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당히 애매하지만 어떤 특정한 정보는 들어있는 말들.
OCTOBER 17, 2025
가끔 관계에 강박적일 때가 있습니다. 좁고 깊은 친구 관계를 선호했던 학생 시절일 때 생긴 버릇이 아닐지 추측하곤 합니다. 

관계의 기준이나 구분이 명확한 편입니다. 그 기준은 보통 저에 관한 것입니다만, 아무래도 그런 시각으로 세상을 대하다 보니 타인에게 투영되는 경우도 부득불 있지요. 더불어 예전부터 ‘빈말’ 자체에 강박적인 사람이라 최대한 의식해서 자제하려 합니다. 사람이란 아무래도 본인이 싫어하는 건 먼저 잘 하지 않으니까요. 그럼에도 사회생활에서 빈말이란 필요악 혹은 선의의 거짓말이기 때문에, ‘언제 밥 한번 먹어요’나 ‘다음에 커피 한잔해요’ 같은 말은 안부 인사처럼 자연스럽게 흘려들을 수 있을 정도로 단련되긴 했습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고치기 어려운 습성이라면, 저는 ‘구체적인 빈말’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가령 이런 느낌입니다.

어떤 영화가 개봉했을 때 ‘같이 보러 가면 재밌겠다’라거나, 책 이야기를 하다가 ‘이 책 집에 있는 것 같은데 찾아 보고 빌려 줄게’라든가, ‘여기 덮밥 유명하던데 다음에 도장 깨러 가보자’ 같은 말들. 적당히 애매하지만 어떤 특정한 정보는 들어있는 말들.

이런 말을 들으면 저는 최대한 그 말을 뱉은 사람과 다음을 기약합니다. 다른 영화를 보고, 일부러 다른 책을 읽고, 맛집은 다른 메뉴를 고릅니다. 강박이든 호의든 함께 하자는 그 마음을 꼭 이루고 싶거든요. ‘구체적인 빈말’임을 깨달을 때는 그 영화가 영화관에서 내려갔거나, 같이 가자고 한 맛집 사진을 그 사람의 SNS에서 발견했을 때죠.

왜 먼저 말을 안 꺼내냐고요? 어렸을 땐 소심해서, 지금은 의식적으로 기다립니다. 제가 누군가를 생각하는 마음의 크기와 상대방의 경우가 다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살다 보니 자연스럽게 깨닫게 되잖아요. 이런 상황들이 그 척도를 가늠할 수 있는 잣대가 되어주거든요. 

비슷한 기준점이 있다면, (정말이지 처음 꺼내 보는 이야기입니다만) 누군가와 대화할 때 자연스럽게, 그렇지만 의도치 않게 대화가 끊기는 순간이 오잖아요. 밥 먹으며 이야기하다가 메뉴가 나올 때라거나, 길을 함께 걷다가 불쑥 비가 온다거나. 상황이 완전하게 뒤집어지지 않는다는 가정하에 어떤 불가피한 변곡점이 생길 때. 만약 그때가 제가 한창 이야기하고 있을 때라면 저는 종종 그 대화를 잇지 않고 기다리곤 합니다. 그럴 때면 보통 두 가지 상황으로 나뉩니다. ‘그래서? 아까 무슨 얘기 하고 있었지?’라며 물어봐 주는 상대와 아무렇지 않게 본인의 새로운 화두를 꺼내는 상대. 제 말을 담고 있었는지가 드러나는 순간이라고 생각합니다.

미묘하고 세세한, 지극히 개인적인 이 기준점이 분명 저를 각박하게 옭아맬 때도 있지만 그렇게 곁에 남은 소중한 사람들이 또 이렇게 저를 만들어 주었다고 생각하면 역시 어쩔 수 없어집니다.

그래서 앤초비를 샀습니다. 앤초비와 초리조를 이용한 담파스타 신청을 받았거든요. 

그런데 냉장고에 남아있는 줄 알았던 앤초비가 똑 떨어진 거예요. 앤초비 요리를 자주 하지 않아서 항상 냉장고 구석에 덩그러니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는데, 정작 필요할 때 없는 이 인생의 진리라니. 이미 만들겠다고 한 후인데 어쩌겠어요. 언제 다 쓸지 모르는 앤초비지만 다시 사는 수밖에요. 


그렇게 부랴부랴 구매한 앤초비로 짭짤한 향을 내고, 초리조를 달달 볶아 매콤한 고기 풍미를 더한 초비초(라며 제멋대로 줄여본 이름의) 파스타는 딱 생각한 그 맛이었습니다. 메인 재료 두개 전부 강렬한 고유의 맛이 있기 때문에, 조리 마지막에 불을 끄고 레몬즙으로 경계를 살짝 없애 주면 더 조화로운 맛이 됩니다. 살짝 매콤하면서도 묵직하고 콤콤짜르르한 맛을 레몬의 산미가 거칠게 사포로 문대며 마무리하는 느낌이랄까요. 쨍한 화이트와인이나 샴페인이 떠오르는 맛입니다. 


초비초 파스타를 먹다 보니 대체할 수 없는 이 두 개의 메인 재료가 저에겐 양보할 수 없는 관계의 두 기준점과 닮지 않았나 싶어집니다. 이 파스타를 만들려면 꼭 이 재료들이 있어야 하거든요. 아, 물론 빈말은 아닙니다.

초비초 파스타 (토마토 버전)

재료 [1인분 기준]

(필수)
파스타 1인분
초리조 50g
앤초비 필렛 1개
토마토 페이스트 100g 가량
페페론치노
레몬즙
올리브오일
소금
후추

(기타)
파슬리 가루
파프리카 절임

만드는 법

1. 파스타 면은 패키지에 적힌 시간만큼 삶아줍니다.
2. 앤초비는 잘게 다집니다.
3. 팬에 올리브오일을 두르고, 페페론치노를 부숴 넣어 향을 입힌 다음 이어서 초리조와 앤초비를 넣어 볶아줍니다.
4. 파프리카 절임과 토마토 페이스트를 넣고 토마토 산미가 날아가도록 살짝 볶은 다음, 소금과 면수를 넣고 간과 농도를 맞춰줍니다.

5. 파스타를 넣고 잘 볶은 다음, 불을 끄고 레몬즙을 둘러준 후 후추를 뿌려 접시에 담으면 끝!

저는 토마토 페이스트가 찬장에 남아 있어 토마토소스를 만들었는데요, 레몬즙 양을 늘리고 오일 파스타로 만들어도 아주 맛있을 파스타랍니다. 취향에 맞게 즐겨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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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D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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