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심이 사라지는 장소에 대하여
2024.3.8. 열네번째 이야기
70대 아버지, 30대 두 딸이 함께 같은 주제로 글을 써내려가는 뉴스레터 '땡비'
땡비에서 나눠볼 오늘의 이야기는 🐝나의 해우소입니다. '해우소'는 사찰에서 화장실을 이르는 말인데 말 그대로는 근심을 푸는 곳을 뜻합니다. 여러분은 걱정이 머리 속에 가득찰 때 가는 곳이 있나요? 근심거리를 내려놓을 수 있는 곳이 어디인지 곰곰히 생각해보았습니다. 오늘 땡비와 함께 나만의 해우소에서 모두 훌훌 털어내면 좋겠습니다. 💌
오븐 스프링(Oven Spring)(@아난)

걸쭉한 미색의 카스테라 반죽을 동그란 원형 빵틀에 붓는다. 예열이 다 된 오븐 문을 열면 더운 공기가 얼굴을 때린다. 서둘러 빵틀을 오븐 가운데에 넣고 얼른 오븐 문을 닫는다. 165도에 35분으로 설정해 두고서 오븐 앞에 두었던 카메라로 동영상 촬영을 서둘러 시작한다. 점점 부풀어 오르는 빵반죽을 찍어야 하기 때문이다. 오븐에 반죽을 넣으면 뜨거운 열기로 가스가 방출되면서 빵의 부피감이 커진다. 이를 오븐 스프링(Oven Spring)이라고 한다. 말 그대로 용수철처럼 빵이 구워지면서 반죽이 부풀어 오르는 것이다.


항상 먹음직스러운 빵이 나오기는 어렵다. 온도를 잘못 맞추면 이상한 풍미의 빵이 되거나 조금만 더 저으면 딱딱한 케이크가 되어 나온다. 정확한 재료 계량부터 온도, 시간까지 딱 맞게 들어가야 오븐에서 맛있는 빵이 구워진다. 빵이 완성되었다고 해서 끝이 아니다. 마침내 반죽을 오븐에 넣고 돌아서면 초토화된 주방이 펼쳐져 있다. 오랜 시간 서서 작업하기 때문에 발바닥도 시원찮은 경우가 많다. 그렇지만 베이킹 세계에서의 이런 고난은 과정에 더 집중하게 하고 결과를 더 희열 넘치게 만든다.


부정적인 에너지에 압도될 때면 나는 먹고 싶은 빵을 생각한다. 이리저리 유튜브를 탐험하며 마음에 드는 레시피를 찾고, 주중에 재료들을 장바구니에 담아 주문해 둔다. 드디어 주말이다! 내가 먹을 빵이기 때문에, 내 맘대로 여러 재료와 레시피를 조합하여 실험하듯 빵을 만든다. 잠옷 차림으로 귀가 터질 듯이 좋아하는 락을 틀어놓고서 계량을 한다. 순간의 타이밍을 놓치지 않기 위해 재료들을 휘젓는 것에 집중한다. 그 순간만큼은 세상에 빵반죽과 나만이 존재하는 느낌이다.


오븐을 고등학교 때 처음 만났다. 그때부터 빵을 만들 때마다 나는 근심의 무한고리를 끊을 수 있었다. 근심이 근심을 낳으며 뻗어나갈수록 내 에너지가 소모되기 마련인데 오븐 앞에 서면 그 과정에서 벗어난다. 그래서 대학교 자취생 때 연이은 이사에도 나는 미니오븐을 품에 안고 있었다. 밀가루, 물, 달걀, 우유라는 각자 존재하던 재료들이 한데 모여 오븐에 들어가면 무언가가 되어 나오는 게 늘 신기했다. 전혀 결과물을 예측할 수 없는 모양의 가루와 액체들이 근사한 케이크나 포카치아 같은 빵이 되어 나올 때면 묘한 성취감도 느끼며 뿌듯해진다. 잘 구워진 빵을 사람들과 나누었을 때 그들이 보내주는 고마움, 칭찬, 웃음들이 내게 또 에너지가 되어 돌아온다. 그래서 빵 굽기 전에는 걱정으로 너덜너덜했던 내가 빵을 다 굽고 나면 에너지가 차올라있다.


