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thers’ Note

설날 연휴를 맞아, 썬데이 파더스 클럽에서 특별한 손님을 초대했습니다. 뉴욕의 다국적기업 본사에서 전략 부문 업무를 맡고 있지만, 미식과 일상에 대한 칼럼으로 더 유명한 신현호 님이에요. 그는 스스로 ‘일하는 나머지 시간은 뉴욕에서 레스토랑을 다니고 집에서 요리를 하고 음식에 대한 글을 쓴다’고 소개하기도 했는데요. 그의 우주에 Y라는 존재가 찾아오며 커다란 변화가 생겼답니다.

뉴욕에서 날아온 레터를 님에게 소개할게요.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요. 남은 설 연휴도 즐겁게 보내세요.

“이렇게 큰 책임이라는 걸 그동안 왜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지?” 어느 날 문득 아내는 지구의 운명을 어깨에 짊어진 수퍼 히로인이라도 된 것처럼 말했다. “아이를 낳으면 행복할 거라는 이야기만 들었잖아.” 행복하지 않다는 뜻은 물론 아니었다. Y를 만나고부터 우리집에서는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다만 너무 큰 기쁨에는 너무나 큰 책임이 따른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는 의미이다. 

돌이켜보면 주변의 친구들은 꾸준히 냉엄한 현실을 이야기해주고 있었다. Y가 태어나기 전 조금 큰 금액을 들여 괜찮은 앰프를 거실 오디오에 추가할까 고민하고 있는 나에게, 한 친구는 “너는 그 앰프로 ‘아기상어’를 하루 종일 듣게 될 것이다”라는 예언을 했었다. 이른 시간 술자리에서 급하게 일어서던 한 친구는 “육아에 숙취는 사치”라는 라임을 남기고 홀연히 사라지기도 했다. 그때는 그 말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을 뿐이었다. 

얼마 전 다녀온 여행을 통해 다시는 예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알게 되었다. 아이와 함께 한 첫 해외여행이었다. 그동안 우리의 여행은 언제나 음식과 술로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유아차를 거부하는 20개월 아기와의 여행에서는 하루에 제대로 된 레스토랑 1곳을 소화하기도 쉽지 않았다. 그나마도 후쿠오카가 서울에 비해 훨씬 더 아이에게 친절한 도시였기에 가능했다.

이렇게 인생이 송두리 채 달라질 것을 미리 알았다면 아이를 낳지 않았을까? 이 물음은 애초에 답을 하기 어려운 질문이다. 지금에 와서는 Y가 없는 세상을 상상하기조차 힘들기 때문이다. 2021년 봄날, 어떤 분기점에서 영원히 다시는 만날 수 없는 평행우주가 갈라져 나갔다. 평행우주 한쪽에는 우리 부부 둘만 있다. 그리고 지금의 이 우주에서 우리는 Y를 만났다. 내가 할 수 있는 답은 그뿐이다.

둘만 있던 시기를 떠올려보면 다른 쪽 평행우주에서도 꽤 즐겁게 살고 있을 것 같다. 교토에 생긴 새로운 호텔들에 대해서 이야기하다가 갑자기 비행기표를 사서 며칠 훌쩍 다녀오기도 하고, 계절에 한 번쯤 파인 다이닝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고, 기다리던 공연을 함께 볼 수도 있었을 것이다. 거실 오디오에서는 하루 종일 어른의 음악이 흘러나오고, 주말 오후에 낮술 몇 잔 마시고 TV를 보다가 스르륵 낮잠에 들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마치 전생의 기억같이 아련하다.

육아는 ‘시간과 관심의 블랙홀’이다. 애초에 아기는 같이 있을 때 딴짓할 겨를을 주지 않는다. 울기, 떼쓰기, 귀여움, 옹알이 등등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나의 관심을 확보한다. 그리고 내가 나 자신의 욕구를 앞세우지 못하게 만든다. 나의 에고는 그렇게 육아의 블랙홀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육아에서 가장 힘든 부분은 부족한 잠이나 달래지지 않는 울음 같은 것들이 아니다. 내가 점점 사라진다는 사실이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평행우주에는 전혀 다른 즐거움이 있다. 모든 것이 시큰둥해지던 시기에 Y를 만났다. Y는 ‘나에게 이런 웃음이 있었나?’ 싶은 웃음을 웃게 해 준다. 아침에 눈을 뜬 Y가 잠이 덜 깬 채로 내 얼굴을 발견하고서 씩- 웃는 걸 본다. 이는 아침을 시작하는 가장 완벽한 방법 중 하나다. 유아식이 맛있을 때 Y가 추는 엉덩이춤이 있는데 그걸 보고 나면 아침부터 하루 종일 웃음이 난다. 

Y의 모든 점이 좋다. 먹기 싫은 반찬을 뱉으며 고개를 도리도리 흔드는 모습도, 맛있는 부분만 딱 한 입 먹고 내버려놓은 과일조각도, 잘 때 코 고는 소리도 귀엽다. 아무리 머리 위로 올려도 하트 모양이 만들어지지 않는 하찮은 팔길이도, 딸기를 먹은 직후의 숨냄새도, 분수에서 물이 솟아올라 사방으로 확 퍼지는 것 같이 까르르 웃는 소리도 좋다. 종종 ‘내가 뭐라고 이 아이는 나를 이렇게까지 좋아해 주는 걸까?’라는 감정이 들 때가 있다. Y는 자기가 맛있게 먹은 음식은 꼭 나한테도 먹어보라고 권한다. 내가 무당벌레를 좋아한다는 이야기를 해준 뒤로 모든 그림책에서 무당벌레를 찾아서 보여준다. 잘 때는 마치 충전을 하는 것처럼 꼭 신체의 일부를 나에게 대고 잔다. 

