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곤, 도시인들은 대개 요양원에서 생을 마감합니다. 특급호텔식 요양원이냐, 아니면 1실 6인용의 서민식 요양원이냐의 차이만 있을 뿐입니다. 멀쩡한 분들이 자식들에게 떼밀려 요양원에 들어갔다가 환자로 죽는 경우도 보았습니다. 80년대까지만 해도 요양원은 없었습니다. 소수의 양로원만 있었는데, 부모를 양로원에 맡기는 자식들은 불효자식 소리를 들었습니다. 지금은, 요양원 입소를 거부하는 부모가 불량부모로 치부됩니다.
이곳 시골 어른들에게 요양원은 먼 이야기입니다. 생을 마감하기까지 당신의 손발을 움직이며 당신의 호흡으로 숨 쉬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에 구십 넘은 할머니는 세상을 뜨기 이틀 전, 호미로 밭을 매다가 정정한 목소리로 우리 부부의 안부를 물었습니다. 구십 넘은 또 다른 할아버지는 아침 작업과 동네 산책을 일찍 마치고 잠시 누웠다가, 그대로 생을 마감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요양원에 가만히 누워 죽음을 기다리는 도시인들, 죽는 순간까지 손발을 움직여 일하며 자기 호흡으로 숨 쉬는 시골 사람들, 그 가운데 생명의 질은 어느 쪽이 나은 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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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 책]
성경에는 예수님께서 여인들을 일대일로 마주하시는 장면들이 나온다. 예수님은 여성을 남성에게 종속된 존재로 대하시지 않았다. 때로는 직설적이고 파격적이었다. 그래서일까. 여인들은 그 앞에서 담담하게 자신의 인생을 꺼내었다. 슬로브핫의 다섯 딸들, 모세 살리기 프로젝트에 참여한 여성들(어머니 요게벳, 누이 미리암, 히브리 산파 십브라와 부아, 바로의 딸), 미리암과 십보라, 라합과 룻, 드보라 사사와 한나, 에스더와 여선지자 훌다,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부활의 첫 증인이 된 막달라 마리아, 마르다와 마리아, 욥바의 여제자 다비다… 성경 속 여성들의 얼굴은 다양했고, 남성 인물들의 보조적인 역할이 아닌 주체적이고 진취적인 면모를 볼 수 있다. 그들의 신앙적 행위는 누구의 강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직관과 민첩함, 모험심과 따뜻한 성품 가운데 주체적이며 독립적인 신앙적 결단에서 비롯됐다. 《너는 주의 완전한 딸이라》의 저자 강호숙 박유미 두 여성 신학자는 유교 가부장적 질서 위에 비성경적 해석을 더해 여성을 바라보는 교회 안에서 고통받고 있을 후배 여성들에게 공감과 위로의 편지를 전한다. 자존감, 여성다움, (비)출산, 비(결)혼, 성 인지 감수성, 자유, 평등, 시민의 삶 등 누군가는 문제의식 없이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지만, 누군가는 원인도 모른 채 죄의식과 싸우고 있을지도 모르는 13가지 주제들이다. 여성에게 편향된 책은 아닐까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 여성과 동등한 자리에서 교회 공동체에 속해 온 남성이라면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들이다. 머지않아 이 주제들을 논하는 일이 필요 없어지고 식상한 일이 되어 버리는 날이 오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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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의 정원]
이덕주, 전 감신대 교수
작년 『주문도 한옥예배당 100년』 책을 쓰고 나서 생긴 '마음의 빚'이 있었다. 그 빚은 6.25전쟁 당시 진촌교회(현 서도중앙교회) 담임 나정희 전도사의 회고록을 읽다가 생긴 것이다.
"1950년 7월 6일 아침 일찍 교회 청년들을 소집했다. 교회로부터 4-5Km 떨어진 수섬 쪽에서 많은 사람의 시체가 떠밀려 와 심한 악취가 동리까지 들어오므로 시체들을 파묻기 위해 삽과 곡괭이를 가지고 청년들과 함께 수섬까지 가서 약 13명 정도의 시체를 파묻었다."
