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시.사 레터 90회 (2022.02.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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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저는 영화/드라마 기획 PD와 시나리오 작가로 일하고 있는 권밀입니다. 제가 하는 일은 왠지 소설과 더 잘 맞을 것 같은데 시라니 의외라고 느껴지시나요? 그럼 이건 어떨까요. ‘사랑해’와 같이 단순 명료한 단어를 ‘낯간지럽고 헛기침이 나오는 말’이라고 표현하는 것. 누군가의 마음엔 더 크게 와닿을 수 있죠.
그래서 시를 읽습니다. 그래서 시를 사랑하고요. 제 상상을 넘어서는 문장들을 보고 있으면 그 안에서 영화의 한 장면이 떠오를 때도 있고, 막혔던 인물들의 대사가 나오기도 하며 작품을 통해 진짜 하고 싶은 이야기에 대해 다시 고민할 수 있는 계기가 생기기도 하거든요.
오늘은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에 읽었던 두 편의 시로, 마음 깊은 곳에 숨겨온 ‘미안함’에 관해 여러분에게 이야기할까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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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밀 피디가 사랑하는 첫번째 시💘
사랑을 줘야지 헛물을 켜야지 (고명재, 『우리가 키스할 때 눈을 감는 건』)
가게문을 닫고 우선 엄마를 구하자 단골이고 매상이고 그냥 다 버리자 엄마도 이젠 남의 밥 좀 그만 차리고 귀해져보자 리듬을 엎자 금(金)을 마시자 손잡고 나랑 콩국수 가게로 달려나가자 과격하게 차를 몰자 소낙비 내리고 엄마는 자꾸 속이 시원하다며 창을 내리고 엄마 엄마 왜 자꾸 나는 반복을 해댈까 엄마라는 솥과 번개 아름다운 갈증 엄마 엄마 왜 자꾸 웃어 바깥이 환한데 이 집은 대박, 콩이 진짜야 백사장 같아 면발이 아기 손가락처럼 말캉하더라 아주 낡은 콩국숫집에 나란히 앉아서 엄마는 자꾸 돌아간 손가락을 만지작거리고 오이고추는 섬덕섬덕하고 입안은 푸르고 나는 방금 떠난 시인의 구절을 훔쳤다 너무 사랑해서 반복하는 입술의 윤기, 얼음을 띄운 콩국수가 두 접시 나오고 우리는 일본인처럼 고개를 박고 국수를 당긴다 후루룩후루룩 당장이라도 이륙할 것처럼 푸르륵 말들이 달리고 금빛 폭포가 치솟고 거꾸러지는 면발에 죽죽 흥이 오르고 고소한 콩물이 윗입술을 흠뻑 스칠 때 엄마가 웃으며 앞니로 면발을 끊는다 나도 너처럼, 뭐라고? 나도, 나도 너처럼, 엄마랑 나란히 국수 말아먹고 싶다 사랑을 줘야지 헛물을 켜야지 등불을 켜야지 예민하게 코끝을 국화에 처박고 싶어 다음 생엔 꽃집 같은 거 하고 싶다고 겁 없이 살 때 소나기 그칠 때 구름이 뚫릴 때 엄마랑 샛노란 빛의 입자를 후루룩 삼키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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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도 가끔 “책을 왜 좋아해요?”란 질문을 받는데 그에 대한 제 답은 늘 같습니다. “뒷얘기가 너무 궁금해서요.”
엄마는 제가 어릴 때부터 책을 많이 읽어주셨어요. 그런데 어느 날부터 극의 위기 부분까지만 읽어주시고 “내일 읽어줄게” 하곤 책을 덮으시는 거예요. 처음엔 엄마를 믿고 기다렸죠. 그런데 어느새 점점 전개 부분까지 줄어버린 거예요. 제가 들을 수 있는 이야기가요! 학교에 보내야 하는데 강제로 글을 가르치긴 싫으셨던 엄마는 “글을 읽을 수 있게 되면 더 많은 책을 읽을 수 있어”라는 말로 제 귀를 쫑긋거리게 했죠. 책의 뒷얘기가 진짜 궁금했거든요.
지금이 제 인생 뒷얘기 중 어디쯤인지는 모르겠습니다.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선 너무 많은 것을 포기해야만 했어요. 몇 년 전 그날도 운 나쁜 날 중 하나였는데 “엄마 엄마”, 나 또 안됐어, 라는 말이 차마 안 떨어졌죠. “엄마는 자꾸 돌아간 손가락을 만지작거리고”에서 결국 터져나오는 눈물을 막지 못했어요. 손을 하도 써서 관절염 때문에 젓가락질도 제대로 못하는 상태인 거잖아요. 퉁퉁 부어 있던 엄마의 손가락이 겹쳐 보였습니다. 매끈한 제 손가락이 부끄러웠고요.
생각해보니 엄마가 제게 책을 읽어주셨던 나이와 그때의 제 나이가 같더군요. 어린 제가 매일 책을 읽어달라고 보채던 순간들이 엄마 인생의 뒷얘기 중 어디쯤이었을까요. “다음 생엔 꽃집 같은 거 하고 싶다고” 말하던 엄마의 뒷얘기를 매번 훔쳐본 것만 같아, 미안하단 말도 고맙다는 말도 그 무게를 가늠하기엔 너무 가볍기만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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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간 우.시.사. 소식🤍
"2023년에도, 시도 때도 없이 우리는 詩를 사랑해."
