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약’을 읽는 건 재밌을까? : 건조한 요약과 우아한 요약

‘요약’을 읽는 건 재밌을까? : 건조한 요약과 우아한 요약

Heartfelt Brevity

저자 김스피

(Authors) Kim, Supi

출처 인스피아 저널, (150), 2025.3.19, 1-8 (8pages)

(Source) Journal of the Inspia

지난회차 https://page.stibee.com/archives/107426

(Archi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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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워드: 요약, 뉴스레터, 효율성, 사랑, 쓸데없는것

1.머리말

2.‘한줄 요약 = 스마트?’ : <스마트 브레비티>의 함정

3.‘잼얘’는 원래 가장 좋은 학습법이었다 : <황금 시대>

4.요약에도 ‘터무니없는 사랑’이 담길 수 있다

5.맺음말

【1.머리말】

안녕하세요. 연구자님. 느릿하게 해찰하며 걷는 것을 좋아하는 김스피입니다.👤

“이젠 우린 더 이상 굳이 클릭해서 지루한 긴 글을 읽는 수고를 하지 않아도 됩니다! AI가 모든 걸 요약해줄테니까요.”

지난해 말 ‘퍼플렉시티perplexity’라는 AI 검색 플랫폼이 짧은 기간에 급성장하면서 많은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습니다.

‘○○가 궁금해!’라고 말만 하면 AI가 손쉽게 대신 글을 찾아주고 또 간편하게 요약까지 해주는 서비스인데요.

여태까지는 어떤 정보를 찾으려면 포털 사이트에 검색어를 입력해서 직접 일일이 글을 클릭해 읽어보고 판단해야만 했지만, 이젠 기존의 검색 방식 자체가 사라질 수도 있다는 얘기까지 나온다고 합니다.

이런저런 우려가 나오기도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의자에 편하게 앉아 지루하고 긴 글을 읽는 대신 ‘AI 비서’가 - 쓸모있는 정보 가운데서도 핵심 엑기스만 요약해주는 짧은 글을 받아볼 수 있게 되어 크게 기뻐합니다.

<fig.1> 질문에 직접 '답'하는 검색형 AI플랫폼 Perplexity. 실리콘밸리에서도 이례적인 속도로 기업가치가 상승해 주목받고 있습니다(링크). (왼쪽) 과연 '요약 선호'는 오늘날만의 일일까요? 17세기 일본에서 '기와판 신문瓦版'을 팔았던 신문팔이(요미우리読売)의 모습. 이들은 판매를 위해 행인이 솔깃하도록 내용을 재밌게 요약해 외치고 다녀야 했습니다. / 브리태니카백과사전, 블로그(링크)

다만 저는 이 반짝이는 신세계에 들어서기 이전에, 곰곰 어떤 생각에 빠져들었습니다.

과연 핵심 엑기스만 남긴, 쓸모로만 가득한 정보뭉치 요약을 줄창 읽는 건 재미도 있고 유익한 일일까? 라는 질문에 대해선데요.

당연하게도 요약 자체가 나쁜 건 아닙니다. 지루한 글을 읽기 힘들어하고 마구 졸았던 건 옛날 사람들도 마찬가지고요.1)

그리고 1:1 축척의 지도가 있을 수 없는 것처럼(=있어도 의미가 없는 것처럼) 자연, 사회 현상 및 사건사고 등을 이야기하는 데 있어서 본질적으로 요약이 아닌 글은 있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과연 요약이라고 해서 다 같은 요약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어떤 요약은 읽는 재미를 북돋우며 풍부하게 해찰과 호기심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는 반면, 어떤 요약은 오히려 사람을 지루하게 만듭니다.

어쩌면 오히려 과거 사람들이 오늘날에 비해 훨씬 더 풍성하고 다양한 요약을 활용했다고도 볼 수도 있습니다. 옛날 신문팔이, 이야기꾼들은 사람들에게 복잡한 사건과 정치, 역사를 재미나게 요약해 들려줬죠.

요약은 필요합니다. 오늘날 인터넷엔 지루하고 유익하지 않으며 자극적이기만 한 글들이 넘쳐나는 건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런 글들을 만났을 때, 화를 잔뜩 내거나 읽던 걸 창 밖으로 던지지 않고서 참을성있게 끝까지 읽어내려가는 쪽이 오히려 이상한 일입니다.

다만, 지루하고 엉망인 글이 많다고 해서 - 오늘날처럼, 단순히 ‘핵심 내용’만 남기고 나머지는 다 버려버리는 방식의 요약이 최선의 대안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해선 궁금증이 들었습니다.

질문은 이어집니다.

사람들은 정말로 ‘엑기스만 남긴 한줄 요약’을 원할까요? 사람들이 오늘날 글을 읽기 싫어하는 건, 그냥 엑기스만 남겨놓은 정보뭉치가 ‘노잼’이어서가 아닐까요? 무엇보다도 우리가 건조한 효율성만을 추구할 때, 우리는 무엇을 잃을 수 있을까요?(그런 방식으로 효율성을 추구할 수는 있을까요?) 어쩌면 우리는 요약이냐 아니냐의 문제보다도, 어떤 요약이냐의 문제에 주목해야 하는 게 아닐까요?...

오늘 레터에서는 <스마트 브레비티>(짐 벤더하이 외), <황금 시대>(호세 마르티)를 지팡이 삼아 요약과 효율성에 대해 해찰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아리스토텔레스는 <수사학>에서, 연설을 듣는 사람은 시간이 지날 수록 주의가 흩어지기 때문에, 연사는 반드시 의외의 표현이나 주의를 끄는 문구("50드라크마짜리 연설 대목") 등으로 사람들을 사로잡아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이를 달리 말하면, 사람들은 반드시 지루해지기 때문에 갖은 방법(수사학)을 다 써서라도 지루하지 않게 만들어야 한다는 거죠.

【2.‘한줄 요약 = 스마트?’ : <스마트 브레비티>의 함정】

버지니아주 알링턴에 있는 스타트업, 악시오스Axios의 뉴스룸 벽에는 점심 식사 때 튄 기름이 묻은 종이가 걸려있다. 이렇게 쓰여있다. “간결함은 자신감이고, 장황함은 두려움이다” - 짐 벤더하이 외, <스마트 브레비티> 中

연구자님께선 “TL;DR”이라는 말을 들어보셨나요?

주로 영미권에서 쓰이는 줄임말인데요. “너무 길어, 안 읽을래!Too Long, Don‘t Read”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이 단어가 처음 쓰인 건 2002년이라고 하는데요. 인터넷이 대중화되며 누구나 손쉽게 글을 올리고 공유할 수 있게 되었죠.

