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림도예의 도예가 김유미 작가님의 작가노트 <차를 담는 시간>의 두 꼭지를 전합니다. 오후의 소묘 새해 첫 책으로 2월 중순 출간 예정이에요. 사루비아 다방의 티 블렌더 김인 작가님의 <고유한 순간들>에 이은 ‘작가노트 시리즈’ 두 번째 권이기도 합니다. 차를 만드는 이의 이야기와 차 도구를 만드는 이의 이야기 함께 읽어도 좋을 거예요. 출간 기념 작은 이벤트와 선물도 준비 중이고요. 찬찬히 기다려주시길 바라요.  

─✲─
사람을 묘사할 때 ‘그릇이 크다, 그릇이 작다’라는 표현을 쓴다. 그릇을 만드는 이로서 참 좋아하는 말이다. 그리고 도자기를 만들 때마다 생각한다. 나의 그릇은 크기가 얼마나 될까?

도자기를 만드는 일은 생각보다 지루한 시간의 반복이다. 가마를 열기 전까지 기물의 결과를 알 수 없어 매 단계마다 다듬고 다듬고 다듬는 일을 계속한다. 한 번이라도 손을 더 댄 기물은 미세한 차이지만 마감이 훨씬 좋다.

도자기를 만들기 위해서는 원하는 형태의 물레를 차고 나무판에 옮긴 뒤, 계절에 따라 다르지만 보통 하루에서 사흘 정도 말리는 시간을 갖는다. 수분이 어느 정도 날아가 단단해진 기물을 굽통*에 얹고 칼로 굽을 깎아낸다. 그러고 수분이 거의 다 빠질 때까지 다시 말리는데 여름에는 2주를 두어도 마르지 않을 때도 있지만 가을, 겨울엔 이틀이면 초벌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마른다. 초벌을 때기 전 일차적으로 다듬는데 굽을 깎으면서 칼이 지나간 자리나 흙에 박혀 있는 이물질을 제거해 주는 단계다. 어디서 필지 모르는 철점**도 닦아낼 수 있고 은근한 요철도 부드럽게 만들어준다. 다 다듬고 나면 초벌을 땐다. 초벌을 때고 나온 기물은 뽀얗게 분홍빛이 도는 토기 상태가 된다. 이때도 가마 안에서 앉았을지 모를 먼지를 제거하기 위해 또 다듬는 시간을 거친다. 그러고 나서 유약을 바른 뒤 재벌을 땐다. 재벌은 1250도에서 1300도까지 올라가기 때문에 가마를 식히는 데도 꼬박 하루가 걸린다. 식힌 가마를 열고 기물을 해임***한다. 마지막으로 굽을 부드럽게 다듬는 단계까지 거쳐야 완성이 된다.

하나의 기물을 기준으로 할 때 별다른 일이 없다면 물레를 차고 굽을 다듬어 완성하는 데까지 걸리는 시간은 1주일에서 2주일 정도다. 이 지난한 시간들을 매일, 매주, 매달 반복하다 보면 어느새 내가 다듬는 건 도자기가 아니라 나 스스로가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기분이 아주 좋은 상태에서도, 또 반대로 바닥을 뚫고 들어간 상태에서도 도자기는 만들어야 하고 이 긴 반복의 시간 속에서 어느 순간 평정을 느낀다. 이쯤 되니 그릇의 크기를 가늠하는 일보다 그릇을 만드는 행위 자체가 중요해진다. 어차피 타고난 그릇들이야 모두 다를 테고 크기보다는 얼마나 잘 만들어진 그릇인가가 중요하지 않을까? 아무리 크더라도 깨진 그릇이면 말짱 도루묵이고 작더라도 단단하고 옹골차 그 안에 어떤 것이든 잘 담아낸다면 되지 않을까? 오늘도 도자기를 다듬으며 나를 다듬는다. 완성된 결과물이 단단하고 아름답길 바라며.

* 굽을 깎을 때 그릇을 받치는 통으로 기물의 종류에 따라 다른 형태의 굽통을 만들어 사용한다.
** 흙 안에 포함된 철 성분이 가마를 때며 까맣게 점으로 피어나는 것.
*** 가마에서 기물을 꺼내는 것.
사람의 체온은 모두 36.5도. 같은 숫자지만 모두 각자만의 온도를 갖고 있다.

