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떠나는 사람이었지만 마침내 남겨진 사람이 되었을 때
NOV 29, 2024
돌이켜 보면 저는 언제나 떠나는 사람이었습니다. 떠나는 상황을 즐겼고, 그 감각이 익숙했죠. 집과는 전혀 다른 곳에 있는 조리 고등학교를 간다고 처음 기숙사로 떠났을 때도, 이민용 캐리어에 짐을 잔뜩 실어 프랑스로 떠날 때도, 그저 앞으로 펼쳐질 새 세상에만 집중했어요. 저는 그런 사람이었고, 물론 현재에도 유효하며, 아마 높은 확률로 앞으로도 그럴 예정입니다. 

지나온 일에 강박적일 정도로 후회를 남기지 않으려는 편이라 자연스레 앞만 보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자기합리화는 밥반찬처럼 틈날 때마다 꺼내 먹고요. 어쩌면 ‘백만엔걸 스즈코’처럼 현실을 마주하고 싶지 않았던 것일 수도 있을까요? 단정 짓고 싶지는 않지만, 현재가 가끔 견딜 수 없이 따분할 때가 있는 건 맞아요.

짐작건대 아무래도 떠나는 쪽이 확률적으로 좀 더 가벼운 마음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제가 그랬으니까. 눈앞에 놓인 상황에 꾸역꾸역 적응하다 보면, 뒤에 제쳐 두고 온 것들은 자연스럽게 관심사에서 멀어지거든요. 이미 그것은 제 현실이 아니니까요. 

그렇지만 남겨진다는 건, 말 그대로 발 딛고 있는 그 자리에 내가 아직 남아있다는 뜻이에요. 오롯한 하나로써 존재할 때 남겨질 수는 없어요. 누군가가 '떠나갔을 때' 남겨진다고들 합니다. 그러니까 나와 상대가 함께 했던 곳에 물리적으로 나 혼자만 존재한다는 거고요. 떠난 상대가 말하는 ‘과거’가 나의 ‘현재’인 거죠. 그렇게 조금씩 공간의 격차가 벌어지면서 서로 다른 시간대에 살기 시작합니다. 선형으로 지각되는 우리의 시간대에 현재는 언제나 미래의 뒤에 있잖아요. 나만 빼고 훌쩍 다음 스텝으로 넘어간 상대가 못내 미워진다거나, 분명 충분했던 나의 현재가 미덥지 않아질 때도 있을 거예요.

그래서 저같이 작은 미련에도 꼬박 밤을 새우는 사람에게 남겨진다는 건 두려움에 가까운 일인 것 같아요. 꼭 두 개인의 관점이 아닌 회사나 학교 같은 환경에서도 마찬가지고요.

우습지만 최근 이 생각을 하게 된 계기는 애인이 출장을 떠날 때였는데요. 일주일이 채 되지 않는, 그러니까 남겨졌다고 말하기에도 민망한 상황이었어요. 사실 저도 그렇게 과몰입할 생각은 없었지만, 쑥갓이 남아있어서 어쩔 수 없었어요.

얼마 전 전골에 올려 먹을 용으로 제철은 아니지만 마트에서 쑥갓을 한 움큼 사두었거든요. 쑥갓은 금방 시들어서 자주 사는 재료는 아니지만, 쑥갓 파스타 레시피를 우연히 봐두었기 때문에 많이 남으면 파스타에 넣어야지 하는 요량으로요. 그렇게 쑥갓 파스타를 해 먹었는데 너무 맛있는 거죠. 분명 쌀쌀해지는 날씨인데도 봄을 먹는 듯한 느낌이랄까요. 봄이 기다려지는 맛이었어요. 둘이 한가득 만들어 허겁지겁 해치웠는데도 한 번 더 해먹을 양의 쑥갓이 남아서 조만간 또 해 먹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아차, 애인의 해외 출장 스케줄을 깜빡해 버린 거예요. 각자의 일상을 보내다 보니 요리할 시간이 없어서 그렇게 애인은 부랴부랴 출장을 떠나고 저와 쑥갓이 남아버렸습니다.