단, 문제는 있었습니다. 누구나 글을 올릴 수 있게 되고, 복제가 쉬워지면서 인터넷엔 잔뜩 길기만 하면서 지루하고 엉망인 글들이 넘쳐나게 된 것입니다!

이에 많은 언론·미디어회사는 2010년대 이후, 핵심만 담은 [한입 요약] 서비스, 뉴스레터를 내놓기 시작했는데요. 그중에서도 대표적인 세계적 성공사례로 꼽히는 곳이 바로 아래 소개할 <악시오스Axios>라는 미국 정치매체죠.

2023년 출간돼 세계적으로 화제가 된 베스트셀러 <스마트 브레비티Smart Brevity(현명한 간결함)>를 쓴 짐 벤더하이는 Axios의 공동 창립자인데요. Axios는 그간 길고 복잡하고 어려웠던 기사를 ‘깔끔하게 요약’해서 핵심만 보여주는 스타일의 글로 엄청난 인기를 끌었습니다.

Axios의 창업자들은 원래 미국의 유명한 정치매체 기자였는데요. 이들은 자신들이 아무리 길고 훌륭하고 복잡한 기사를 쓰더라도 ‘맨앞의 몇줄’ 혹은 ‘제목’만 읽는 사람이 대부분이라는 연구 결과를 접하고 깜짝 놀라고 낙담하게 됐다고 합니다. 인터넷에서 사람들이 글을 읽는 데 들이는 시간은 평균 26초에 불과하다고 하고요.

하지만 이들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26초 밖에 집중을 못한다고? 그럼 26초 안에 승부를 보면 되지 뭐.’

<fig.2> 악시오스의 공동창업자, 짐 벤더하이. 워싱턴포스트, 월스트리트저널 기자 출신으로, 악시오스는 꼭 필요한 정보만 담은 '200자 기사' 형식으로 명성을 얻었습니다. (왼쪽) Axios의 화면. 제목 아래에 200자 정도되는 핵심 내용이 이어집니다. 더보기를 누르면 관련해서 조금 더 자세한 내용을 읽을 수 있습니다 / Axios

그리고 저자에 따르면, 오늘날 사람들이 집중을 하지 못하게 된 데는 독자의 탓 말고도 글 쓰는 사람들의 문제도 있었습니다. 복붙이 쉬워지고, 함부로 쓰는 글이 늘면서 ‘실제로‘ 늘어났던 거죠.

사람들은 여전히 1980년대처럼 이메일, 편지, 메모, 논문, 소설, 책을 쓴다. 생각해보라. 모두가 시간이 없고 선택할 것은 많으며, 주변엔 주의를 산만하게 하는 것 천지다. 그런데도 우리는 계속해서 같은 양, 또는 그보다 많은 양의 단어를 대대로 써왔던 것처럼 토해 내고 있다 [...] 그 결과 수십억 개의 단어들이 낭비된다.

-짐 벤더하이 외, <스마트 브레비티>(이하 동일)

그렇게 이들이 Axios를 세우고 그간 간결한 글을 써온 비법의 정수를 담은 것이 바로 이 <스마트 브레비티>라는 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보니 이 책의 내용은 꽤 심플합니다. 핵심 메시지를 이렇게 요약할 수 있죠.

“반드시 필요한 것만 빼고 죄다 쓰레기통에 버려라! 가장 핵심적인 엑기스만 남겨라! (문단을 문장으로 줄이고, 문장을 단어로, 단어를 이모티콘으로 줄여라. 쓰잘데없는 일화, 부사, 농담, 형용사는 죄다 버려라...)”

이 책은 실제로 ‘조언이 곧 책의 형식’에도 적용이 되어 있는 방식으로 쓰여져있습니다. 즉, 모든 본문은 다른 책들과는 달리 - 핵심 문장과 그 아래 딸린 조건문들, 그리고 모든 형용사와 예시들을 거의 다 빼놓은 채 ‘엑기스’만 남겨둔 글, 조언, 핵심 요약들로 이루어져있었죠.

제가 오늘 레터에서 이 책을 가져온 이유는, 이 책의 가르침을 그대로 옮겨 전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그보다는 “제가 이 책에서 (같은 업계인으로서, 저자들의 문제의식에 대체로 공감해왔음에도) 왜 읽는 재미를 못 느꼈는지”에 대해 파고들어보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저는 이 책이 좀 지루하게 느껴진 이유가 거꾸로 ’스마트 브레비티‘의 한계를 보여줄 수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이 책을 읽으면서, 그들의 글에는 크게 두 가지가 빠져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보통은 빠질 일이 없는 부분이라, 마치 바퀴가 빠진 자전거처럼 그 빈자리가 유독 크게 보이는 것들이었는데요. 그 두 가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1.글맛 : 개성, 문체, 일화 등
2.계기, 의도 : 글을 통해 무엇을 추구하고자 하는가? 글쓴이는 누구인가?

1.먼저 ‘글맛‘의 문젠데요.

여기서의 글맛은 단지 화려한 꾸밈말만을 뜻하는 건 아닙니다. 글에서 은근히 묻어나는 필자의 개성과 문체, 유머와 위트, 곁다리, 눈길을 끄는 일화 등의 읽을거리를 아우르죠. 그리고 저자들은 이런 ’아무짝에도 쓰잘데없는’ 것들을 가차없이 지우라고 여러번 강조합니다.

* 팁과 요령 (일부 발췌)
- 가장 중요한 요점을 압축시키자
- 일화는 빼자 : 농담이나, 잘난척도 빼자.
- 부사, 약한 단어, 관련 없는 단어를 잘라내자 : 직설적이고 간결하며 명료한가?

* 마크 트웨인의 유명한 말에 따르면, “거의 정확한 단어와 정확한 단어의 차이는 반딧불이와 번갯불의 차이와 같다” [...] 언젠가 사회부 부장이 바나나를 절대로 “길쭉한 노란 과일ellongated yellow fruit”이라고 부르지 말라고 지적했다 [...] 언제나 짧은 게 낫다.

저는 이 대목에서 의아함을 느꼈는데요. 이유는, 저자들이 ‘마치 그 사람이 바로 눈 앞에 있는 것처럼 말해야 한다’고 여러차례 강조했지만 - 이상하게도, 정작 우리가 현실에서 다른 누군가와 이야기할 때는 “꼭 필요한 엑기스만, 일화나 말투, 농담을 다 빼놓고” 말하지 않는다는 점을 간과했기 때문입니다.2)

실제로, 만약 친구를 만나 점심을 먹는데 친구가 무표정한채 모든 말을 한줄 요약으로 한다면 깜짝 놀랄 것 같습니다.

