반박할 수 없는 무언가를 찍거나, 그게 힘들었으면 ‘수리남’이 아닌 가상의 국가를 창조했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후에 이슈가 된 <수리남>에 대한 수리남 사람들의 불만은, ‘수리남’의 임팩트 있는 등장 장면만으로도 충분히 이해가 가는 측면이 있습니다.

  


'임팩트 있는 등장' 얘기를 하다 여기까지 와버렸네요. 이번 주에 진짜로 소개하고 싶었던 영화는 9월 8일에 개봉한 영화 <성적표의 김민영>이었습니다. 작년 전주영화제 한국경쟁 부문에서 대상을 수상한 작품인데요. 이 영화는 마약, 총격전과 같은 자극적인 소재를 다루는 영화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훌륭한 ‘임팩트 등장’을 선보이는 영화입니다.


영화는 청주여자고등학교의 비공식 클럽인 ‘삼행시 클럽’의 해체식으로 시작됩니다. 멤버는 현재 고등학교 3학년인 민영과 정희와 수산나입니다. 이들이 클럽을 해체하는 이유는 이제 수능 D-100일을 맞아, “학생과의 자식으로서의 본분을 다 하기 위해”서 입니다. 아 참, 메일을 보내고 있는 오늘 2022년 9월 24일이 2023년이 딱 100일을 남겨둔 시점이라는 사실을 알고 계셨나요? 오늘부터라도 인간으로서의 본분을 다 하기 위한 무언가를 시작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드는데요. 저와 달리 이 기특한 친구들은 수능 시험에 더욱 집중하기 위해 그들의 창작 욕구를 잠시 내려놓는 선택을 합니다.


계속해서 진행되는 해체식의 마지막 순서는 클럽의 ‘최우수 시’를 낭독하는 순서입니다. 그 시는 민영이 자신의 이름으로 지은 삼행시입니다. 저는 이 시를 듣자마자 민영과 <성적표의 김민영>이라는 영화를 좋아하게 되어버렸습니다. 아래는 그 시의 전문입니다.


김. 민. 영.


김 : 김 씨 성을 가진 사람들이 너무 많다.

그래서 김 씨들이 모여 가장 효용 없는 한 사람을 추방하자 회의를 했다.


민 :“민영아” 누군가 내 이름을 불렀다. 나는 변호하고 싶었다.


영 : 영원히, 제가 이대로 살아가진 않을 거예요.



이 시는 누군가의 이름으로 지은 삼행시 중 가장 창의적이고 사랑스러운 시라고 생각합니다. 응용하기도 좋을 것 같구요. 예를 들어 제 이름으로 삼행시를 지어도 나름 말이 될 것 같기도 합니다. 김 씨 성을 가진 사람들이 너무 많다, 한 사람을 추방하자 회의했다, “철홍아” 누군가 내 이름을 불렀다, 나는 변호하고 싶었다... 하지만 문제는 ‘홍’이라는 글자입니다. ‘홍’으로 시작하는 말로 어떻게 저를 변호해야 할지 딱히 생각이 잘 나지 않아, 어쩔 수 없이 저는 세상에서 추방당할 수밖에 없을 것 같은데요. 민영은 영리하게도 도치법을 사용해 ‘영원히’라는 말로 문장을 시작합니다. 시니까 가능한 ‘시적 허용’ 덕분에 민영은 추방당하지 않을 수 있었고, 동시에 아름답고 우수한 시를 완성시킬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제가 이 영화를 우수하다고 느낀 이유는 이 영화엔 이 ‘시적 허용’ 같은 ‘영화적 허용’이 넘쳐났기 때문입니다. 누군가가 보기에 이 영화는 분명 어느 정도 허술해 보일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기존 영화에 잘 사용되지 않는 형식들과 독특한 편집 리듬이 자주, 뜬금없이 드러나는 영화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저는 그런 장면들이 모두 영화적 허용으로 느껴져 좋았습니다. 어떤 장면이 순서가 뒤바뀐 것처럼 보여도, 어떤 씬에 있어야 할 장면이 생략되어 있어도, 영화니까 그럴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 생각을 하게 된 이유는 그 무엇도 아닌 이 영화의 첫 장면 때문일 것입니다. 만약 첫 장면이 저에게 그다지 큰 임팩트를 주지 못했다면 저는 이 영화의 허술한 부분을 단점으로 봤을 확률이 큽니다. 다시 말해 첫인상이 좋았기 때문에, 그 뒤의 허술한 점도 모두 예술적으로 느껴졌다는 것입니다. 조금 우스꽝스럽게 표현되기는 했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그라미가 “이의 있습니다!”를 잘 해야 한다고 말한 것은 꽤나 인생의 진리를 꿰뚫은 꿀팁이었던 것 같습니다.

  

<성적표의 김민영>에도 ‘이의 제기’의 장면이 있습니다. 일단 민영의 삼행시부터 민영이 자신을 변호하기 위해 이의를 제기하는 시이기도 하는데요. 하지만 영화에 그것보다 더 직접적으로 이의 제기가 드러나는 순간은, 민영이 자신이 받은 대학 성적표가 마음에 들지 않아 교수님에게 메일로 이의 제기를 하는 장면입니다. 민영은 그 이의 제기를 하느라 자신의 집에 짐까지 싸서 놀러 온 정희에게 소홀하게 되는데요. 이 사건을 계기로 민영은 정희로부터 자신의 행실에 관한 성적표를 받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김민영의 성적표’이자, 이 영화의 제목입니다. 물론 실제 제목은 시적 허용으로 도치되어 있습니다. 뭔가 의미심장하면서도, 민영에 방점이 찍혀 민영을 아끼는 마음이 담겨 있는 듯한 느낌을 주는 세심한 제목입니다. 그렇지만 사실 친구끼리 성적표를 매긴다는 것 자체가, 참 평가를 받은 민영의 입장에선 기분이 나쁜 일일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그럼에도 그것이 허용되는 이유는 그들이 친구이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소 미운 구석이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친구이니까요. 그런 의미에서 친구적 허용과 영화적 허용 그리고 시적 허용이라는 세 친구가 등장하는 <성적표의 김민영>이라는 친구를, D-100일날에, 여러분께 소개합니다. 영원히, 이의 제기는 환영입니다.



- ONE DAY ONE MOVIE by 김철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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