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적 행불행 / 영화 <노매드랜드>


001. 2021/4/20 화요일

안녕하세요, 00님!
안내서 다음, 어찌보면 <봉현읽기>의 첫 레터인데요.
첫 글부터 너무 무게감이 있는 글일까,
조금 걱정이 되기도 하지만...😢
누군가의 내밀한 속내를 들여다 본다고 생각해주세요.
00님의 오늘은 어떤 선택의 날이었을까요?
어떤 날이었건 이 메일이 00님에게
작은 위로와 조용한 응원이 되었으면 합니다.

오늘도 메일을 열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봉현

선택적 행불행

살고 싶다.

그런 생각이 들었을 때는 모든 게 너무 힘든 때였다. 사는 게 너무 벅차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몰라서, 살아있는 게 너무 괴로워서. '죽고 싶다'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그런 생각이 들 만큼 절실하게 '살고 싶다'라는 마음이었다.

살고 싶다는 농담. 허지웅 작가의 책. 사람들은 그가 암 투병 후에 변했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그가 딱히 변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한 사람이 살면서 이런저런 일을 겪고, 좌절하고 견뎌내고, 그리고 아마 또 좌절할- 살아가는 시간의 일부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호불호가 갈리는 작가지만, 나는 그의 글을 좋아한다. 내 안에 감춰둔 냉소적인 부분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기도 하고, 무표정한 얼굴로 툭 던지는 듯한 말이 내게는 눈물이 날 만큼 위로가 되기도 했다. 내가 봉현 읽기를 시작한 계기처럼, 허지웅 작가의 글이 내게 그런 경우 중 하나였다.

◻️
살다 보면 그런 날이 온다. 퀭한 눈으로 허공을 노려보고 누워 천장이 천천히 내려와 내 몸을 눌러오는 것을 느끼고 꼼짝없이 잠을 설치며 그것이 얼마나 무겁고 잔인한지 알게 되는 날. 바닥에 뒹굴어 뺨에 닿았을 때 광대 깊숙이 울림을 느끼며 그게 얼마나 딱딱하고 차가웠던 것인지 깨닫게 되는 날이 말이다.

◻️
매일 밤 침대에 누워 잠이 들기 전 그런 생각을 한다. 지금 이 시간에도 누군가 내가 보았던 천장과 바닥을 감당하고 있을 거라고 말이다.


가장 인상 깊은 36p의 천장과 바닥. 
고작 몇 페이지의 문장을 통해 그가 경험한 순간을 내가 어찌 알 수 있겠냐마는, 백만 분의 일의 공감으로라도, 그 장면을 떠올리며 천천히 글을 읽었다. 무섭거나 두려운 것이 아니라 이상하리만치 고요한 마음이었다. 고통이란 계량화되지 않고 비교할 수도 없으며, 천 명에게 천 가지의 천장과 바닥이 있다는 그의 말처럼, 나 홀로 누워 나의 천장과 바닥의 높이를 재본다. 나의 죽고 싶다는 말과 살고 싶다는 말은 어느 정도의 무게일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기력에 아무것도 하지 않았던 침대 속 동굴, 이제는 영영 만날 수 없는 명확한 죽음을 원망하며 거실 바닥에 주저앉아 울던 시간, 나를 미워하던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뒷모습. 어찌어찌 시간이 지났고 이제는 다 잊었다고 믿고 싶지만, 여전히 나는 그 동굴과 바닥의 나를 기억한다. 불행했다는 단어로 표현하기에는 그 단어를 평생 안고 갈 자신이 없다.

뜨거운 햇살과 서늘한 바다 사이에서 바다거북이와 자유롭게 유영하던 어느 여름, 지구 반대편 낯선 나라에서 발길에 스치는 더럽고 이상한 것들에도 즐거웠던 한때, 눈이 펑펑 오는 풍경을 외면하고 사랑하는 이와 낮잠 자던 이름 없는 날. 그런 순간 또한 행복했다는 단어만으로 규정지을 수 없다.


불행을 돌아보니 그때보다는 나아진 내가 행복에 가까운 걸까.
행복을 돌아보니 더 이상 그 순간을 누릴 수 없는 나는 불행한 걸까.

나는 행복이 뭔지 점점 모르겠다. 동시에 불행이 뭔지도 모르겠다. 나이가 들고 시간이 가면 갈수록, 어제와 오늘과 내일의 경계가 불분명해지고 매일 내 감정이 혼란스럽다.