<fig.3> 과연 짧은 것만이 정답일까요? 당연히 짧으면서도 지루할 수 있습니다. 물론 길고 지루한 글보다는 짧고 지루한 글쪽이 독자의 시간을 덜 낭비하긴 하겠지만요. (왼쪽) 마크 트웨인이 19세기 한 신문에서 재미나게 묘사한 '멍텅구리 토끼Jackass rabbit'의 모습. 정식 명칭은 'Jackrabbit'으로 추정됩니다. / newyorker, wikipedia

그리고 (저자는 ‘바나나’를 ‘길쭉하고 노란 과일’이라고 해선 안된다고 했지만) 어쩌면, 사실 재미나고 글맛나는 단어나 유머야말로 - 때론 우리가 어떤 이야기에 귀를 반짝 기울이게 되는 핵심 계기가 되지 않을까요?

저자는 자신의 말을 뒷받침하기 위해 미국 작가 마크 트웨인의 말을 인용하긴 했지만, 실은 마크 트웨인이야말로 자기 글에 쓸데없는 묘사와 장난을 잔뜩 넣기로 유명한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예를 들면 마크 트웨인은 1864년 한 기사에서 ‘멍텅구리 토끼(jackass rabbit)’라는 동물에 대해 이렇게 묘사하기도 했죠.

“몸길이는 90cm정도 되고 다리는 회계실 의자처럼 생겼고 귀는 엄청나게 길고 꼬리는 있는 둥 마는 둥이다...”

저자들이라면 이런 표현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할지 문득 궁금해지기도 했는데, 표현의 문제 이전에 멍텅구리 토끼따위에 주목하는 것 자체에 눈을 찡그렸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2. 이어서, ’계기, 의도‘의 문젭니다.

사실 우리가 아무리 ‘객관적‘이라고 하는 정보 요약에도 완벽하게 쓴 사람의 계기나 의도가 없을 수는 없습니다. 대표적으로는 같은 날 서울에서 두 개의 시위가 동시에 진행되었다고 했을 때, 그중 어떤 시위에 주목하고, 어떤 방식으로 서술하는지 자체가 나름의 계기와 의도를 담고 있죠.

하지만 ‘한 줄 요약‘처럼 지나치게 간단한 정보는, 이런 의도와 계기를 설명하기 위한 섬세한 맥락 설명을 하기 어렵습니다.

과거 칼럼니스트 클레어 말론은 <스마트 브레비티> 방식에 대해 ‘과연 사건 요약에서 계기와 의도, 관점을 제거할 수 있는가?‘라는 주제로 비판적인 문제를 제기한 바 있습니다.

뉴스에 적용되는 “똑똑한 간결함(스마트 브레비티)”과 관련해서는 어딘가 순진하고 근시안적인 측면이 존재한다. “쓰잘데없는 잉여 단어”로 일축되는 것들은 보통 다른 매체에서 복잡한 문제나 주장의 맥락을 보여주는 세부 사항이다 [...] Axios가 독자들에게 (어떤 문제가) “왜 중요한지” 말할 때 종종 권력에 가까운 출처를 통해 자기 서사의 지형을 그려낸다 [...] (따라서) 당연히 그들에게는 그들만의 동기와 맹점이 존재할수밖에 없다 [...]

이는 최소한의 노력으로 최대한 많은 정보를 빨아들이는 방법, 긴 스토리로 한 끼를 해결할만한 시간이 없는 사람들을 위한 저널리즘 분야의 소일런트*다.

*소일런트(soylent, 링크) : 미국의 대체식품. 가루분말 형식으로 물을 타서 간편하게 셰이크처럼 먹을 수 있다.

-Clare Malone, “스마트 브레비티”의 미심쩍은 지혜The Dubious Wisdom of “Smart Brevity” (newyorker), 2022.9.12(링크)

저는 이 책을 덮으며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오늘날 긴 시간을 집중하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고, 볼 것이 너무 많은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과연 이런 현실의 답변은, 일체의 글맛과 의도를 제거한 [가장 압축적이고 단순한 콘텐츠]일까요?

간략하게 이야기하되 - 우리는 여전히 미묘함과 복잡함, 일견 쓸모가 불명확해 보이는 것에 대한 주목을 잃지 말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2) 실제로 저는 <스마트 브레비티>를 읽으면서, 저자들이 과거 직장에서 글을 쓰면서 어떤 고민을 했고, 어떤 에피소드들이 있었는지 조금 더 구체적으로 읽고 싶다는 생각이 계속 들었습니다. 이 책은 글쓰기를 위한 실용서에 가깝기 때문에 그런 내용이 풍부하게 실릴 수는 없었겠지만요.

【3.‘잼얘’는 원래 가장 좋은 학습법이었다 : <황금 시대>】

이상에서 살펴보았듯, <스마트 브레비티> 방식은 일견 효율적이어보이지만 - 그 지나친 요약 과정에서 일체의 ‘글맛’과 ‘계기, 의도’가 사라지는 문제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저는 생각했습니다.

어쩌면, 통상 ‘쓰잘데없는 것’ 취급 당해왔던 필자의 개성과 문체, 농담, 생생한 일화 등을 충분히 포함하는 쪽이 오히려 ‘효율적’일 수 있지 않을까요?

사실 대부분의 경우 ‘적절치 않은 농담’ ‘난삽한 예시’ ‘협소한 주관(편견)’이 문제지, 농담과 재미난 일화, 자신의 관점을 내세우는 글쓰기 자체가 문제인 건 아닙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오랜 세월동안 사람들은 넉넉한 농담과 정다운 어조, 해찰 등이 포함된 재미난 이야기를 통해 많은 것들을 배워왔죠.

이어 함께 살펴볼, <황금시대>는 쿠바의 독립운동가, 시인인 호세 마르티가 19세기 말 라틴 아메리카 어린이들을 위해 만든 월간지입니다.

32페이지 정도의 조그만 잡지에 소식, 이국의 풍습, 과학, 공학, 역사에 대한 흥미진진한 이야기와 르포, 감동적인 동화 등이 꾹꾹 눌려담겼고요. 이 잡지는 1889년 7월부터 10월까지 4개월에 걸쳐 4번 발행되었고, 잡지 4권을 엮은 것이 이 책입니다.

