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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310 섬에서 사는 일 | 김민수
 
 
 
 
 
 
 
 
 
 
 
 
 
매주 화요일에는 김민수 작가님의 '섬에서 사는 일'을 보내드립니다. 살갑고 즐거운 제주 이야기를 들어보시죠.

섬에서 사는 일 001 | 김민수

녹동 가는 길


제주와 고흥 녹동을 오가는 아리온호는 6,000톤 급이다. 2만 톤이 넘는 목포나 완도의 크루즈급 여객선에 비하면 작은 편에 속한다. 편의 시설도 매점 겸 식당이 고작이라 바랄 것 자체가 없다. 그런데 그저 목적지까지 데려다주면 그것으로 족할법한 평범한 여객선에 묘한 재미가 숨어 있다. 물론 처음부터 눈치챈 것은 아니다. 열 번이 넘도록 항로를 경험하며 진심으로 느끼고 터득했다.

 

  제주에 산 지 일 년 반, 가끔 여행 취재를 위 육지로 올라가곤 한다. 열에 일고여덟 번은 비행기를 이용하지만, 남도나 섬을 여행하고 돌아올 때면 배를 탄다. 지난 두 달간은 유난히 육지 나들이가 많았다. 그중 가장 묵직했던 일은 ‘고흥문화도시센터’에서 주관하는 노마드고흥 주민 여행기획단의 멘토 역할이었다. 그 때문에 매주 한 번씩 배를 타고 고흥으로 올라가 반원들을 만나고 여행을 이어갔다.

  여객선 아리온호는 제주항을 오후 4시 30분에 출항해 고흥 녹동항에는 저녁 8시 30에 도착한다. 그리고 반대로 아침 9시에 녹동항을 떠나 오후 1시 경에 제주항으로 입항한다. 그러다 보니 고흥에서의 일정은 최소 2박 3일이다. 녹동에 도착하면 일단 호텔에서 하룻밤을 보낸 후 다음 날이 돼서야 일정을 시작할 수 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에 제주로 오는 배를 탄다. 제주에 사는 사람에게는 매우 불리한 배 시간이다. 그런데 반대로 생각하면 얘기가 달라진다. 고흥에서 배를 타고 제주를 오면 일단 한나절을 을 넉넉히 쓸 수 있고 다음 날도 오후까지는 여유롭다. 1박 2일의 알찬 제주여행도 가능하다는 뜻이다.

  여행자들의 대부분은 3등 객실을 이용한다. 매표 창구에서도 신분증과 카드를 내밀면 차량 동반 여부만 체크할 뿐, 객실 등급에 대한 질문은 없다. 아리온호에는 3개의 3등 객실이 있으며 모두가 바닥형이다. 누구든 먼저 올라가 좋은 자리(발이 빠른 사람들은 두 면이 벽으로 막힌 모서리를 탐했다)를 선점하고 몸을 뉘거나 담요라도 하나 깔아놓으면 그것이 찜이다.

  처음에는 배 안에서의 네 시간을 우습게 봤다. 맨바닥에 등을 깔고 누워 있자니 온몸이 불편하고 딱딱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잠시 화장실이라도 다녀오면 누군가 슬쩍 자리를 침범했다. 그래서 두 번째 여행부터는 패드형 매트리스와 얇은 침낭을 배낭에 담아와 깔고 덮었다. 잠자리가 완성되니 단단한 경계가 생겼다.

  자리를 펴고 교감을 차단하겠다는 의지로 똘똘 뭉쳐 있을 때 유니폼을 입은 승무원이 마이크를 들고 객실로 들어왔다. 객실에 있던 모든 승객의 시선이 그를 향했다.

  “안녕하세요? 객실에서 식사나 음주는 금지되어 있습니다. 밖에 테이블이 마련돼 있으니 그곳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뭐 간단히 과자나 음료를 드시는 것은 괜찮습니다. 김밥도 옆에 계신 분들이 이해할 수 있겠죠. 그런데 맥주 정도는 어떨까, 하시는 분들이 계신데요. 맥주도 술이죠. 제가 도수로 술을 나눌 수도 없고 난감합니다. 규칙이니만큼 맥주도 밖에서 드셔야 합니다.”

