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원에는 쥐가 많다. 어느 동물원이나 그렇다. 관람객의 눈에는 안내판에 적히지 않은 쥐가 거기 있는 것이 혐오스러울 수 있지만, 동물원 동물들은 공식적 전시 동물이 아닌 쥐와 친숙하게 지낸다. 어차피 사람이 준비한 먹이는 풍부하기 때문에 쥐와 먹이를 두고 다툴 일은 없다. 한국 대부분의 동물원에서 전시하지만 인기는 없는 마라(Dolichotis patagonum)가 밥을 먹을 때면 시간 맞춰 나타나던 쥐가 몇 마리 있었다. 실험용으로 흔히 쓰이는 흰쥐(Rattus norvegicus)였다. 마라와 흰쥐는 같은 쥐목(Order Rodentia)이니 대충 식단도 맞았을 것이다. 설치류를 뜻하는 ‘Rodents’는 ‘잘근잘근 씹다’라는 의미의 라틴어 ‘rodere’에서 왔다. 흰쥐와 마라 두 종의 쥐가 낡고 인위적인 느낌이 물씬 나는 나무 데크에 모여 한국의 마트에서 파는 당근과 양배추, 식빵을 씹는 모습은 마치 B급 외계영화의 한 장면 같다. 그 흰쥐들은 산 채로 스라소니의 먹이가 되기 위해 동물원에 들어왔다가, 대대로 철창에 갇혀 사는 바람에 사냥에 소질이 없어진 스라소니가 데면데면하게 석방한 개체들이다.
한 종의 절멸을 꾀한 역사
쥐들과 적당히 어울려 사는 동물원 동물들과 달리, 우리 인간은 쥐가 나타나면 대개 기겁한다. 마치 이 세상에 있어서는 안 되는 존재인 양 혐오와 공포를 느낀다. 순간적으로 어떻게든 죽여야 한다는 생각에 빠져들고 만다. 어떤 종을 시급히 죽여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그동안 우리는 그 동물이 어떻게 죽음을 맞이할지는 고려하지 않았다. 죽임을 당하는 동물이 하는 경험과 동물이 죽는다는 결과를 분리하지 않았다. 21세기가 되어서야 가축의 도살이나 실험동물의 인도적 죽임을 법제화하는 움직임이 나타났고, 죽일 필요가 있을 때는 죽이되 그 과정에서 죽임을 당하는 동물의 고통과 죽이는 사람이 느끼는 충격을 최소화해야 한다는 것이 이 시대의 동물 윤리로 자리 잡고 있다. 죽임당하는 동물의 복지까지도 중요하게 여기기 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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