어린이들을 위해 다양한 지식을 요약, 전달한 ‘백과사전’이라고 할 만하죠.

<fig.4> 1885년 뉴욕에서 촬영된 호세 마르티(1853~1895)의 모습. 시인이자 저널리스트, 독립운동가였던 호세 마르티는 '쿠바의 국부'로 추앙받아왔습니다. 1페소 지폐에 그려진 인물이기도 하죠. (왼쪽) 호세 마르티가 1889년 어린이들을 위해 발행한 잡지 <황금 시대La edad de oro>. 한국어판 부제는 '아메리카 어린이와 청소년을 위한 오락과 교육 월간지'입니다. / wikipedia(링크), 알렙

다만 단지 ‘쓸모있는 지식’을 모아주는 것만이 그의 목적은 아니었습니다.

마르티는 잡지의 창간사에서 아래와 같이 말합니다.

<황금시대>를 만드는 것은 아메리카와 다른 대륙에서 옛날에는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고 지금은 어떻게 살고 있는지를 아메리카 대륙의 어린이들에게 알려주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수많은 유리와 철 제품들, 증기기관과 현수교, 그리고 전기는 어떻게 만들었는지도 알게 해주려는 것이다 […] 우리는 어린이들에게 공장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들, 신기하고 재미있어서 마술책과 다름없거나 다른 어떤 마술보다 더 놀라운 것들을 말해 줄 것이다. 하늘에 대하여 알려진 것들, 깊이를 알 수 없는 바다와 땅에 대한 것도 이야기해 주려고 한다. 너무 공부를 많이하거나 실컷 놀아서 쉬고 싶을 때를 위해 웃기는 이야기와 명작소설도 들려줄 것이다.

-호세 마르티, <황금 시대>(이하 동일)

얼핏 ‘이 책이 어린이 대상의 잡지라 유치하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드실 수도 있는데요.

이 책은 당시 많은 작가 등 성인 독자들에게도 높은 평가를 받았고(실제로 당시 잡지를 읽고 나서 보내오는 독자카드에는 어린이 말고 성인 독자들의 것도 상당수 있었다고 합니다), 오늘날엔 아동문학을 넘어 라틴아메리카 문학의 고전의 반열에 오른 책이기도 하죠.

제가 오늘 레터에서 <스마트 브레비티>와 함께, 이 책을 가져와본 이유는 - 이 책이야말로 스마트 브레비티의 방식과는 ‘정반대’의 방식으로 정보를 요약한 매체이기 때문입니다.

즉, 결론부터 말하자면 -

<황금시대>는 온갖 것들에 대한 요약이면서도 - 글맛을 충분히 살리고 있으며, 쓸데없는 이야기들과 눈길을 끄는 일화들로 가득하고 필자의 관점과 의지력이 생생하게 느껴지는 글입니다.

그러면서도 분량이 굉장히 압축적이며, 전혀 지루하지 않게 흥미로운 방식으로 읽히고 기억에 남는 많은 교훈과 지식들을 얻을 수도 있죠.

어떻게 그게 가능했을까요?

이 책의 모든 이야깃거리를 소개할 수는 없겠지만, 저는 이 책에서 인상적인 세 가지 요소를 꼽아보았습니다.

1.#가치 : 저자가 추구하는 가치, 의지가 엿보이는, 진지한 내용
2.#풍성함 : “화려하게 요약하다”
3.#사랑 : ‘터무니없는 사랑’으로서의 요약

1) #가치 : 우선, <황금시대>는 어린이용 잡지지만 성인 독자들이 읽어도 충분히 감동을 줄만한 진지하고 다채로운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특히 이 책엔 호세 마르티가 평생 고민해 온 평등, 자유 등 중요한 가치에 대한 내용이 친근한 어조로 표현돼있기도 한데요.

한 예로, 마르티는 ‘안남(베트남) 사람들의 나라 산책’이라는 글에서 안남 사람들의 음악, 연극, 풍습, 외모 등을 소개하면서 - 그들이 ‘우리’와 다르다고 해서 무시해서는 안되고 그들의 문화를 이해하고 존중해야 한다고 강조하죠.

모두 자기가 생각하고 본 것만 사실이라고 믿는다 […] 그러나 우리가 해야 할 것은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을 애정을 가지고 연구해보는 것이다. 그러면 사람들은 모두가 같은 아픔과 같은 역사, 그리고 같은 사랑을 소유하고 있으며 세상은 아름다운 사원과 같다는 것을 발견하고 큰 기쁨을 느끼게 된다. 안남 사람들 역시 그 누구보다도 더 용감하게 싸워왔고 앞으로도 싸울 것이다 […]

우리가 보기에 그들의 몸은 멋있어 보이지 않는데 아마 우리 역시 그들에게 멋지게 보이지 않을 것이다 […] 안남 사람들은 또한 “눈은 커서 무엇에 쓰나?”라고 말한다. “그렇다고 코에 더 가까워지지도 않는데?"

호세 마르티는 단지 쿠바의 독립에만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약소국의 풍습과 자유도 존중하는 태도와 연대 정신을 보여주는데요.

글에서는 안남 사람들이 어떻게 외세의 침략에 맞서 자신들의 문화와 삶을 지켜왔는지에 대한 자세한 내용이 이어지기도 합니다.

<fig.5> <황금시대> 4호에 실린 '안남 사람들의 나라 산책'에 함께 게재된 안남의 '파고다 축제' 삽화. (왼쪽) "인디오들의 수호자"라 불렸던 라스 카사스 신부. / 황금시대, Wikipedia(링크)

그리고 그는 잡지에서 많은 본받을 만한 위인에 대한 이야기도 적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라스 카사스 신부(1474?~1566)에 대한 이야기가 인상적이었습니다.

라스 카사스는 “원주민들의 수호자”라는 별명을 지닌 스페인 신부로, 원주민들의 목숨이 먼지 취급을 받았던 16세기에 홀로 원주민들의 인권을 위해 싸운 사람인데요. 그는 정복자들의 나라인 스페인 출신의, 그것도 학식이 높은 상류층이었지만 원주민들의 아픔을 마치 자신의 것처럼 생각하며 괴로워하며 투쟁했습니다.

호세 마르티는 그에 대한 이야기를 생생하고 감동적인 방식으로 어린이들에게 전달합니다.