  차분하고 정감 있는 목소리는 의외로 쉽게 전달됐다. 승객들은 “네.” 하고 대답했다. 그는 도착 시각, 냉난방 조절에 관한 정보를 전달한 후, 옆 객실로 옮겨 갔다.

  나중에 알았지만, 그는 여객선의 사무장으로 매일 녹동과 제주를 오간다. 승객들을 대면하고 직접 안내 사항을 전달하는 것은 그의 아이디어다. 다른 여객선들만큼 즐길 거리 갖추지 못했으니 성의라도 있어야겠다고 생각했단다.

  갑판으로 나갔다가 제주항이 시야에서 멀어질 때 객실로 돌아왔다. 그리고 한 시간쯤 지났을 때 창으로 붉은 기운이 느껴졌다. 분명 낙조다. 카메라를 들고 재빨리 갑판으로 나갔다. 예상대로 태양이 수평선으로 곤두박질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아리안호의 제주발 운항 시간은 낙조에 맞춰 있었던 것, 그 절묘함에 절로 탄성이 나왔다.

  ‘그러게, 맥주를 밖에서 마시라고 말하는 사무장의 눈빛에서 뭔가 자신감이 있었어.’

  젊은 커플이 용감하게도 갑판 위에 테이블을 폈다. 그리고 제주막걸리를 올려놓고 마시기 시작했다. 휴대폰을 들고 바다 끝을 향하던 사람들의 시선은 모두 그곳으로 쏠렸다.

  선상 낙조와 제주 막걸리의 기발한 콜라보네이션,

  ‘크!’ 두 번째 탄성에 목젖이 떨렸다.  

  같은 시간 같은 자리에 앉았다. 언젠가 저 낭만을 꼭 한번 따라 하리라 마음먹은 지 몇 주가 지난 후다. 한켠에 가지런히 정리돼 있는 테이블과 의자를 꺼내 갑판 끝 ‘관계자 외 출입 금지’ 라인에 최대한 밀착했다. 최고의 낙조 포인트다. 제주항으로 오는 길에 편의점에서 산 하얀 뚜껑의 제주막걸리와 육포를 올려놓고 비장의 목잔도 꺼냈다.

  얼마 후, 검은 구름을 뚫고 태양이 송두리째 쏟아지기 시작했다. 대단한 힘이다. 잠시 후, 뒷덜미가 화끈거렸다. 없을 것 같던 태양의 등장에 많은 승객이 갑판으로 나온 것이다. 부끄러움이 엄습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뒤를 돌아보지 않기로 했다. 분명 정면을 응시하고 있었는데 사람들이 보였다.

  결국 막걸리가 힘이다. 사람들의 시선이 무뎌지자 태양이 더욱 선명하게 다가왔다. 아이팟을 꺼내 귀에 꽂았다. 호주의 원주민 가수 그루물(gurrumul)이 그들의 언어 요릉우로 부른 무덤새(wiyathul), 제주집에서 즐겨 듣던 노래다.

  이경림 시인의 주황발 무덤새라는 시도 떠올랐다.


  “아비는 무덤을 만드느라 생의 절반을 보냈네 /. 어미는 한 번 품지도 못할 알을 낳느라 꽃 시절을 놓쳤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울컥했다. 사람들이 모두 객실로 들어갔다. 세상은 어두워지고 있었지만 꼼짝할 수 없었다.

  익숙할수록 시간은 금방 간다. 사무장이 또 객실을 찾았다. 이번에는 내리는 곳과 차량으로 이동하는 방법을 설명해 줬다. 올 스테이션 스탠 바이(all station stand by) 멘트가 3번 울리면 배가 거의 도착했다는 뜻이다.

  녹동항, 초겨울 8시 30분은 한밤중이다.

김민수는 여행작가다. 섬을 여행하고 섬을 담아내다 결국 가장 큰 섬 제주도에 살고 있다. 『섬이라니 좋잖아요』, 『섬에서의 하룻밤』, 『대한민국 100섬 여행』 등을 펴낸 섬 여행 전문가. ‘제주’에 관한 에세이를 준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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