오븐 안에서 천천히 부풀어 오르는 오븐 스프링을 보면 그 빵이 꼭 나 같기도 하다. 그간의 노력들이 헛되이 되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해 뜨거운 열기 속에서도 자신을 펼치려 애쓰는 모습처럼 느껴진다. 빵이 점점 부풀어 오르는 모습을 지켜보는 게 빵이 커나가는 느낌 같아 뭉클해지고 대견하다. 그래서 베이킹을 하다 보면 반죽이 내 고민이나 근심을 다 가져가 준다. 뜨거운 오븐 안에서 열기에 근심은 날아가버리고 오히려 내가 힘을 얻는다. 그래서 빵을 구울 때마다 오븐 앞에서 떠나지 못하고 까치발을 하고서 총총 거리며 오븐 스프링을 늘 찍어둔다. 핸드폰 사진첩에서 그 영상들을 여러 번 돌려보면 환상적이다. 따뜻한 기운이 퍼져나가는 오븐 안에서 그 에너지가 온전히 와닿는다.


빵을 구울 여유가 없는 평일에 근심이 스멀스멀 마음으로 찾아오면, 나는 집베란다 한 켠에 자리 잡은 오븐을 그냥 쳐다본다. 쳐다보기만 해도 마음이 편해진다. 오븐에 무언가를 넣기 위해 고민하는 순간부터 만들고 나누는 모든 과정에서 나는 치유된다. 내가 엉망이든 멋진 모습이든 상관없이 언제든 내가 애쓰지 않아도 해우소를 찾아갈 수 있도록 가장 편한 곳에 한 칸 만들어두었다. 벽에는 좋아하는 캐릭터가 빵을 굽는 포스터를 붙여두고서 반죽기와 오븐이 떡 하니 자리 잡은 것을 보면 행복하다. 존재만으로도 나에게 온기를 주면서 힘을 더해주는 오븐이 있어 오늘도 마음 한 켠 고민을 싹 날려 보낸다!

기장대로(@못골)


걸어가는 순간은 생각을 정리하고 하루 삶을 반성하여 내일을 계획하게 된다.

요즘처럼 인간에게 걷는 기능이 소홀해진 날들은 인류 역사에 비하면 극히 짧다. 지구 나이 45억 년 중에 인류가 태어난 시기는 500만 년 전이다. 인류가 오늘날과 같은 문명 생활을 누리게 된 시대는 불과 200년이 조금 넘는다. 영국에서 시작된 산업혁명 이후라고 하니 지금과 같은 인간으로 적응된 기간이 불과 200년/5,000,000년이다. 산업혁명 이전의 수많은 시간 동안 인간은 걸어 다니는 동물이었다.


초등학교 4학년 말에 진주에서 부산으로 전학을 왔다. 진주는 당시 시내버스가 없었다. 어디를 이동하던 그냥 두 발로 걸어 다니는 것이 일상이었다. 부산에 와서 시내버스를 처음 보고 신기했다.

우리는 걸으며 생각하고, 계획하고, 수렵하고, 교제하던 동물이다. 오늘날 우리의 동물 본성을 가장 시원하게 보여주는 때가 걷는 시간이다. 1시간 정도가 아니라 반나절, 하루, 열흘, 몇 개월 등으로 계속 걸어 보면 그런 말들이 실감된다. 등에 진 배낭은 어느 정도 걸으니 무게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어느 정도의 무게는 적응해 버리는가 보다.


걸어서 얻는 가장 큰 수확은 해방감이다. 무엇에도 구애받지 않고 오직 내 육체의 힘으로 걸어가는 앞길에는 걸림이 없다. 걱정에서 해방감을 얻는 장소이고 행위이다. 걸으며 온갖 사고와 경험을 한다. 꽃이 피고, 잎이 지고, 새가 울고, 해가 뜨는 시간의 변동, 계절의 순환, 생명의 변화 등을 온몸으로 실감하며 나에 대해 성찰해 보는 시간이다. 