그(라스 카사스 신부)는 호리호리하고 코는 매우 길고 입은 옷은 너무 커서 땅에 끌렸다. 그가 갖고 있던 힘이라면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것 외에는 없었다. 그러나 그는 농장주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그들에게 위탁된 원주민들의 죽음을 꾸짖었다 […] 판사들을 붙잡고 지난 석달 동안 원주민 아이들이 무려 6천명이나 죽어가는 것을 보고 너무 놀라서 왔다고 고발하기도 했다. 이 말을 들은 판사들은 “학사님, 진정하세요. 정당한 판결을 받게 될 것입니다”라고 말하고는 망토를 어깨에 둘러 맨 채 농장주들과 점심을 먹으러 나가곤 했다 […] 라스 카사스는 밥도 굶고 잠도 제대로 못잤다. 그는 자신의 몸을 무는 농장주 개들의 날카로운 이빨을 느꼈다 […] 마치 자기 손에서 피가 흐르는 느낌을 받았다. 그는 그 모든 잔인한 짓이 자기 탓이라고 느꼈다. 왜냐하면 잘못된 일을 올바로 바로잡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 그는 쉬지 않고 말하고 썼다 […] 그의 글은 말과 다름이 없었다. 고르지 않았던 그의 글씨체는 힘이 있었고, 잉크 빛이 발산하는 섬광으로 가득찼다. 그건 마치 촌각을 다투어 목적지에 도착하려는 기사가 탄 말이 흙먼지를 일으키며 부딪히는 돌에서 번쩍이는 불똥같았다 [...] 투쟁하고, 옹호하고, 울고, 쓰기 위해 라스 카사스는 자기 수도원으로 갔다. 지칠줄 모르던 라스 카사스 신부는 92세에 세상을 떠났다.

저는 이 대목을 읽으며, 그야말로 압도되는 기분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아마도 호세 마르티의 글솜씨 덕분이기도 하겠지만, 저는 그보다 저자 본인이 라스 카사스같은 삶을 평생 추구해온 사람이기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했는데요.

실제로 라스 카사스 신부에 대한 묘사를 찬찬히 읽다보면, 16살에 정치범 수용소에 갔다가 국외 추방당해 42살에 독립전쟁 참전 중 사망하기 전까지 ‘자유’를 추구하며 반평생 망명자로 살아온 호세 마르티 자신의 모습이 겹쳐지곤 합니다.

이런 글들은 ‘불필요한(?)’ 일화와 묘사, 수식어가 많이 포함되어 있기는 하지만 지루하다고 할 순 없겠죠.

2) #풍성함 :

32페이지라는 잡지는 결코 넉넉한 지면이라고는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인상적인 것은, 이 책에서 한사코 호세 마르티는 <요약>이라는 이름을 달고 쓴 글에서조차 건조하고 뻔한 방식으로 핵심 요약만 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잡지 4권 가운데 ‘요약’이라는 단어가 직접적으로 붙은 글은 ‘호메로스의 <일리아스> 요약’인데요. 이 글은 전반적으로 <일리아스>의 내용을 요약하고 있긴 하지만, 그의 개성적인 문체 덕분에 그 자체로 읽는 맛과 재미가 있는 글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마르티 버전의 요약’에는, 핵심 줄거리 요약 외에도 그가 일리아스에서 마주한 매력, 개인적 감상, 번역본에 대한 정보 등까지도 풍부하게 포함하고 있습니다. 일부 발췌해보자면, 이런 대목들이죠.

마치 부모 자식이 함께 있듯이 <일리아스>에는 언제나 신과 사람이 함께 등장한다 […] 그러나 <일리아스>에서 아름다운 것은 세상을 그리는 방식이다. 즉 마치 인간이 이 세상을 처음 본 것처럼 그리고 있다는 점이다 [...] 이 작품은 말을 짧고 강렬하게 한다 “그렇게 하자고 말하자 올림포스산이 진동했다.”

[…] 문장의 기본과도 같은 <일리아스>의 운문을 읽는 독자들은 마치 거인이 된 기분, 또는 무한한 바다를 발아래 두고 산 정상에 올라가 있는 듯한 느낌을 갖는다 […] 만일 독일어를 알면 볼프의 번역본을 읽기 바란다. 그 번역본은 마치 그리스어로 직접 읽는 느낌을 갖게 한다. 프랑스어를 모른다면 당장 배우기 바란다. 그리하여 르콩트 드 릴의 번역본을 읽게 되면 마치 대리석에 새겨진 것같은 고풍스러운 운문의 아름다움을 즐길 수 있다. 스페인어로는 에르모시야의 번역본이 있는데 차라리 안 읽는 것이 더 좋겠다...

이 대목을 읽으면서는, 어린이들에게 <일리아스> 얘기를 하면서 - 일리아스를 ‘제대로’ 읽기 위해선 프랑스어를 당장 배우길 바란다(?)고 말하는 건 대체 뭘까 싶긴 하지만 - 이 글은 분명히, 단지 이 글을 읽고나서 마치 호메로스를 전부 읽은 것처럼 잘난척하게 하기 위한 글이 아니라 이 글을 재미나게 읽고 나서 호메로스에 대해 관심을 갖고 새로운 세계로 향하는 문을 열어젖히는 이들을 위한 글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글은 어떻게든 ‘단순한 번역’이라든지 ‘엑기스 정보’가 될 수가 없습니다.

저는 이런 종류의 요약에는 그가 잡지에서 언급한 “화려한 요약”이라는 말이 꼭 맞게 어울린다고 생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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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 시대> 잡지는 아메리카 어린이들의 손에 책을 쥐여주어 읽히면서 즐겁고 힘들지 않게 가르치고, 지난 일과 현재의 일들을 화려하게 요약해 이야기해준다.

【4.요약에도 ‘터무니없는 사랑’이 담길 수 있다】

이처럼 호세 마르티는 <황금시대>에 자신이 추구해온 가치와 삶을 담았고요. 그의 요약은 단순 지식을 깡통캔에 꾹 눌러 담아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세계로 향하는 호기심을 불러일으켰습니다.

3) #마지막으로는, ‘사랑’의 이야기입니다.

요약과 사랑이 무슨 상관이 있어? 라고 생각하실 수 있지만, 이 책(잡지)을 직접 붙잡고 읽어가다보면 매구절, 단어마다 독자를 향한 저자의 사랑이 흘러넘치는 것이 느껴집니다.

실제로 잡지의 창간사와 각 호의 편집후기(마지막 페이지)를 보면 저자의 사랑이 특히 생생하게 드러나있는데요. 그중 일부 대목을 발췌해서 가져와보았습니다.