주문도 남단의 무인도 수섬에 떠내려온 시체는 전쟁 발발 직후 어디선가 희생된 민간인들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그들이 누구인지? 어디서 희생되었는지 아무도 모른다. 70년 세월이 지났음에도 유해 발굴은커녕 추모 행사도 없었다. 역사학도로서 죄송한 마음이 생겼다. 그래서 서도중앙교회 박형복 목사에게 "현장에 가서 기도라도 하자"고 제안했다. 마침 그 교회 김윤희 장로가 낚시배를 가지고 있어 그 배로 방문하기로 했다. 그렇게 해서 지난 달 처음으로 수섬을 방문했다. 10분이면 한 바퀴 돌 수 있을 정도로 작은 바위섬이었다. 파도에 밀려온 쓰레기가 쌓인 모래톱이 두 군데 있어 시체가 묻혀 있을 만한 곳을 파 보았으나 돌과 나무뿌리가 얽혀 있어 곡괭이질도 어려웠다. 결국 과학적 탐사장비가 없으면 유해 발굴이 어렵다는 결론을 내렸다. 우리는 섬을 떠나기 전 손을 잡고 기도했다.
"우리는 이곳에 묻힌 희생자들이 누군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때나 지금이나 모든 것을 아시는 주님, 아벨의 피의 호소를 들으셨던 주님께서 이곳에 묻힌 희생자들의 호소도 들어주실 줄 믿습니다. 저들의 억울한 죽음을 기억하며 간절히 비옵기는 이 땅에 다시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을뿐더러 보복과 증오 대신 용서와 사랑, 평화의 물결이 넘쳐나게 하옵소서."
기도를 마치고 배에 오르기 전 "교수님, 이번엔 지팡이 안 찾으세요?" 하는 목사 부인의 말을 듣고 섬 주변을 둘러보다가 바닷가 쓰레기 더미에서 나뭇가지 하나를 발견했다. 가볍기도 하였거니와 오랜 세월 파도와 모래에 씻겨 앙상한 것이 그곳에 묻힌 희생자의 뼈 같았다. 지팡이를 만드는 과정은 단순하다. 곁가지들을 쳐내고 지저분한 껍질을 벗겨 낸 다음 사포로 다듬고 락카를 뿌리면 끝이다. 나무는 지팡이로 변하면서 위아래가 바뀐다. 뿌리 부분이 위로 가고 가지 부분이 아래를 향한다. 그런데 손잡이 부분을 다듬다가 가지와 뿌리 사이에 새끼손톱만 한 검은 돌이 박혀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자세히 보니 박힌 돌이었다. 생나무 시절 날아와 박힌 돌을 나무는 내치지 않고 보듬어 안고 함께 자란 결과 둘이 한 몸이 된 것이다. 그렇게 지팡이에 박힌 돌은 무인도에 묻힌 희생자의 몸속에 박힌 총알 같았다. 그래서 더 애틋했다. 또한 바울이 고백한 '육체의 가시'(고후 12:7) 같았다. 바울은 고질적인 질병 때문에 늘 고생했다. 그래서 그것을 없애 달라고 세 번이나 간구했다. 그러나 그때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는 주의 음성을 들었다. 그 '가시'는 받은 은혜가 너무 커서 교만해질까 봐 그의 몸속에 심어 놓으신 주님의 ‘제어장치’였다. 그 가시 때문에 바울은 은혜의 통로인 겸손의 자리를 끝까지 지킬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내게도 남에게 밝히고 싶지 않은 치명적 약점, ‘육체의 가시’가 있다. 그 가시는 교만하거나 게으를 때면 사정 없이 찔러대 다시 무릎 꿇게 하였다. 그 덕분에 이만큼이나마 목사직을 유지한 것이 아닌가 싶어 오늘도 감사한 마음으로 돌이 박힌 지팡이를 짚고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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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의 순간들]
이신희, 완도성광교회를 섬기는 부목사
