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시.사 레터 47회 (2022.03.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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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시를 쓰며 살고 있는 김소연입니다. 요즘은 동네의 안 가본 장소들을 찾아다니면서 산책을 많이 합니다. 산책을 하면서 ‘봄이 되면 이곳은 참 예쁘겠구나’ ‘여름이 되면 여기는 참 멋지겠구나’ 합니다. 언제고 어디서고 늘 무언가를 기다리고 지내는 것 같습니다. 기다리기만 하면 꼬박꼬박 나에게 찾아와준다는 점에서, 다음 계절을 기다리는 일은 더없이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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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연 시인이 사랑하는 첫번째 시💕
겨울에 쓰는 여름 시 (유계영, 『이런 얘기는 좀 어지러운가』)
여러 가지 스타일로 말해보았다
죽고 싶다는 말을
비장하게도 어리게도 아름답게도
다만 죽고 싶게도 그러다
웃음이 터져나올 때까지
물들도록
한쪽 콧구멍에 쑤셔넣은 휴지 뭉치처럼
서서히 붉어지도록
그럴 리가 없다고 말해주었다
죽으려 해도 살게 될 것이며
살려 한다면 죽도록 살게 될 것이며
다시없을 폭설이 내렸다
겨울의 땅들은 훌륭한 건망증으로
이 페이지를 반듯하게 접을 것이다
작년에도 이렇게 추웠을까
올여름에도 작년 겨울에도 너는 변함없이 묻는다
마른 머리카락이 바람의 긴 손가락을 기억할 리 없듯이
작년 겨울, 작년의 작년 겨울, 작년의 작년의 작년의
겨울은 과거로 거슬러올라갈수록
머리가 검어지는 여자들 같다
흉골 사이로 벌레가 지나가서
찰싹 때렸는데 흐르는 땀이었다
처음 본 벌레가 벽에 붙어 울고 있었다
나는 아침밥을 먹으며 오들거렸다
겨울과 무관하게
이웃집 창문에 걸쳐진 티셔츠가 반짝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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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에 겨울 시를 쓰는 사람보다 겨울에 여름 시를 쓰는 사람에게 조금 더 마음이 갑니다. 부동의 것을 가지런하게 바라보는 사람보다 술렁이는 것을 기민하게 포착하는 시에 조금 더 마음이 갑니다. 그럴 리가 없는 것이 그러할 수 있다고 단언하는 마음보다 그랬던 적이 있었나 없었나 하면서 기억에 잠시 기대는 순간에, 저편의 기억을 이편의 하루와 포개어서 지금을 더 혼돈하는 잠깐의 시간에 늘 마음이 갑니다. 그러니, 이 시는 정말 좋아하는 시일 수밖에 없습니다. 길 가다 주워온 잡동사니들을 보석처럼 잔뜩 모아둔 상자를 두 손에 들고 있다가 왈칵 놓친 듯한 세계. 방바닥에 흩어진 이것들을 하나하나 집어듭니다. 하나하나에 그때그때의 기억들이 급습합니다. 유계영의 시는 이런 순간 같습니다. 어질러진 방바닥에 두 발을 딛고 선 채로, 반가워 입꼬리를 올리며 빙그레 웃고 있는 시인 같습니다. 설명은 불필요하고 불가능하지만 실감이 오롯해져서 생기는 웃음기입니다. 선의로 가득찼지만 사실과는 멀어지는 듯하고, 간명해 보이지만 표백되어버린 듯하고, 선명할수록 거짓에 다가가는 듯하고, 신념이 강할수록 편견이 개입되는 숱한 문장들 속에서 따분해할 때가 점점 많아지는 요즘의 나는, 이 시집을 다시 꺼내 읽고 살맛이 되살아나서 웃습니다. 유계영은 나에겐 살맛이 나게 하는 시인입니다. 야릇한 웃음을 짓게 만드는 시인입니다. 머리를 감고 축축한 채로 겨울밤에 편의점으로 나섰다가 돌아오는 길이었는데, 찰랑찰랑한 얼음들이 머리카락에 매달려 달그락 소리를 냈습니다. 나는 고개를 흔들며 깔깔 웃었는데, 이런 유의 웃음과 흡사한 쾌감을 내게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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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 시집] 레이먼드 카버 시집 『우리 모두』 출간
레이먼드 카버가 소설만이 아니라 시도 썼다는 사실 알고 계셨나요? 1980년대 이후 미국문학을 대표하는 소설가이자 시인, ‘헤밍웨이 이후 가장 영향력 있는 소설가’ ‘미국의 체호프’로 불리며 모더니즘 문학을 이끈 레이먼드 카버 시의 결정판 『우리 모두』를 만나보세요.