* 우리는 어린이들을 위하여 일하고 있다. 혹시 <황금시대>에 나오지 않은 무언가를 알고 싶어하는 어린이가 있다면 마치 늘 알고 지내온 사람처럼 우리에게 편지해 주기 바란다. 우리가 바로 답장을 보낼 것이다. 보낸 편지의 맞춤법이 틀려도 아무 상관 없다. 중요한 점은 어린이가 알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 매호마다 과학, 산업, 예술, 역사 및 문학에 관해 충실히 요약한 내용을 가진 흥미로운 이야기와 기사가 게재될 것이다 […] 선택된 내용들이 아무리 많은 이론을 가진 것이더라도 어린 독자들에게 과학적인 제목이나 어려운 단어를 나열하면서 겁을 먹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이 잡지들의 편집후기를 읽다보면 재밌는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단 한 회차도 빼놓지 않고(!) - “이 글도 싣고, 저 글도 싣고, 엄청 더 많이 쓰고 싶었는데, 아쉽게도 분량이 넘쳐서 다 싣지 못했다”고 매번 길게 하소연하고, 진심으로 슬퍼하고 있다는 것이죠.

심지어 저자는 글을 싣지 못한 게 너무 아쉬운 나머지, 원래 넣으려고 했지만 빠진 글(전깃불에 관한 기사)의 핵심 내용을 편집 후기에서 숨도 안쉬고 한 문단에 요약해서 싣기까지 합니다(...)

* 이 잡지는 항상 자기의 어린이 친구들을 위하여 한정된 지면에 분량이 넘칠 때까지 쓰고 싶기 때문이다. 아직 <숟가락, 포크, 그리고 칼의 이야기>를 해주지 않았던가? 그건 더 이상 공간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밖에도 이미 발표된 것보다 더 많은 이야기가 있으나 아직 실리지 못한 것들도 많다. 인생이란 이런 것이다. 할 수 있는 좋은 일들이 너무도 많으나 우리의 삶이 그 모두를 소화할 수는 없다. 어린이들은 적어도 일주일에 한번은 모여서 모두 함께 누구를 위해 어떤 좋은 일을 할 수 있는지 찾아봐야 할 것이다.

* <황금시대>에서 불운한 것이라면 “숟가락 포크 그리고 칼의 역사”에 대한 글이 될 것이다. 잡지가 매번 나올 때마다 마치 굉장한 것처럼 자신만만하게 광고했는데 결과적으로 그 글을 실을 지면이 부족했다. 결국 준비는 잘했으나 현학적이고 허풍만 떤 꼴이 되었다.

정말 좋은 내용은 온 세상에 널리 광고하는 대신 직접 보고 체험하게 해야 한다. 좋은 것은 그냥 좋아서 좋은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좋은 일을 하거나 다른 이들에게 뭔가 도움이 되는 말을 했을 때 내적인 기쁨을 느끼기 때문이다.

* <황금시대>를 만드는 사람은 매번 출판 때마다 세계 어린이들에게 사랑의 마음을 전하려고 한다. 그런데 출판사에서는 마음은 언제나 넣을 수 있지만, 세상 모든 것을 넣을 수는 없고 전깃불에 관한 기사도 아무 때나 넣을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전깃불에 대한 글에서는 빛을 어떻게 만드는지, 전기란 무엇인지, 그리고 불은 어떻게 들어오고 꺼지는지 말해준다 […] 또한 우리 영혼에 마치 전깃불과 같은 차분한 힘이 있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이러한 분량으로 인해 결국 이 글을 싣지 못했다. 그대신 더 짧은 다른 이야기를 넣었는데, 그게 바로 코끼리 사냥에 대한 것이다

‘잡지에서 분량 문제로 아쉬워하는 게 뭐 그리 대단한 일이라고...’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겠지만,

여기서 사소하지만 중요한 사실은, 이 월간지는 (창간사 등에서 계속 “우리”라고 쓰고있긴 하지만) 실은 호세 마르티 단 한명이, 다른 많은 공식적인 일들을 함께 하면서 32페이지를 처음부터 끝까지 혼자서 몽땅 쓴, 터무니없는 1인 기획이었다는 점입니다.

그렇다면 보통은 어떻게든 지면을 ‘대충 떼우려고’ 난리일텐데, 그는 매 회차마다 더 많은 재미난 글을 싣지 못한 것을 항상 아쉬워하고 있죠. 그러면서도 그는 어떻게든 읽는 재미와 풍부한 일화들을 ‘숭덩숭덩 잘라’ 요약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항상 독자들에게 더 많은, 사랑과 진심에서 우러난 재미난 이야기를 전해주지 못해 매번 발을 동동 굴렀습니다.

이 ‘요약’들이 담긴 잡지에는 호세 마르티의 사랑과 헌신, 화려함과 요약 사이의 치열한 고민이 한글자 한글자마다 들어 있었고, 세계의 어린이들은 이 32페이지짜리 얇은 잡지책을 여러번 아껴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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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여기에 대해서는 공놀이와 마찬가지로 다음에 하기로 하자. 옛날 이야기는 과테말라의 예쁜 소녀 치차가 말하는 것처럼 해야하기 떄문이다. “치차야, 왜 너는 올리브를 그리 천천히 먹니?” “너무 맛있기 때문이죠.” - 호세 마르티, <황금시대>

【5.맺음말】

저는 오늘의 편지를 마무리하며 곰곰 생각했습니다.

과연 글이란 단순히 ‘효율성’만으로 이야기할 수 있는 걸까요? 만약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글을 읽고싶어하지 않는다면, 오늘날 대부분의 글에는 호세 마르티의 글에 있었던 것과 같은 종류의 치열한 고민과 애정이 없기 때문이 아닐까요? 과연 AI 시대에 간편하게 요약을 제공해준다고 할 때, 우리는 그 요약들을 알약처럼 ‘섭취’하고 잔뜩 즐거워할 수 있을까요? 글 같이 ‘고루한 것’을 두고 글맛이라든지 재미 운운하는 생각 자체가 잘못된 것일까요?...

다만 저는 오늘 편지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황금시대>에 실린 여러 구절들을 여러번 반복해 읽으며 왠지 모르게 눈물이 나올 것만 같은 기분이 들기도 했습니다.

단지 내용이 감동적이었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그 눌러담은 구절, 글자 하나하나에서 읽는 사람을 향한 애정이 느껴졌기 때문이었죠.

그의 요약은 사람들과 더 많이 소통하기 위한 요약이자, 더 많은 세계로의 문을 열어주기 위한 요약이었습니다.