행복의 강도보다 빈도가 더 중요하다면 육아는 행복한 일일 수밖에 없다. 아기와 함께 있다면 행복한 순간이 끊임없이 찾아온다. 그러다 문득 ‘지금 이 순간이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것 같다’는 느낌도 든다. 요즘 우리가 같이 좋아하는 뉴진스의 ‘어텐션’을 틀어놓고 외출한 엄마를 기다렸던 날, 한국의 따뜻한 온돌을 온몸으로 느끼며 차가운 귤을 까먹으며 이유도 없이 깔깔 웃던 날, 창밖에서 햇빛이 쏟아지던 어느 오후 Y와 함께 빨래를 널던 날, 모두 오랜 시간이 지나도 떠올릴 수 있는 장면으로 남아있다. 이런 행복이 잠시 머물다 간다는 걸 잘 알고 있다. 아이들은 금방 크고 금세 부모를 떠난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이 순간들이 더 소중하다.

작년에 잠시 육아를 떠나 혼자만 뉴욕에 남아 있을 기회가 있었다.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처럼 다른 평행우주에서 온 또 다른 나를 만난 기분이었다. 오랜만에 혼자서 멋진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고 공연을 보고 만취에 가깝게 술을 마셨다. 그리고 돌아와 침대에 누워서 생각했다. 난 더 이상 이런 인생을 원하지 않는다고. Y가 있는 평행우주로 돌아가고 싶다고.

Fathers’ Update

지난 레터(48화 당근하면서 이런 경험은 처음이야)에 보내주신 답장들을 소개할게요. 고맙습니다.

💬 28개월의 아이를 키우고 있습니다. 아이는 갖고 싶은 장난감, 원하는 놀이가 있으면 “~해줄래?(=빌려줄래? 같이 놀래? 사줄래?)”라고 표현합니다.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친구를 깨물거나 때리거나, 부모에게 떼를 쓰는 등 모습이 보이지 않아 ‘순한가 보다, 대화로 하려고 하네, 기특하다’ 하며 자아도취에 빠졌었는데… 혁진님의 글을 보고 깊은 생각에 빠졌습니다. 아이와 부모 앞에 펼쳐질 수많은 경우의 수에서 ‘지혜롭고 현명하게 양육할 수 있도록’ 준비를 해야겠습니다. 아이가 지금처럼 ‘건강한 생각을 하고 옳은 행동을 할 수 있도록’ 아이의 관심에 늘 귀 기울여야겠습니다. (Ji_0)

💬 아이의 삐뚤빼뚤한 반성문에서 아이가 느꼈을 죄책감과 부모가 느꼈을 좌절감이 한 번에 느껴지네요. 내 아이가 벌써 그렇게 컸다는 걸 알았을 때, 내 아이가 벌써 이런 환경에 노출되어 다는 걸 알아챘을 때 부모가 느낄 감정을 어땠을지 가늠조차 안되네요. 부모에게는 평생 한없이 작은 아이인데, 그 아이가 동시에 사회에 나가서도 정직하게 살 수 있도록 교육해야 한다는 건 참 어려운 일인 것 같아요. 이번 3월 아이의 첫 취학을 앞두고 핸드폰을 사줄지 고민하고 있는 시점에서 이 이야기는 정말 남의 이야기 같지 않네요ㅠ (아이둘워킹맘)

💬 글을 다 읽고 나서 조금 눈물이 났습니다. (눈물이 났다고 글로 쓰니까 눈물이 더 나네요 ㅜ.ㅜ) 물건을 산 아이의 부모가 아이를 얼마나 생각하고 사랑하는지 알 것 같아서요. 아이를 데리고 경찰서를 간 마음이 어떨지 생각하니 제 마음도 아픕니다. 아이는 자라면 자랄수록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이 많이 생길 거고, 저와는 다른 하나의 인격체가 되겠지요. 그럼에도 저는 아이를 품에 안고 있던 그 순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하루종일 아이의 뒤꽁무니를 눈으로 좇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정답은 없으니까요. 더 사랑하고 더 믿는 것 밖에. (초록테이블)

💬 읽는 내내 사기 당하신 줄 알고 얼마나 마음이 졸였는지 몰라요! 저는 이제 7개월 차에 접어든 딸아이를 키우고 있는데 모든 것을 해줘야 하는 상황이 버겁다가도, 스스로 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을 때를 상상하면 별안간 마음이 먹먹해져요 ㅎㅎ 아직 한참 남았는데 웃기죠. 아이가 스스로 가치판단을 하고, 결정권을 가질 때가 오면 그 모습을 보며 제 육아에 대한 성적표라 생각하게 될까 두렵기도 해요. 저는 살면서 가슴 철렁한 일을 크게 몇 번 겪어서 그런 비슷한 느낌만 와도 심장이 심하게 쿵쾅거리고 손발이 차가워지는데요, 아이를 키우다 보면 그런 일이 많겠죠? 아무튼 잠시라도 미리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밤박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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