그의 진짜 재능은 시에 있는 것이 아닐까. _황인찬(시인)
소설가로서 그는 취해 있었지만, 시인으로 그는 깨어 있었다. _김연수(소설가)
📆'세계 시의 날'을 아시나요...?
매년 3월 21일은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 시의 날' (World Poetry Day)입니다.
유네스코는 예술적 빈곤을 겪고 있는 오늘날, 시가 인간의 내면을 풍요롭게 하고, 특히 청소년들의 마음을 순화할 수 있음을 인식하고, 시 발전과 이미지 제고를 위해 '세계 시의 날'을 제정하였는데요.
코로나 팬데믹 이후 시집으로 위안을 받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판매량과 출간 종수가 점점 늘어나고 있는 추세라고 합니다. 시를 사랑하는 연령대 역시 중년층뿐 아니라 젊은 세대까지 확대되고 있다고 하고요. 😊 (문학동네시인선도 구독자님에게 위안을 주는 시집이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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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연 시인이 사랑하는 두번째 시💕
신빙과 결속 (서윤후, 『무한한 밤 홀로 미러볼 켜네』)
싸움이 끝난 뒤 깨진 화병은 누가 치우나
남겨진 사람은 조심성 없이 쓸어 담고
집 잃은 새를 보듬듯 꽃을 주워다
종량제 봉투 앞에 서게 될 때
그렇게 향기가 스민 어둠은 밤새 사라지지 않고
기나긴 복도를 생각하면
열려 있던 문들이 하나둘 닫히기 시작한다
잠들기 위해 눈감으면 비로소 눈뜨는
화병에 베인 손날의 붉은 눈
유월의 신호위반 딱지가 팔월에 날아온다
빙빙 돌려서 하게 되는 말은
멈춰야만 알 수 있는 팽이의 표정 같아
어둠이 붙잡아둔 빛과의 일화
바깥은 어떻게 어두워지기 시작했는지
잠시 멈춰 서면 보이는 것이 있고
휘몰아쳐서 뒤섞인 모든 풍경이 검정으로 갈 때
나는 섞이지 못한 색깔처럼 분명해지고
나를 바라보는 종려나무 한 그루가
물 한 번 준 적 없는 내게
눈동자 위로 흐려진 것을 공짜로 털어준다
어둠은 어둠에게만 친절한 법이지
형편없는 예의를 갖추고서
창문을 거울 보듯 한다
까마득하다는 말을 알아듣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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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윤후의 시 속에서는 어리석은 인간이 아무도 없습니다. 어리석지 않은 인간도 아무도 없습니다. 무엇을 하려고 무언가가 되려고, 혹은 무엇을 깨닫게 되기까지…… 안간힘을 쓰는 사람도 거의 없다시피 합니다. 알아야 할 것들을 언젠간 비로소 알게 되는 순간이 저멀리서 풍경처럼 서서히 다가올 뿐입니다. 낮이 밤이 되고 밤이 낮이 되는 것처럼 자연스럽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기까지, 누군가는 그것들을 잘 바라보아야 하겠지요. 때로는 골똘해야 하고 때로는 두리번거려야 할 겁니다. 골똘함과 두리번거림을 한없이 반복해야 할 겁니다. 그 ‘한없음’이 서윤후의 시에는 배후에 늘 스며 있습니다. 한없음의 태도는 고집 없이는 불가능하지만 고집을 부리면 안 됩니다. 수동적인 듯도 하지만 오롯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포기가 찾아왔다가 다시 제풀에 떠날 때까지의 시간을 견뎌야만 합니다. “기나긴 복도”와도 같은 기나긴 시간이 짧은 한 편의 시 속에 숨겨져 있습니다. 나는 서윤후가 시 속에 이런 시간을 숨기는 그만의 기술을 너무나도 좋아합니다. 찾아내지 못하게끔 꽁꽁 숨기지도 않고 잘 숨겨두었음을 자랑하지도 않아서 좋아합니다. 숨겨두는 것을 목적하지도 않고 누군가가 찾아내기를 원하지도 않는 것 같아서 좋아합니다. 서윤후의 시집을 손에 들고 읽다가, 문득 고개를 들었을 때에 내가 노파가 된 채로 앉아 있었다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이 무궁함이 나를 다녀갔다는 게 그저 좋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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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주 아름다운 시 두 편을 추천해줄 시믈리에💛는 임승유 시인입니다.
시집 『나는 겨울로 왔고 너는 여름에 있었다』와 『아이를 낳았지 나 갖고는 부족할까 봐』 등으로 꾸준히 사랑받은 임승유 시인이 고른 시 두 편을 기대해주세요. 그럼 다음주 수요일에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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