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제로 현실의 한복판에서 참상을 직접 겪고 바라보아야 하는 처지가 되자, 그들은 거짓된 슈퍼맨의 환상, 기만과 혐오, 조장된 공포, 진실을 가리는 프로파간다로 가득한 라디오와 가벼운 읽을거리에 흥미를 잃었습니다.

대신 비록 직접적으로 전장과 연관된 내용이 아닐지라도, 믿을만하고 진실된 방법으로 세계를 그려내고, 삶과 죽음, 취약함을 성찰하는 책, 다양한 곳으로 자신을 푹 빠져들수있게 해주는 책들, 그렇게 해서 고통을 견뎌내고 미래의 희망을 기약할 수 있는 책들을 몹시 읽고 싶어했습니다.

이런 책들에 빠져드는 시간만큼은, 이들은 전장을 잊을 수 있게 되었고 자신이 온전한 개인이라는 자존감을 얻으면서도 세상과 연결된 기분이 들게 해주었습니다.

좋은 책이 모이지 않았기 때문에 고개를 저으며 포기했을까요?

그렇지 않았습니다. 열의가 있는 사서 등으로 꾸려진 전시도서협의회는 아예 세계 각지의 미군부대에게 직접 보낼, 병사들에게 맞춤한 ‘진중문고’ 시리즈를 그냥 직접 만들어서 배포하자는 터무니없는 계획을 세우고 실행해버립니다. 베테랑 사서, 전문가들이 직접 도서들을 엄선했고요. 협의회는 책의 물성부터 군인들이 언제 어디서든 펼쳐볼 수 있도록 주머니에 쏙 들어가는 크기로 가볍게 만들었습니다.

물론 진지한 책들만 있는 건 아니었고요.

협의회는 다양한 주제를 아우르되 그 책들이 ‘진실되게’ 쓰여있어서 지적 호기심, 유머, 위안을 고루 얻을 수 있는 책들을 선정했습니다. 이야기책부터 스포츠, 연극, 철학, 고전, 역사, 서부물까지 아주 다양했죠.(링크)

그리고, 적어도 과거의 군인들은 기만적인 프로파간다의 영향을 받지 않기 위해서는 라디오를 간단히 끌 수 있었고, 끈다는 선택지가 그다지 낯선 것이 아니었지만 - 오늘날 우리는 그 선택지마저 상상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제각기의 고민 속에서, 오히려 과거보다 훨씬 더 고립되어 좌절하며 살고 있다고 볼 수도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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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세계대전 당시의 말단 병사들 역시 다양한 불안감과 고립감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당연히 이런 말을 모두가 듣는 곳에서 대놓고 이야기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이들은 대부분의 고통과 공포, 고립감 등을 홀로 삭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들은 때때로 자신이 ‘총알받이’에 불과하다고 생각했고, 자신들이 이곳에서 아무리 희생하더라도 본국에 돌아가면 찬밥취급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품고 있었죠.

실제로 한 부상당한 영국군은 이런 고민에 빠져 시무룩했다고 하는데요. 이때 함께 있던 미군들은 한 조그만 책을 그에게 내밀었죠.

이때 누구도 굳이 입밖에 꺼내지 않는 걱정거리들을 책 속 인물은 솔직하게 꺼내어 말을 함으로써, 그것도 유머를 곁들여서 말함으로써 나만 불안해하는 것이 아니라는 안도감을 얻을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군인들은 막강한 영웅의 이야기보다도 취약함을 드러내는 작가들의 이야기, 실수담, 고뇌 등에서 눈물을 흘릴만큼 위로를 받았고, 불우한 이주민 출신 여자아이의 성장소설을 읽고서 마치 자신의 이야기를 대신 하는 것 같다는 위안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저는 이런 이야기들을 읽으며 곰곰 생각했습니다. 물론 책 중에서도 기만적인 방식으로 쓰여진 책이 있겠지만, 적어도 ‘진중문고’에 선정된 책들은 대체로 그런 내용을 싣고 있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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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흥미롭게도 이런 위안을 주는 책들은 반드시 위안을 주겠다는 목적으로 쓰여지거나 추천된 것이 아니며, 굉장히 엉뚱한 부분에서도 독자들은 위안을 얻게 되었습니다. 심지어 좋은 책은 제대로 ‘내용을’ 읽지 않아도 단지 그것에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무언가를 바꾸게 됩니다.

프랑스의 작가이자 독서치료사 레진 드탕벨이 쓴 <우리의 고통을 이해하는 책들>에서 저자는 7개월동안 내용은 잘 모르지만 일단 어떤 책을 읽은 중학생에 대한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학생은 내용을 거의 이해할 수 없었지만 - 책을 읽는 동안에는 적어도 그 복잡함을 상상하면서 자신의 고민으로부터 ‘빠져나올 수’ 있었다고 합니다.

저는 이 대목을 읽으면서 고등학교 시절 전학 간 학교에서 심심할 때, 그냥 도서관에 가서 세계문학전집을 서가에서 순서대로 꺼내 읽었던 것이 떠올랐습니다. 무엇을 배웠다기보다는, 그저 그 책들을 보는 동안에는 다른 복잡한 생각을 하지 않아도 되는 점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리고 저자가 이 책에서 수차례 강조하는 것은, 이 모든 일을 할 수 있는 건 ‘좋은 책’이라는 것입니다. 기만적인 방식으로 쓰인 책은 우리를 바꾸고 위안을 줄 수 없는 반면, 좋은 책은 그것을 만나면 반드시 직선이 아니더라도 어떻게해서든 우리의 삶을 바꾸고 영향을 주게 된다는 것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