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에는 최민서 인턴기자가 서울국제여성영화제의 기대작을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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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SIWFF)가 8월20일 개막했습니다. 영화를 통해 연대를 만들어가는 서울국제여성영화제는 세계 여성 영화의 현재와 흐름을 조망하는 영화제인데요. 상업 영화에서 만나보기 어려운 지역·세대·젠더·계층을 넘나드는 영화들을 만나볼 수 있는 자리이기도 합니다.
올해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슬로건은 2025년의 슬로건 ‘F를 상상하다’를 이어갑니다. 이때 ‘F’는 ‘Flicker’로 우리가 끊임없이 흔들리고 실패하며 변화하는 존재임을 드러내는 ‘깜박임’을 의미합니다. 빛의 깜박임 속에 탄생하는 영화를 통해 관객들은 실패(Failure)할 수 있는 자유(Freedom)와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번 영화제 작품 공모에는 경쟁, 비경쟁 부문 통틀어 총 125개국에서 4115편이 출품되었습니다. 세계 각지에서 활발하게 활동 중인 여성 창작자들의 현재는 물론 여성영화의 역사를 발굴하고 재조명하는 작품도 만나볼 수 있습니다. 국내에서 접하기 쉽지 않은 분쟁 지역의 영화를 소개하고 디지털·AI 등 과학기술의 발전을 성평등 관점에서 사유하는 섹션도 운영합니다.
단단한 연대를 만들어 갈 영화들이 관객들을 기다리고 있는 서울국제여성영화제. 놓치면 아쉬운 작품들을 소개해보려고 합니다.
🎫이민숙, <잃어버린 말들>
이민숙 감독의 <잃어버린 말들>은 그가 열두 살 때 스스로 세상을 떠난 어머니에 대한 기억을 찾아 나서는 다큐멘터리입니다. 감독은 어린 시절을 보낸 캐나다의 토론토와 자신의 출생지인 한국의 화순을 오가며 사람들과 장소를 다시 찾아갑니다. 감독이 만난 사람들 중 가장 중요한 인물은 그의 아버지입니다. 아버지는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모국어로 말하지만 어머니와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기도 합니다. 감독과 아버지, 통역사 세 사람이 한자리에 있어야 대화가 흘러갑니다.
감독은 화순에서 삼촌, 이웃 등 어머니의 주변인들을 만나고 호적, 검시 보고서 같은 문서를 살펴보기도 합니다. 흐릿한 기억을 재구성하고 잊히지 않는 진실을 마주하며 뒤늦은 애도를 이어가는 영화입니다. 영화는 사실과 허구의 역사를 엮어내며 슬픔을 표현할 말을 잃었을지라도 해야 하는 이야기가 있음을 보여줍니다.
어머니의 죽음 후 기록과 구술사에 의존해 삶을 다시 복원하는 일은 그레이스 M. 조의 <유령 연구>를 떠올리게 했습니다. 영화가 남긴 기억과 애도 과정을 조금 더 깊이 들여다보고 싶다면 함께 읽어 봐도 좋을 듯합니다.
🎫알리사 코발렌코, 마리샤 니키툭, <흔적들>
<흔적들>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과정에서 성폭력과 고문을 겪은 뒤에도 침묵을 거부한 우크라이나 여성들의 목소리를 조명합니다. 포로로 잡혔다가 인권 활동가로 거듭난 이리나 도브한은 우크라이나 탈환 지역을 찾아다니며 분쟁 지역 피해 여성들의 증언을 기록합니다. 영화는 전쟁범죄를 기록한 다큐멘터리를 넘어, 역경을 이겨낸 여성들의 회복력과 서로의 곁을 지키는 연대의 힘을 보여줍니다.
알리사 감독은 2014년 러시아가 점령한 돈바스에서 감금과 성폭력을 겪은 생존자입니다. 자신의 경험을 공개적으로 증언하면서 우크라이나 내에 전시 성폭력 논의가 사회적으로 금기시되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는 침묵과 낙인을 깨기 위해 생존자 단체와 함께 여성들의 증언을 기록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감독이자 전시 성폭력 생존자 공동체의 일원이라는 두 가지 위치에서 영화를 만들었다고 말합니다. 감독은 섬세한 영화 언어를 통해 전시 성폭력 생존자 여성의 회복력과 연대의 힘을 담아냈습니다. ‘우리 없이 우리에 관한 것은 없다’는 원칙을 중요하게 여기며 영화가 “전 세계적 행동과 연대를 촉구하는 외침이자, 모든 폭력의 생존자에게 보내는 희망과 연대의 메시지”라는 것을 강조합니다.