출퇴근 시 좌동에서 기장 대라리까지의 12.5km 길을 걸어가면 길 양쪽으로 차 사고로 주검이 된 많은 뱀, 고양이, 고라니, 개 등 동물들의 사체가 있다. 그리고 차에서 버린 온갖 쓰레기도 함께 뒤엉켜있다. 칡넝쿨이 스멀스멀 기어 나와 인도를 점령한다. 아침 출근길에는 달맞이꽃이 노랗게 피어 바람을 맞고 있다. 차를 운전해 가면 전혀 보이지 않는 풍경들이다. 


걸으면 살아있다는 존재감과 함께 앞으로 걸을 길을 남겨둔 여유로움으로 즐거워진다. 걷는 행위도 일종의 마취나 중독 기미가 있다. 하기야 중세 서양에는 걷는 자유도 허용되지 않아 걷는 인간들을 잡아 가두었다고 한다. 봄에는 길 양쪽에 하얀 벚꽃으로 터널을 만들어 눈처럼 꽃잎이 떨어지는 날이나, 11월 어느 날 노랗게 은행잎이 떨어져 온 세상이 노란색으로 덮이면 아침 출근길을 포기하고 그냥 어디로든 차를 운전해 기약 없이 가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야외 수업을 하고 싶어 좌동 Y고등학교로 갔고, 출퇴근 시간을 활용하여 원도 없이 걸어보고 싶어 기장 K고등학교를 희망했다. 걷고 싶어 보충수업이나 방과 후 수업을 하지 않았다. 대가를 받는 방과 후 수업은 내가 아니더라도 하고 싶어 하는 직원이 여럿 있다. 나이가 들면 아이들이 싫어지고 멀어진다는데 나는 오히려 아이들이 더 좋았다. 근무시간동안 아이들에게 성의를 다하고 가벼운 마음이 되어 집으로 향한다.


퇴근 시간 가방을 꾸려서 등에 메고 인근 가게에 들러 약간의 간식과 물을 사면 걸어갈 준비는 갖추어진다. 등산을 자주 다니기 때문에 물은 언제나 습관처럼 휴대한다. 차를 타고 가면 시간의 흐름을 체감하지 못한다. 그러나 걸으며 천천히 생각하면서 주변을 감상하며 걸으면 하루의 시간, 요일, 월과 계절감을 느끼며 간다. 봄에는 대청초등학교 정문에서 기장 고개까지 기장대로가 아닌 무곡리 쪽 길로 가면 가로수길은 모두 벚꽃으로 어우러져 있고 무곡을 지날 때쯤이면 무곡리 뒷산에는 이제 피어오른 새순으로 산이 새 옷으로 갈아입고 있다. 이때부터 시시때때로 주변 경관이 바뀐다. 산수유꽃이 노랗게 열매처럼 가지에 매달리면 겨울은 모두 가버렸구나 하는 허탈이 온다. 


기록 카드를 들고 새로 옮겨갈 근무지로 찾아갈 때쯤이면 2월 말이다. 이때는 매화가 양지바른 곳에서는 피기 시작한다. 무곡리 밭 여기저기 피어있는 하얀 매화가 봉오리를 터뜨릴 때쯤이면 이제 봄이 본격적으로 시작됨을 알린다. 매화가 시들고 나면 벚꽃이 피고 이때는 겹벚꽃처럼 보이는 연분홍의 복숭아꽃(복사꽃)이 만발한다. 밥풀때기 꽃이 피고, 노란 개나리가 초록으로 바뀌면 내가 걷는 길은 벚꽃이 어우러져 환상 속의 꽃길이 된다. 습관으로 늘 휴대하는 사진기에는 걸어가는 순간순간 눈에 들어오는 피사체를 담으며 걸어간다. 일상의 출퇴근 길이 촬영하는 시간들이고 작품 활동을 할 수 있는 기회이다. 


