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의 신학자
#97 장 칼뱅, 위로의 편지
#98 칼뱅은 '칼뱅주의'라는 말을 증오했다
#99 수산나 웨슬리에게 ‘체험’은 필수였다
#100 100호 특집!
#101 존 웨슬리, '칭의'를 말하다

🎁 100호 기념, 피드백 이벤트(발표: 2월 22일)

이달의 신학자 '100호'를 기념하며 피드백 이벤트를 준비했습니다. 이달의 신학자 뉴스레터를 함께 읽어 오면서 들었던 생각들을 자유롭게 나누어 주세요. 추첨을 통해 다섯 분께 책 『신학이란 무엇인가 Reader』를 선물로 보내드리겠습니다(하단 FeedBack 클릭).

독자님, 안녕하세요.

편집자 B입니다.

 

하루는 어느 한 아이를 깜짝 놀라게 했습니다. 아이는 깜짝 놀라 “엄마!”하고 놀란 마음을 표현했습니다. 다 큰 어른이었던 저는, 그 아이를 보며 의아함을 가졌습니다. ‘놀라면 놀라는 것이지, 거기서 엄마는 왜 찾는담.’ 무의식적으로 나온 그 한마디 속에서 그 아이가 가지고 있는 엄마의 세계를 발견하게 됩니다. 적어도 아이에게는 엄마라는 존재가 세계를 형성하는 하나의 해석 장치(?)임을 보게 됩니다.

 

오늘은 존 웨슬리에 관해 이야기해 보려고 하다가, 문득 그의 어머니인 수산나 웨슬리를 먼저 다루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존 웨슬리의 신학에는 어머니의 신앙이 여러 형태로 전달되기 때문입니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신앙의 모습이 바로 ‘체험’이 아닐까 싶습니다. 수산나는 말합니다. “철학자로서만 주님을 아는 것, 주님에 대해 심오한 사색에 빠지는 것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가져다주지 못합니다.”

#99 수산나 웨슬리에게 ‘체험’은 필수였다

수산나 웨슬리(Susanna Wesley, 1669-1745)는 두 아들의 명성에 가려졌지만 수산나는 영적 분별력이 뛰어난 여인이다. 수산나는 신앙일기를 썼는데, 그 내용을 보면 그녀가 책을 많이 읽고 생각이 깊고 영적 통찰력이 예리한 여인임을 알 수 있다.

 

수산나는 1669년 1월 20일에 태어나 1689년 새뮤얼 웨슬리와 결혼해 그와의 사이에 열아홉 자녀를 두었다. 그중 살아서 어른이 된 사람은 열 명뿐이다. 가장 잘 알려진 아들은 물론 존 웨슬리와 찰스 웨슬리다. 둘은 18세기 영국교회 복음화 부흥의 선도자가 됐다. 하지만 수산나 자신도 믿음이 깊고 신앙심이 독실한 여인이었다. 그녀의 삶은 쉽지 않았다. 새뮤얼 웨슬리는 걸핏하면 빚을 져 집안 살림을 어렵고 고달프게 만들었다. 열아홉 자녀를 돌보는 데 필요한 일용품만도 당시로서는 엄청난 짐이었다. 그녀는 간혹 진이 빠졌다. 그럼에도 그녀는 신앙 일기장에 묵상과 기도를 기록하면서 자신의 영적 필요를 용케 챙겼다.

 

수산나의 일기는 성숙한 영적 묵상과 실제적 지혜가 어우러진 명저다. 예컨대, 하나님께 순전히 철학적으로 접근하는 방법이 얼마나 빈약한 것인지 수산나는 이렇게 묵상했다.

오 주님, 이제야 알겠습니다. 철학자로서만 주님을 아는 것, 주님의 본질과 속성과 섭리에 대해 가장 고상하고 심오한 사색에 빠지는 것, 자연을 통해 주님의 존재를 설명할 줄 아는 것, 주님의 존재나 활동을 가장 점잖고 뛰어난 말솜씨로 강론하는 것 등이 우리에게 아무것도 가져다주지 못함을 말입니다. 우리가 동시에 주님을 체험으로 알지 못하는 한, 주님이 우리의 최고선이요 유일한 복임을 마음으로 느끼고 알지 못하는 한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체험하는 것은 수산나에게 필수였다. 아무리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거나 그분의 속성을 사색할 줄 안다 해도 하나님을 “체험으로” 알지 못하는 한 별 가치가 없었다. 여기 체험이란 영어 고어에서 ‘실험’이라는 말과 같다.

 

이 일기에 쉼의 주제가 자주 등장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정신없이 바쁘고 재정적으로 쪼들리는 삶 속에서 하나님께 내드릴 공간을 찾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수산나는 분주한 삶의 와중에서 하나님께 공간을 내드리는 훈련이야말로 영적 안정과 인격적 만족에 필수임을 굳게 믿었다. 이것은 율법주의가 아니라 다만 묵상과 기도와 예배에 시간을 따로 뗄 필요가 있다는 자각이다.