우리는 어떤 현상을 판단할 때, 수치화하고 계획화해서 접근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예컨대 평신도 사역이라 하면 이 사역을 통해서 몇 명의 성도가 늘어났는지에만 집중하고, 운영하는 방법만 따와서 교회 부흥의 수단으로 활용코자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완도성광교회에서 5년 가까이 부교역자로 목회하며 동참해 본 바에 의하면 평신도 사역에는 그러한 함의 이상의 무언가가 담겨 있습니다. 왜냐하면 완도성광교회는 말 그대로 평신도 사역이라는 성경적 정신에 입각하여 오랜 시간 이를 ‘삶으로 살아낸’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책을 읽으면서 기대해야 하는 것은, 앞서 이야기한 어떤 방법론과 수치화가 아닌, 정우겸 목사님과 성광교회 공동체의 삶과 정신에 공감하는 것이며, 마찬가지로 그렇게 살아보기로 결심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흔히 우리가 살아가는 우주가 다차원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말합니다. 예컨대 2차원에서는 볼 수 없는 영역을 3차원에 있는 존재는 볼 수 있고, 3차원에서는 인지할 수 없는 영역을 4차원에 있는 존재는 인지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각 차원은 서로 분리된 것이 아니라 연결되어 하나의 우주를 구성하고 있습니다. 평신도 사역도 마찬가지라 생각합니다. 평신도 사역이 오늘날 갑자기 등장한 전혀 새로운 프로그램이라기보다는 원래부터 성경이 전하고 있던 교회의 정체성의 고차원 중 하나라는 것이지요. 우리가 평신도 사역이라는 차원에서 들어가서 교회 공동체를 바라본다면 기존의 시각에서는 볼 수 없었던 전혀 새로운 모습과 성령님의 역사하심을 발견케 되리라 생각합니다.
그런 점에서 정우겸 목사님의 저서 《교회가 모여 교회가 되는 교회》는 이러한 새로운 차원으로의 초대장과도 같다 생각합니다. 바라기는 많은 분들이 이 초대에 응하시길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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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까이 또 멀리]
하나님께서 인생을 복되게 해주시려고 주신 최고의 선물 중 하나인 음악(찬송)은 인간이 만든 인위적인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만들어 주신 자연 중의 자연입니다. 그렇기에 찬송(음악)은 거룩하신 하나님과 그의 한없는 사랑을 온전히 드러내고, 하나님 형상을 따라 지음을 받은 귀한 인생을 노래하고, 더불어 인생으로 기쁨을 누리게 하신 온 우주와 대자연의 섭리를 가장 잘 표현해 주는 최선의 도구가 됨을 다시금 생각하게 됩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찬송하라.
복되게 하신 인생을 노래하라.
더불어 살게 하신 자연을 노래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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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책 나옵니다
𝓃𝑒𝓌 다시 성경을 찾아줘(믿음 첫 단추 2)
'오늘날 우리에게 성경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실제적인 답을 찾아가는 구성이다. 첨단 디지털 시대, 갈수록 성경 문맹률이 높아지는 상황에서 왜 성경을 찾아야 하는지, 성경은 무엇을 찾고 있는지, 성경을 어떻게 찾아가야 하는지를 체계적이고 실제적으로 다룬다.
정석원 지음 | 쪽수 미정 | 2024년 7월 출간
𝓃𝑒𝓌 말씀, 그리고 사색과 결단 4
울산더함교회 말씀 사경회에서 전한 설교를 엮은 것이다. 자기 부인이 선행되는 믿음, 믿음이 행동으로 입증되는 행회가 되는 교회, 헤브론의 자리에서 하나님과 뜨겁게 교제하며 평화의 터전을 일구는 믿음의 방향을 제시한다.
이재철 지음 | 쪽수 미정 | 2024년 7월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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