길 양쪽이 노란 개나리꽃들로 장식이 되면 아! 이제 본격적으로 봄이 오나 보다! 나의 퇴근길은 기장 수령산 밑에서 대라리 청강초등학교 앞을 거쳐 간다. 무곡리에서 다시 고개를 넘어가면 내리 못 미쳐 지하도로 좌회전을 한다. 이어서 석산리에서 왼쪽으로 산 밑을 꺾어 들어가면 논 옆으로 난 아스팔트 길을 따라 계속 걸어간다. 길가에 크게 자라 그늘을 내리고 있는 은행나무를 지나면 일본식 가옥이 한 채 있다. 그 집에는 늘 여름꽃인 능소화를 길러 걷는 사람을 즐겁게 해 준다. 오른쪽으로는 논에 물을 가두어 연못으로 만든 푸른색을 물 위로 드러낸 미나리꽝이다. 지금은 외국인 학교가 있는 곳이 옛날 삼양라면 회사였다고 한다. 그렇게 걸어가면 지금의 오시리아역에 못 미쳐 작은 물웅덩이가 있다. 작은 산으로 분리되었던 공수마을과 석산리 사이의 산을 포크레인으로 허물어 없애버리고 평지가 된 곳에 오시리아역이 덩그러니 서 있다. 오시리아란 이상한 역이름은 오랑대와 시랑대를 합쳐 명칭을 만들었다. ‘오시랑대역’ 이렇게 부르면 알기 쉽고 얼마나 정겨워! 왜! 우린 우리 것을 천시할까? 무슨 버터냄새가 나는 이상한 단어로 틀어서 만든 역이름이 낯설고 부끄럽다. 미나리꽝과 논에서 내려오는 물이 모두 이곳으로 모여 3~4명 정도의 한가한 낚시꾼들이 퇴근 시간쯤에는 늘 낚시하고 있다. 걸어가다가 낚시하는 광경을 구경한다. 옆에 서서 지켜보면 메기나 붕어가 가끔 올라온다. 도로에는 차들이 쉴 새 없이 다니는데 도로에서 벗어나 조금만 걸어 들어오면 이렇게 낚시할 정도의 한가한 농촌이다. 이처럼 쉽게 여유가 주어지는 곳은 흔한 장소가 아니다.      


석산리에서 송정천을 건너면 송정역에 이르고 송정역 앞 슈퍼에서 간식거리를 사서 송정 바닷가에 앉아 깔딱 요기를 한다. 송정 바닷가에 앉아 어느 날은 거친 빵을 입으로 처넣으니 삶의 덧없음이 느껴져 눈물이 난 때도 있다. 윈드서핑을 즐기던 동료 원어민이 나를 보고 인사를 한다. 수평선을 시름없이 바라보다가 엉덩이에 묻은 흙을 털고 일어선다. 구덕포를 지나 청사포, 청사포에서 오른쪽으로 꺾어 고개를 올라가면 고층 건물이 시위하듯 서 있고 그 고개를 넘어서면 좌동이다. 좌 2동이 나의 서식지이다. 12.5km 토, 일요일이면 송정에서 바닷길을 따라 공수마을, 동암마을, 서암, 다시 해광사를 지나 대변. 대변항에서 돌아오거나 한잔 술을 마시고 거나해져 벗과 함께 버스를 타고 오면 하루해가 저문다. 걷는 그 순간이 즐거움이다. 걷는 길이 나의 감정 해우소이고 그 시간이 해우 시간이다.

장독대에 묵혀둔 슬픔 하나. 그리고 둘. (@흔희)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여 적응하는 것을 돕기 위해 1년간 휴직을 했다. 그간 일과 육아를 병행하면서 지쳤던 나를 돌보는 시간을 보낼 수 있기를 기대했다. 하지만 나의 육아휴직은 결혼 10년 차와 맞물려 권태기의 서막이 열리는 것과 함께 시작되었고 남편과의 냉전은 생각보다 길어져 장기전이 예상되는 시점이었다.


 사람이 10년을 함께 살을 맞대고 지내다 보면 빤히 예상되는 것들이 있다. 싸움에 대한 서로 다른 대응도 이미 수차레 반복되었고 그것은 일정한 패턴으로 굳어져가고 있었다. 싸움은 표면적인 것이었다. 땅속에서 줄줄이 이어져있는 고구마를 캐듯 우리의 권태기는 10년간 캐캐묵은 많은 사건들과 감정들이 뒤엉켜 똬리를 틀고 있었다.