오늘 편지는 ‘AI 검색과 요약’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했습니다만, 결국 요약보다도 ‘좋은 글’의 본질에 대해서 고민해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어쩌면 당연한 일일 수도 있는데요. 우리는 ‘요약’이 굉장히 색다른 무언가라고 생각하곤 하지만 - 실은 요약 역시 엄연히 ‘글’의 일종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글을 읽을 때 단지 정보를 위해서만 읽는 것이 아니고, 재미와 친근함, 유익함, 색다른 것을 만나는 즐거움 등을 위해서도 읽습니다.

그렇다고 할 때, 과연 우리가 AI 검색과 요약을 통해 간편하게 핵심 정보만 얻을 수 있게 된 것을 기뻐할 수만 있을까요?...

오늘 레터를 계기로 연구자님들께서도, 내가 어떤 글을 평소에 읽고 있는지, 그리고 그 글이 내게 유용성을 넘어 어떤 즐거움을 주는지, 앞으로 어떤 글을 읽고 싶은지 등에 대해 한번쯤 생각해보시는 계기가 되실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저 역시 앞으로도 어떤 글을 읽고 싶은지, 또 연구자님들과 어떻게하면 더 재미난 글을 통해 소통을 할 수 있을지 고민해보려 합니다.

※레터를 쓰며 읽은 책, 이 주제에 관심이 있으신 독자들이 추가로 읽을만한 서적 등을 추천합니다.

짐 벤더하이 외, 윤신영 외 옮김, 『스마트 브레비티』, 생각의힘, 2023.

-오늘 레터에서는 다소 비판적인 어조였습니다만, 저는 이런 종류의 책이 '새로운 시도'이자 '당대의 사회, 욕구를 잘 보여준다'는 차원에서 좋은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책은 실제로 간결하게 사람들의 눈길을 붙잡는 실용서로서 읽을 수도 있으며, 실제로 타인을 설득하려는 글을 쓰고자 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수도 있을만한 종류의 유익한 책입니다.

다만, 제게 있어서 이 책과 불화하는 지점이 생각을 더 진전시킬 수 있는 포인트였기 때문에 오늘 레터에서는 그 부분에 주목을 해보았습니다.

호세 마르티, 조갑동 외 옮김, 『황금 시대』, 알렙, 2024.

-우리나라에서 그렇게 이름이 많이 알려진 작가는 아니지만, 쿠바에선 그 이름을 딴 거리와 학교 등이 세워질 정도로 '국민 영웅'으로 통용되는 쿠바의 대표적인 시인, 저널리스트, 독립운동가인 호세 마르티가 1889년에 발행한 4권의 어린이 잡지를 엮은 책입니다. 처음 책이 나왔을 때부터 막연히 관심은 있었던 책이었는데, 이번 기회에 너무 재미나게, 정말 문자 그대로 울다 웃다 하면서 읽었습니다. 아마도 (딱히 그렇게까지 충격적이거나 독창적이고 화려하진 않은, 100년 전에 쓰여진) 이 책이 유독 제게 한글자 한글자 스미듯 다가온 이유는, 저의 평소의 고민이라든지 추구하는 지점과 맞닿은 부분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긴 합니다.

꼭 어린이 콘텐츠에 관심이 있는 분이 아니더라도, 상대방을 얕잡아보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자신의 고집을 꺾지 않고 풍요롭고 우아하게 애정이 가득 담긴 이야기를 어떻게 할 수 있을지에 관심이 있으신 분이라면 가벼운 흥미나 호기심으로 한번쯤 읽어보셔도 좋을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슈테판 츠바이크, 정상원 옮김, 『광기와 우연의 역사』, 이화북스, 2020.

-이 책의 원제는 '인류의 위대한 순간'이고요. 슈테판 츠바이크의 이 책은 그의 평전 작품들 가운데서도 굉장한 대중적 반응을 얻어, 독일어권에서만도 수백만부가 팔리며 70판이 넘게 출간되고 독일어 학습 교재로 사용될 정도로 큰 인기를 얻은 책입니다. 실은 이 책을 오늘 레터에서 메인 책 중 하나로 포함시켰다가, 아무래도 '풍요로운 요약'이라는 메시지와 관련해서는 <황금 시대> 한 권에 집중하는 것이 좋겠다는 판단이 들어 오늘 레터에서는 이 책 관련 내용을 제외했습니다.

이 책은 14명의 역사적 위인(혹은 그냥 '사람')의 실패인지 성공인지 정의하는 것조차 모호한, 하지만 인간의 복잡미묘한 삶의 가장 극적인 순간에 주목하는 것을 통해 굉장히 복잡한 진리를 깨우치게 해주는, 하지만 굉장히 짧고 쉬운 글로 쓰여진 훌륭한 '일화'들로 이루어져있습니다.(그리 두껍지 않은 분량에 14명의 '평전'이 실려있으니 중고등학생도 무리없이 읽을만한 분량/수준의 글들이라고 할 수 있죠. 실제 이 책에는 '청소년 권장도서'라는 딱지가 붙어있기도 했습니다.) 만약 기회가 되셔서 직접 이 책을 읽어보신다면, 오늘 제가 말한 '화려한 요약' 혹은 애정이 담긴 요약에 대해 한번쯤 직접 생각해보실 수 있는 기회가 되실 것 같습니다. 그리고 오늘 레터에서 직접적으로 다룬 부분은 아니지만, 설령 '논픽션'이라 할지라도 '문학'적인 요소를 떼어놓고 볼 수 있을지에 대해서도 생각케 합니다.

【글 속 한 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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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홍수 속 뉴스레터 유행

독서시간: 약 8분 / 글자수: 약 3900자

🖍글 속 한 문장

뉴스레터가 새로운 디지털 뉴스 소비 방식으로 성장할 가능성은 충분하다. 진민정 연구위원은 “이메일 뉴스레터는 잠시 유행했다가 사라질 서비스가 아닌, 스마트폰 시대에 적합한 정보 채널”이라 말한다. 스마트폰을 상시 이용하는 환경에서 효능감을 느낄 수 있는 대표적인 서비스가 뉴스레터라는 것이다 [...] 사람들은 뉴스가 정확한 정보의 길잡이가 돼 주길 바란다. 오예준 씨는 “일명 ‘지식 유튜브’ 영상들이 알고 보면 틀렸거나 학계에서 반박된 내용을 이야기하고 있는 경우가 흔하다”며 “학계 경향에 대한 전문기자들의 기사가 더 필요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박아란(미디어학부) 교수는 “저널리즘에 충실한 뉴스와 전문성을 갖춘 뉴스레터가 함께 서비스돼야 할 것”이라 전했다.