🎫손명아, <트로피>
"14살 재일조선인 소녀 ‘소희’는 K-POP 아이돌 공연에 가기 위해 아버지 ‘상주’가 조국 북한에서 받은 훈장을 팔아버린다." 한 줄짜리 시놉시스만 봐도 영화가 궁금해집니다. 평범한 사춘기 소녀를 통해 재일 조선인의 삶을 드러내는 <트로피>는 재일 조선인 3세인 손명아 감독의 정체성과 맞닿아있습니다. 니시카와 미와 감독의 조감독으로 일하던 시절 “당신 안에는 폭탄이 있어. 그 폭탄을 작품으로 만들어보는 건 어때?“라는 말을 들은 것이 작품의 출발점이 되었다고 합니다.
디아스포라 정체성과 성장을 그린 작품이지만 역사적 배경을 직접적으로 다루진 않습니다. 재일 조선인의 역사나 조선학교 설립 과정, 이념 갈등을 설명하기보단 관객이 소희의 감정선을 따라가게 만듭니다. 당사자만이 할 수 있는 섬세한 연출로 개인적인 소재를 보편적인 이야기로 풀어나갑니다. 영화를 보기 전후로 재일 조선인이 남긴 잔상을 더 오래 마주 하고 싶다면 양영희 감독의 <카메라를 끄고 씁니다>를 함께 읽어 보시기를 추천해 드립니다. 시대와 가족의 비극을 담아낸 에세이인 동시에 그 자체로 재일 조선인의 역사를 돌아볼 수 있는 자료이기도 합니다.
🎫마민지, <착지연습>
마민지 감독의 <착지연습>은 성폭력 피해 이후 자신만의 속도로 일상에 착지해 나가는 피해 생존자와 연대자들의 기록입니다. 이들은 예술-회복 공동체 ‘상여자의 착지술’에 모여 함께 울고 웃고 예술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운영하며 안전한 공유지를 확장해 나갑니다.
치유와 회복을 위한 안전한 공간을 만드는 과정은 쉽지만은 않았습니다. 마민지 감독은 다시 움직이려고 고군분투하는 과정을 있는 그대로 담아냅니다. 영화제 슬로건 속 ‘깜박임’의 의미를 다시 곱씹게 만듭니다. 오류나 불확실성으로 여겨지는 빛의 깜박임은 우리가 계속해서 변화하는 존재임을 드러내는 삶의 신호인 겁니다. 영화는 회복 성공이나 실패를 논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만의 속도로 깜박거리는 ‘착지 연습’과 연대를 그려갑니다.
해당 작품을 비롯한 ‘지금 여기, 한국영화’ 섹션은 동시대 여성 담론을 조명합니다. 경력단절 이후 피아노를 통해 생의 활력을 찾아가는 자전적 에세이 <오후의 가정 음악>, 국내 최대 성매매 집결지 미아리 텍사스 철거 뒤 가려진 이야기와 취약한 생명을 다룬 <관리처분계획-미아리 텍사스 편> 등 폭력과 혐오를 헤쳐나가는 영화들도 만나보시길 바랍니다.
몇 년 전 여성영화제에서 노동 관련 다큐멘터리를 본 적이 있습니다. 스크린을 통해 경험하지 못한 삶의 풍경을 마주할 수 있었는데요. 다양한 질문이 오가던 GV를 듣고 새로운 세계를 품에 안은 채 극장을 나선 것이 기억이 납니다.
서울국제여성영화제는 8월26일까지 이어집니다. 소개한 영화 외에도 여성의 삶과 세계를 각기 다른 방식으로 그려낸 영화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마음에 오래 남는 작품을 만나셨다면 ‘뉴스레터 의견 남기기’로 답장으로 이야기 나누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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