 대화 없이 의무감으로만 지내는 생활에는 화목도 갈등도 없었다. 어떤 때는 이렇게 표면적으로나마 고요하게 지내는 게 갈등의 소용돌이에서 허우적거리는 것보다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가도. 어떤 때는 감정이 널을 뛰며 소리를 내지르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화장실로 들어가 샤워를 했다. 정수리부터 퍼부어대는 물줄기를 붙잡고 숨죽여 울었고 내 감정도 내 슬픔도 물줄기 속에 함께 떠나보내버렸다. 운다고 달라지는 것은 없었지만 잠시나마 후련하기는 했다.


 차가운 침묵 속에서 정신줄을 빼놓고 싶을 때가 있었다. 갑갑해서 미칠 것 같던 어느 날 친구들에게 전화를 하여 만나자고 하였다. 그간의 사정을 들어왔던 그들이기에 긴 배경설명이 필요 없었다. 샤워를 하며 숨죽여 울었다고 말을 하니 친구 하나가 웃었다.

"누가 K장녀들 아니랄까 봐. 우리는 이런 것까지 똑같냐. 원래 울음이 효과가 있으려면 내 울음을 목격해 주는 사람이 필요한 거거든. 거실 한가운데, 소파 위에서 머리채를 붙잡고 울었어야지. 남편이 니가 우는 걸 보게 했어야지. 근데 우리는 성질이 더러워서 울음을 누군가에게 들키긴 싫은 거야. 넌 화장실이지? 나는 내 방 침대 위에서 숨죽여 울어. "

가만히 말을 듣고 있던 또 다른 친구가 깔깔거리며 웃더니 한마디를 더 보탠다.

“넌 침대지. 나는 차 안이야. 내가 출퇴근 거리가 길잖아.”


의외의 장면에서 우리가 동류라는 것을 깨닫고는 웃는다. 누군가에게 보이고 싶지 않은 나의 나약함을 감추기 위해 우리는 자기만의 우물을 팠고 그곳에서 근심과 걱정과 슬픔을 묻어두었다. 우물은 장독대처럼 주인의 감정들을 저장해 둔다. 장독대에서 겨울 내내 김치가 익어가는 것처럼 각자의 장독대에 묵혀두었던 슬픔들은 시간과 함께 익히고 삭아간다.


친구들과의 만남을 뒤로하고 집으로 털레털레 걸어가는데 엄마 생각이 났다. 엄마의 해우소는 해광사다. 내가 대학이나 취직으로 긴긴 수험생활을 하여 속을 썩일 때도 해광사에 가서 해풍을 맞으며 엄마는 견뎠고 아버지와의 갈등으로 마음이 울적할 때도 해광사를 찾았다. 해광사는 부산의 동쪽 끝에 있는 절이다. 해광사라는 이름에는 바다처럼 넓은 부처님의 가르침이 빛처럼 퍼져 온 누리를 비춘다는 뜻이 담겨 있다. 해광사에는 용왕단이라는 특이한 곳이 있다. 바다 한가운데에 바위가 있고 그 바위 위에 아슬아슬하게 용왕당이 있다. 용왕당에는 용왕을 모셔두어 절이지만 묘하게 샤머니즘의 색채도 묻어난다. 바다 위에 우뚝 솟아 있는 당집은 외롭고 처연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휴직하기 전에 반차를 내고 엄마와 데이트를 한 적이 있다. 데이트 코스의 마지막은 해광사였다. 봄볕은 따뜻하고 불어오는 해풍은 시원했다. 엄마와 나는 절을 등지고 앉아 바다 위의 용왕단을 바라보았다. 그곳에서 나는 엄마가 버텨왔던 험준한 시간들에 대해 들었다. 바다를 응시하며 덤덤하게 말하는 엄마의 목소리에는 오랫동안 묵혀와서 그것이 슬픔인지도 모를 법한 묵직한 덩어리가 자리 잡고 있었다. 엄마의 시선이 닿는 곳에 나의 시선을 두려 애썼지만 이내 실패했다. 설핏설핏 곁눈질로 바라보던 그날, 엄마의 옆모습은 문득문득 일상의 장면에서도 느닷없이 떠오르곤 한다.