◻️
상처는 상처고 인생은 인생이다. 상처를 과시할 필요도, 자기변명을 위한 핑곗거리로 삼을 이유도 없다. 다만 짊어질 뿐이다. 짊어지고 껴안고 공생하는 방법을 조금씩 터득할 뿐이다. 살아가는 내내 말이다.

◻️
나는 행복이 뭔지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매대 위에 보기 좋게 진열해 놓은 근사한 사진과 말잔치가 행복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안다. 아마 행복이라는 건 삶을 통해 스스로에게 증명해나가는 어떤 것일 테다.


언젠가 읽은 글에서 행불행은 결론이 아니라 선택이라고 했다. 하지만 오늘 아메리카노를 먹을까 라테를 먹을까도 아니고, 말만 선택이지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선택이다. 그 무엇을 택한다 해도 확실한 행불행이 따라오지는 않는다. 뭘 선택하든 행불행이 공존한다는 생각이 들어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을 때도 있다.

하지만 결국 나는 선택을 해야만 한다. 바램과는 달리 자주 불행의 접시가 무거워지지만, 내 의지로 계속 행복의 접시 위에 무엇인가 올린다. 저울이 이리저리 기울며 간신히 수평을 유지한다.

지금의 나는 지금이 행복하다 불행하다 단정짓지 않는다.

천장과 싸워 이긴 자들, 그리고 바닥과 싸워 이겨본 자들만이 오직 천장과 바닥 사이에 펼쳐진 삶을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겸허하고 담대한 마음으로 타인을 돕고 스스로를 구하며 살아갈 수 있는 게 아닐까.

🏷️ 살고 싶다는 농담 / 허지웅

🎞️난 작별인사는 안해요.

저는 오늘 <노매드랜드 Nomadland> 라는 영화를 보고 왔어요. 우연히 본 예고편 하나에 마음이 끌려, 아무런 정보 없이 혼자 영화관에 다녀왔습니다. 100석이 넘는 영화관에 저 뿐이더라구요. 
최근 <미나리>와 함께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가장 주목하는 작품인 <노매드랜드>는 프란시스 맥도맨드 주연의, 자연과 길 위를 떠돌며 차에서 살아가는 유랑자 '노매드' 들의 이야기입니다. 저는 여러모로 영화를 보는 내내 무척 힘들었어요. 저도 배낭 하나 매고 무작정 세상을 떠돌아 다닌 2년의 시절이 있었거든요. 그때의 제 모습이 겹쳐 보이기도 했어요. 하지만 어린 시절의 저와는 달리,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들어 이제는 모든 걸 포기하고 삶을 체념한 듯, 혹은 스스로 행복하지 않겠다 마음먹은 것만 같은- 어떤 고집스런 선택들이 안타깝기도 했어요.

하지만 마지막 부분에서 그들이 이렇게 살게 된, 마음에 품어둔 어떤 이야기를 들으며- 저는 안도와 슬픔을 동시에 느끼며 엔딩 크레딧이 다 올라갈 때까지 한참을 앉아있다가 왔어요.

자세한 이야기는 스포일러가 될테니, 예고편에 나오는 주인공 '펀'의 시를 읽어드리는 것으로 마무리해볼까 해요. 📜

Nomadland,2020
그대를 여름날에 비할까? 
그대는 여름보다 사랑스럽고 부드러워라 
거친 바람이 5월의 꽃봉오릴 흔들고, 
우리가 빌려온 여름날은 짧기만 하네. 

때론 하늘의 눈은 너무 뜨겁게 빛나고 
그 황금빛 얼굴은 번번이 흐려진다네. 
아름다운 것들은 아름다움 속에서 시들고 
우연히 혹은 자연의 변화로 빛을 잃지만 

그대의 여름날은 시들지 않으리, 
그댄 그 아름다움을 잃지 않으리. 
죽음도 그대가 제 그늘 속을 헤멘다고 
자랑 못 하리라. 

그댄 영원한 운율 속에 시간의 일부가 되리니 
사람이 숨을 쉬고 눈이 보이는 한 
이 시는 살아남아 그대에게 생명을 주리. 

/Shall I compare thee to a summer's day 
(셰익스피어 소네트 18번)

우리의 삶은 남들만큼 비범하고, 
남들의 삶은 우리만큼 초라하다.

/ 살고 싶다는 농담, 허지웅
Q. 00님의 저울은 어느 쪽으로 기울어 있나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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