수산나의 개인 훈련에는 일요일을 쉬는 날로 지키는 것도 포함됐다. 그날은 영적 소생에 육적 휴식이 동반됐다. 수산나에게 일요일이란 하나님이 바로 그런 취지로 만드신 “공간”이었고 즐겁고 유익하게 보내야 할 날이었다. 하나님이 하루를 구별하셨다는 사실은 율법이자 곧 은혜의 문제다. 안식일을 누리라는 명령은 그것이 우리와 하나님의 관계에 유익하기 때문에 주어진 것이다.

이날은 주의 지으신 날이니 제가 기뻐하고 즐거워합니다. 주께서 지으신 영혼들에게 인자하고 자비롭게 이레 중 하루를 베푸시니 만민의 영원하신 아버지께 영광을 돌립니다. 소란하고 어지러운 세상의 바쁘고 허둥대는 삶에서 물러나, 방해 없이 더 친밀하게 하나님께 집중하는 낙을 주시니 이것은 곧 저희의 행복이자 의무입니다. 오 복된 선물이여! 가장 행복한 날이여!

 

주님, 제 삶의 일곱째 날을 주님께 드리며, 주님의 무한한 사랑과 선을 이루 다 찬미할 수 없습니다. 이 성스러운 시간이 주님을 섬기는 데 소용되게하소서. 이날 마땅히 주님께 드릴 영광과 찬양을 쓸데없고 무익한 헛된 말이나 생각에 절대 빼앗기지 않게 하소서. 이날의 직무를 충실히 수행함으로 마땅히 누려야 할 귀한 축복과 유익을 제 영혼이 절대 잃지 않게 하소서.

우리는 신앙여정 중 하나님과 함께 보낼 시간을 확보해야 한다. 수산나는 우리에게 그 훈련에 혼신을 다할 것을 촉구한다. 이것은 훈련이라는 신약의 중요한 주제에 대한 충실한 묵상이다. 바울에게 그리스도인의 삶은 단순한 여정이 아니라 승자들만 면류관을 얻는다는 부담 속에 달리는 힘겨운 장거리 경주였다(갈2:2; 딤후 4:7 참조). 히브리서도 같은 이미지를 사용해, 오직 예수만 바라보며 인내로써 삶의 경주를 경주할 것을 독자들에게 권한다(히 12:1-2). 이 이미지를 통해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훈련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수산나에게 이 이미지의 의미는 분명하다. 신앙 여정에는 한편으로 건강한 몸과 또 한편으로 쉼과 회복의 시간들이 필요하다. 수산나의 도전대로 우리는 쉼이란 나쁘고 부끄러운 것이라는 죄책감을 버리고 보다 성격적인 사고를 회복해야 한다. 쉼이란 우리와 하나님의 관계를 깊어지게 하기 위해 그분이 요구하시는 훈련이다.

 

우리 중에는 결과가 분명한 일—우편물 처리, 정원 손질, 집안일, 교회 집회 참석 등—을 하고 있지 않을 때 죄책감을 느끼는 이들이 많다. 그러나 수산나는 우리에게 일깨운다. 하나님과 함께 보내는 시간은 사치품이자 필수품이며, 그 자체로 기쁨이자 하나님을 더 잘 섬기도록 우리를 무장시켜 준다.

편집자 B의 시선
재미있는 일화가 있습니다. 하루는 웨슬리가 어머니 수산나에게 ‘자신 대신 다른 사람이 설교한 것’에 대해 분개했습니다. 아마도 그 설교자는 신학을 공부하지 않은 사람이었던 모양입니다. 그러자 수산나는 자신의 남편인 사무엘을 대신해 직접 설교할 때 더 큰 은혜가 있었다고 조언해 주었습니다. 이 조언 때문인지 몰라도, 웨슬리는 이후 평신도의 설교를 적극적으로 권장하게 됩니다.

때때로 누군가의 적절한 조언은 생각을 형성하는 데 큰 도움을 줍니다. 웨슬리는 대학교에 입학하고 석사를 졸업한 뒤에도 늘 어머니께 조언을 구했습니다. 웨슬리가 조언을 구할 때마다 어머니는 자신의 생각과 신앙, 경험들을 통해 충실히 설명해 주었습니다. 조금 더 덧붙이자면, 그 당시에는 이성이나 합리적인 신앙이 신학적으로 유행이었습니다. 하지만 수산나는 줄곧 “신앙은 지적인 동의를 초월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말하곤 했습니다. 이러한 수산나의 말 때문인지, 존 웨슬리는 합리성이나 이성보다 ‘영적인 감각’을 더 강조하는 신학자가 됩니다.

독자님과 소통하며 함께 <이달의 신학자>를 만들어가고 싶습니다! 이달의 신학자 뉴스레터를 함께 읽어 오면서 들었던 생각들을 자유롭게 나누어 주세요.

복 있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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