그런 엄마의 해광사에 나도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편과 아이를 일터로, 학교로 보내고 차를 몰았다. 그때 엄마와 이야기를 나누었던 그 자리에 앉아 보았다. 그냥 눈물이 났다. 이른 아침 시간이라 방해받을 사람도 없었다. 이때가 기회다 싶어 바위에 걸터앉아 한참을 목놓아 울었다. 울다 보니 남편이 생각났고 아이가 생각났다. 그러다가 엄마가 생각났다. 아. 엄마도 외로웠구나. 그리고 엄마도 엄마의 공간이 없었구나. 집에서 밀려 밀려 나와 겨우 찾아 앉았던 곳이 이 바위였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휴직을 1년 해보니 집이라는 공간은 주부의 것이 아니었다. 엄마의 손길이 안 닿는 곳이 없는 집이지만 그곳에서 엄마의 공간은 없었다. 청소를 하다가도, 밥을 차리다가도 하물며 식탁 위에서 글을 쓸 때도. 가족이 나를 부르면 나는 그리고 엄마는 하던 일을 멈추고 일어나야 했다. 결혼을 아직 하지 않았던 내 친구는 자기 방의 침대 위에서 울 수 있었지만 엄마와 나는 내 공간이 없었다. 그래서 엄마는 해광사를 찾았고 나는 화장실에서 샤워기를 붙잡고 울다가 해광사까지 떠밀려 온 것이었다.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쏟아지는 해풍에 목놓아 울었던 그날. 나는 엄마의 감정에 내 감정을 함께 포개어 두었다.  


시간은 흐르고 일은 해결되기 마련이다. 긴긴 침묵의 시간을 보내고 있던 어느 날 남편은 나에게 말을 걸어왔고. 우리는 화해했다. 일상으로 돌아온 집은 온기로, 말소리로 가득하다. 그리고 밤이 되면 집은 다시 고요해진다. 남편도 아이도 잠이 든 집에서 나는 가끔 해광사를 떠올린다. 엄마에게 내 마음을 포갤 수 있었던 그날을 떠올린다. 부처님처럼 온 누리를 밝히진 못했지만 엄마가 적어도 내 마음 하나는 밝혀주었다는 것을 엄마는 알까. 장독대에 푹 묵혀두고 익힌 슬픔도 때때로 내 삶의 거름으로 쓸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준 엄마는. 나에게 엄마가 그런 빛을 주었다는 것을 알까. 내가 지금도 가끔 엄마의 옆모습을 떠올린다는 사실을 엄마는 알까. 아마도 모를 것이다. 


그냥 그렇게 계속 몰랐으면 좋겠다.

💌 지난 호 구독자 후기 (#13. 기억 속 최초의 장소)
BONG님 : 내가 어른이 되었다고 느낀 순간. 한 가정의 아버지와 딸들의 이야기 속에 어느 한 시절의 사회상황 분위기 이슈들도 함께 녹아 있네요. 덕분에 ”아 이 때는 이런 일이 있었구나“, ”맞아 나도 저때 기억이 나“ 생각해보게 됐어요.
🍯 땡비를 만들어 가는 사람들 소개
 - 못골👨🏻‍🎨 : 한 평생 아이들을 가르치고 사진을 찍어왔다. 한계를 넘어 뭐든 끝까지 가는 남다른 의지력을 지녔다.
 - 흔희👩🏻‍🎤 : 눈치를 보지않아 '인간 사이다'로 불리나 K장녀로 은은히 돌아있다. 직업 때문에 생계형 낱말수집을 한다.
 - 아난👩🏻‍🍳 : 목구멍 보이게 웃는 큰 리액션과 미친 에너지 때문에 '어린 짐승'으로 불렸다. 빵을 굽는 방구석 빵수니. 
오늘의 땡비 어땠나요? 긴 글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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