👤김스피의 블라블라

과연 젊은 세대는 텍스트를 싫어할까요? 젊은 세대는 텍스트를 더이상 읽고 싶지 않아할 것이라는 통념과는 달리, 뉴스레터를 적극적으로 구독하고 영상보다도 뉴스레터를 통해 소식이나 읽을거리를 적극적으로 얻는 대학생들이 많다고 합니다. 실제로 인스피아의 연구자님들 가운데서도 학생분들이 많이 계시고요. 뉴스레터를 구독하는 대학생들에게 구독 경험과 이유 등에 대해 직접 물어본 고대신문의 2024년 기사입니다.

사실 텍스트냐 영상이냐의 문제라기보다는, 독창성과 효용성, 진정성, 글맛과 통찰 등을 추구하는 것이 우선이고 장르는 그에 뒤따르는 문제가 아닐까 합니다. 저도 텍스트라고 해서 뭐든지 영상보다 선호하는 게 아니기도 하고요.

AI는 검색을 바꿀까?

영문(nyt)

🖍글 속 한 문장

AI 검색 엔진이 가자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믿을 수 있게 요약하거나 사용자에게 어떤 토스터를 사야 할지 알려줄 수 있다면, 누가 굳이 웹사이트를 방문하겠는가? AI 검색 엔진이 그저 모든 걸 삼켜버리고 (결과를) 토해낸다면, 저널리스트, 블로거, 제품 리뷰어가 계속해서 자신의 작품을 온라인에 올리겠는가?[...]나는 작가, 출판사, 온라인 미디어를 소비하는 사람들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 여전히 걱정된다. 그러니 지금으로서는 Perplexity를 사용하는 것의 편리함과, 그것을 사용함으로써 내 자신의 멸망에 일조하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걱정 사이에서 저울질을 해야 할 것 같다.

👤김스피의 블라블라

뉴욕타임스의 테크 전문 저널리스트 케빈 루스가 검색형 AI 퍼플렉시티 서비스를 몇달 간 이용해보고 그에 대한 후기 및 우려를 쓴 2024년 칼럼입니다.

그는 퍼플렉시티를 처음에는 반신반의하면서 사용해보기 시작했지만 어느새 익숙하게 쓰게 되었다고 합니다. 때때로 직접 구글 검색을 해야 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질문들은 AI 선에서 해결이 되었죠.

하지만 잊지 말아야 하는 부분은, 그런 방식의 소통이 과연 생태계를 지속가능하게 유지할 수 있는지에 대한 문제일 것입니다. 원정보를 생산하는 사람들에게 어떤 보상도 돌아가지 않는 생태계는 과연 지속가능할까요?

‘브레비티’는 있는데 ‘스마트’는?

독서시간: 약 7분 / 글자수: 약 3500자

🖍글 속 한 문장

악시오스는 철저하게 효율을 추구했는데 그 효율은 통찰이 만드는 것이다. 스마트 브레비티에서 ‘Brevity(형식)’는 쉽게 따라할 수 있지만 ‘Smart(내용)’가 진짜 실력이고 경쟁력이다[...]통찰을 끌어내고 의제를 제안하는 것이 저널리즘의 핵심이다.
스마트 브레비티는 매우 효과적인 글쓰기 방식일 수 있지만 쓰는 사람이나 읽는 사람이나 한계를 명확하게 인식해야 한다.

👤김스피의 블라블라

<스마트 브레비티>에 대한 슬로우뉴스의 서평입니다. 해외 서평들 가운데 <스마트 브레비티>에 대해 비판적으로 다루기도 한 다양한 서평들을 함께 제시하며 입체적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했습니다.

실은 '간결함'이 의미가 있기 위해서는, 당연히 '스마트(현명함)' 즉 통찰이 우선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스마트 브레비티>에서는 어떻게하면 통찰을 얻을 수 있을지에 대한 내용은 제시되지 않았는데요. 저는 이 책을 읽으면서, 또 서평을 읽으면서 생각했습니다. 어쩌면 브레비티는 스마트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나오는 자연스러운 결과가 아닐까 하는 것이죠. 그렇다고 한다면 사실 본질은 브레비티보다는 스마트쪽에 있다고 볼 수도 있는 것입니다.

문학과 소명, 그리고 호세 마르티

독서시간: 약 7분 / 글자수: 약 3400자

🖍글 속 한 문장

문학의 책무는 무엇일까. 공동체의 더듬이 역할을 하면서 역사를 간파하고 미래를 측정하는 것, 동시에 공동체의 상상력과 감수성을 위한 자율적·미적 가치를 가꾸는 것이라면 호세 마르티는 문학의 가장 지고한 정점에 서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마르티는 위대한 시인이면서 쿠바의 독립영웅이다. 16세에 정치범 감옥에 수용되어 강제노동을 하다 17세에 추방당해 끊임없이 유랑생활을 해야 했던 그는 제2차 독립전쟁을 일으키고 그 전쟁에서 42세의 나이로 전사했다. 매우 다재다능한 인물이었으며 극도의 이상주의자이기도 했던 호세 마르티의 사상은 ‘궁극의 평등’이다. 조국 독립에 일생을 던진 그의 이념은 후세에 고스란히 전달되어, 쿠바 혁명의 진수가 되었고 피델을 비롯한 쿠바국민의 사상의 근원이 되었다.

👤김스피의 블라블라

오늘 레터에서 다룬 <황금시대>를 쓴 쿠바의 국민시인 호세 마르티의 문학 세계를 다룬 글입니다.

그의 문학 세계에서 핵심이 되는 키워드 중 하나는 '소명'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그는 실제로 라스 카사스 신부나 <황금시대>에 언급된 많은 위인들처럼 그 자신의 개인적인 영달이나 명예, 부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유 등 더 높은 가치를 위해 평생 자신의 삶을 바쳐왔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그런 삶과 글은 결코 동떨어질 수 없는 관계였습니다.

오늘 레터에서 자세하게 다루진 못했던 부분이지만, 사실 우리가 글을 읽고 쓰는게 대체로 우리의 삶과 관련된 문제라고 할 때 과연 삶의 태도를 가질 수 없는 AI-기계의 글을 읽는 것이 우리에게 어떤 감정과 깨달음을 줄 수 있을지에 대해서도 새삼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지난 회차의 반응

지난 회차(‘왜 도시는 삭막할까? : 제3의 장소와 입장료’)에 대한 연구자님들의 반응을 모아 소개합니다. 편지로 다양한 의견을 보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래 버튼을 누르면 연구자님들의 반응을 읽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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