업무와 관련된 미팅을 하거나 도자기를 구입하러 손님들이 자주 오는 편이다. 두세 시간 남짓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어떤 성향의 사람인지 조금은 알 수 있는데 누구는 굉장히 뜨겁고 또 누군가는 보기보다 차갑다. 행동이 크고 작고, 말이 많고 적고, 웃음소리가 호탕하거나 작거나를 떠나 어떤 것에 대해 열정이 넘치는 사람들이 있다. 눈빛이나 작은 행동에서 티가 난다. 열정적인 사람들은 눈빛부터 뜨겁고 작은 행동에서 큰마음이 느껴진다.

아무래도 작업실까지 와서 도자기를 구매하는 사람들은 차나 도자기에 열정적인 사람들이 대부분이긴 하다. 공통적인 취향으로 연결되어 그런지 처음 만나도 잘 통한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도자기라는 매개체 하나만으로 서너 시간씩을 편하게 대화할 수 있는 사람들. 종종 가장 친한 친구보다 더 이야기가 잘 통하는 친구 같다. 그건 나도 함께 뜨겁기 때문일 테다. 이런 대화 속에서 작가와 손님이 아닌 그냥 열정적인 사람 두 명일 뿐이다.

차 역시 저마다 잘 맞는 온도가 있다. 종종 어떤 온도에서 어느 정도 시간을 들여 차를 우려내야 하는지를 몰라 차가 어렵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그때마다 정답은 아니지만 내가 찾아낸 방법을 말씀드린다. 차를 구매한 곳에서 주는 가이드는 표준이니 가이드를 따라서 내리다 보면 내 입맛에 조금 과한지 부족한지를 알 수 있다. 가이드를 따라 우린 차가 입에 맞지 않다면 가장 먼저 해보는 방법은 차의 양을 조절하는 것. 진하게 느껴진다면 차의 양을 줄이면 될 것이고 연하다 느껴지면 차의 양을 늘려보면 된다. 이렇게 차의 양을 찾은 후엔 온도와 시간을 바꿔본다. 100도의 온도에서 우리다 점점 온도를 낮추고 시간 역시 빠르게 빼다가 점점 늘려보는 것이다. 하나하나 바꿔가며 차를 마시다 보면 어느새 내 입맛에 맞는 차의 맛을 찾을 수 있다. 결국은 차의 양도, 시간도, 온도도 모두 본인만의 것이 있다.

분명 뜨거운 차를 내렸는데 대화를 하다 보니 어느새 차가 식는다. 식은 차를 들이키고 또 온도에 따라 달라지는 차의 맛을 이야기한다. 이야기가 즐겁다 보니 찻물의 온도가 들쭉날쭉한다. 심지어 찻잎에 물을 부어놓고 잊어버려 과하게 우러난 차를 따라내기도 한다. 그래도 뭐가 그리 즐거운지 이야기가 끊이지 않는다.

차실이 후끈후끈하다. 뜨거운 사람들이 다녀갔다. 바로 찻자리를 정리할까 하다가 데워진 온도를 낮출 겸 새로운 차 하나를 꺼낸다. 혼자 조용히 물을 끓이고 말소리가 아닌 물소리를 듣는다. 대화를 하며 마른입을 적시기 위해 마시는 차도 맛있지만 이렇게 조금은 식히기 위한 차도 맛나다. 몸과 머리, 마음이 제법 식었다. 찻자리를 정리하고 원래의 체온으로 돌아간다.
차를 담는 시간
토림도예 도예가 노트
2월 출간 예정
지은이 김유미
날마다 차를 마시고 향을 피우고 도자기를 빚는다. 구름도 쉬어가는 한운리의 자연과 계절 속에서 아이를 키우고 정원과 텃밭을 돌보며 삶을 다듬어가고 있다. 이 시간들 안에서 무엇이든 담을 수 있는 좋은 그릇이 되리라 작게 믿는다.

토림도예
차 도구를 만드는 도자기 브랜드. 시간과 삶을 담는 다기를 지향하며, 2010년부터 토림土林 신정현 작가와 아림芽琳 김유미 작가가 함께 꾸려오고 있다.
1월의 편지, 어떠셨나요?
오후의 소묘 | sewmew.co.kr
letter@sewmew.co.kr | 뉴스레터 구독하기
수신거부 Unsubscrib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