2023 #동네라이브 두번째 시간✨ 고명재 시인편 (with 박연준 시인)
첫 시집부터 서점가를 들썩이게 했던, 『우리가 키스할 때 눈을 감는 건』 고명재 시인을 직접 만나보아요! 마음 안쪽에 사랑이 빵빵하게 부풀어오르는 시간이 여전히 시를 사랑하는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2/2 목요일 저녁 7시 30분 문학동네 인스타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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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밀 피디가 사랑하는 두번째 시💘
속눈썹의 효능 (이은규, 『다정한 호칭』)
때로 헤어진 줄 모르고 헤어지는 것들이 있다
가는 봄과
당신이라는 호칭
가슴을 여미던 단추 그리고 속눈썹 같은 것들
돌려받은 책장 사이에서 만난, 속눈썹
눈에 밟힌다는 건 마음을 찌른다는 것
건네준 사람의 것일까, 아니면 건네받은 사람
온 곳을 모르므로 누구에게도 갈 수 없는 마음일 때
깜박임의 습관을 잊고 초승달로 누운
지난봄을 펼치면 주문 같은 단어에 밑줄이 있고
이미 증오인 새봄을 펼쳐도 속눈썹 하나 누워 있을 뿐
책장을 넘기는 바람에도 날아가지 않은
출처 모를 기억만 떠나는 방법을 잊었다
아지랑이의 착란을 걷다
눈에 든 꽃가루를 호─ 하고 불어주던 당신의 입김
후두둑, 떨어지던 단추 그리고 한 잎의 속눈썹
언제 헤어진 줄 모르는 것들에게는 수소문이 없다
벌써 늦게 알았거나 이미 일찍 몰랐으므로
혼자의 꽃놀이에 다래끼를 얻어온 날, 그럼에도 불구하고 올 것은 온다는 역설처럼 당신의 입김 없이도 봄날은 간다
화농의 봄, 다래끼
주문의 말 없이 스스로 주문인 마음으로
한 잎의 기억을
당신 이마와 닮은 돌멩이 사이에 숨겨놓고 오는 밤
책장을 펼치면 속눈썹 하나 다시 뜨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돌아올 거라 믿는, 꽃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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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쓰지만 영화를 더 많이 좋아하는 유주와, 시나리오를 쓰지만 시를 더 좋아하던 전 서로 본 영화와 시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는 걸 좋아했어요. 그 숱한 이야기들 속 이은규 시인의 「속눈썹의 효능」이라는 시는 우리가 늦가을 초입에 나눠 읽은 시입니다.
지난해 유주의 첫 기일과 생일을 넘겨 보냈습니다.
“눈에 밟힌다는 건 마음을 찌른다는 것”, 기억하고 있지만 울지 않았던 탓인지 우연히 펼친 소설과 시들 속에서 유주의 이름이 등장할 때마다 속절없이 울었습니다. 내가 아는 유주와 내가 모르는 유주를 보면서 여전히 살아 있다 느껴졌기 때문이지요. 겨울에 태어나 봄에 간 유주는 소설 속에서 시 속에서 계절 내내 기억되었으면 좋겠어요. 아직 유주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가 많거든요.
“언제 헤어진 줄 모르는 것들에게는 수소문이 없다”, 우리의 마지막 만남을 유주는 알고 있었을까요. 그래서 아무 이유도 없이 ‘나 지금 서울 올라가는 중이야. 우리 만나자’라고 했던 걸까요. 왜 ‘잘 가’라는 뻔한 인사말 대신 ‘밀아, 네가 있어 다행이다. 우리 또 볼 수 있지?’라고 했을까요.
다행이라는 말에 상대의 불행이 숨겨져 있을 수도 있단 생각을 저는 그때 미처 하지 못했습니다. 간절하게 붙잡고 싶었던 무언가를 제게서 찾으려 했었다는 것만 어렴풋이 느낄 뿐이죠. 이 글을 쓰는 와중에도 유주를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돌아올 거라 믿는, 꽃달”처럼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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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주 시믈리에는 지난해 첫 소설집 『유령의 마음으로』를 펴낸 임선우 소설가입니다. 독자들뿐 아니라 '2022 소설가 50인이 뽑은 올해의 소설' 3위에 랭크돼 동료 작가들의 지지도 많이 받았던 작품집이지요. 임선우 소설가가 고른 시 두 편이 무엇일지 기대됩니다. 다음주에 만나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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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시사>의 시믈리에가 되어주실 분 🙋♀️💛
<우시사> 독자분들과 함께 나누고 싶은 시가 있다면 아래 링크의 양식을 작성해 제출해주세요. 차곡차곡 쌓아두었다가 하나씩 꺼내어 <우시사> 독자분들께 대신 소개해드릴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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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호 <우시사>에 대한 독자 여러분의 소중한 의견💌
💬 살고 싶은 시와 죽어버린 시. 나는 후련할 것 같은데, 이런 생각들을 끄집어내줘서 고마워요.
💬 먹먹한 시도 정수윤 번역가님의 글도 마음을 꽉 채워주는군요. 시 한 편으로도 마음속에 함박눈이 내립니다.
💚의견 주신 모든 독자분들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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