애인이 돌아오고 제가 요리할 수 있는 시간이 될 만한 시간일 즘에는 분명 쑥갓이 시들 것 같아서, 쑥갓을 혼자 두 번에 나누어 파스타로 만들어 먹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리고 어느 평일 저녁 파스타를 만들어 먹었고 여전히 맛있었어요. 심지어 새로 들여온 비네거를 넣었더니 좀 더 맛있게 되었더라고요. 문득 ‘이 쑥갓 파스타도 애인이 먹어보았으면 좋았을걸’로 생각이 꼬리를 물더라고요. 그렇게 쑥갓 파스타와 남겨진 채 이 글을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애인과 붙어 다니는 성격은 되지 못해서 딱히 징징거리려고 쓴 글은 아니었고요. 연애 감정에 국한해 말하고 싶은 것도 아니었지만 아무튼 전말은 그랬습니다. 다만 제가 프랑스로 떠날 때 애인이 남겨진 사람이었기 때문에, 쑥갓 파스타를 먹으며 비로소 짧게나마 역지사지를 체감했다고나 할까요.

진짜로 남겨진 상황이라면, 남겨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면. 현실을 살아가면서도 불현듯 찾아오는 먹먹한 기분은 어떻게 해소할 수 있을까요? 아마 쑥갓 파스타를 맛있게만 즐길 수는 없을 것 같아요. 쑥갓은 시들기 전에 먹어 없애면 되지만, 시든 마음은 없앨 수 없어 그대로 묻어야만 하거든요. 그래도 꾸역꾸역 먹어볼 순 있을 것 같아요. 상해 버릴 재료가 아까워서 어떻게든 만들어 먹는 쑥갓 파스타처럼요. 
남겨진 쑥갓 파스타
*정고메님 레시피를 참고했습니다
~함께 먹은 쑥갓 파스타와 혼자 즐긴 쑥갓 파스타~

재료

(필수)

쑥갓 한 움큼
파스타 1인분
올리브오일
다진 마늘
레몬즙(없다면 비네거도 좋아요)
소금, 후추


(기타)
빵가루
페퍼론치노

만드는 법
1) 파스타는 끓는 물에 7분 정도 삶아줍니다. (스파게티 기준)
2) 쑥갓은 이파리 부분 일부를 통째로 남기고 나머지는 쫑쫑 다져줍니다.
3) 팬에 올리브오일을 두르고, 다진 마늘을 약불에 볶아 향을 내줍니다(매콤함이 당긴다면 페퍼론치노를 부숴 넣어주세요).
4) 마늘향이 배인 올리브유에 소금간을 하고, 2의 쑥갓을 넣어 잠시 볶아줍니다.
5) 면수를 넣어 녹진한 오일 소스를 만들어 줍니다.
6) 파스타 면을 넣고 빠르게 볶아 면에 소스를 코팅시켜 줍니다.
7) 불을 끄고 레몬즙을 넣어 산미를 더해줍니다.
8) 그릇에 담고 쑥갓 이파리와 빵가루를 뿌려주면 완성!
솔솔 올라오는 쑥갓의 향긋함이 파스타 전체를 감싸는 맛이에요. 빵가루를 마지막에 뿌려주면 자잘자잘한 식감을 더해주어 재미있어요. 겨우내 먹는다면 어쩐지 봄을 기다리는 맛이 되고, 봄에는 제철을 만끽하는 풍미를 선사할 거예요. 팁을 드리자면 쑥갓은 너무 익히지 말 것. 향이 죽어버려요. 그리고 레몬즙은 쑥갓의 맛을 받쳐줄 정도로, 존재감만 살짝 드러나게 더해줄 것. 산을 많이 넣으면 마찬가지로 쑥갓의 향이 가려져 온전히 즐기기 어렵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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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D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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