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호 ㅡ 이삭을 줍는 마음으로 🌾🍂

안녕하세요. 독자님 :) 제 책상 옆 책꽂이에는 2027년 다이어리가 꽂혀있는데요. 요즘 틈틈이 아직 쓰이지 않은 다이어리를 펼쳐보곤 해요. 큰마음 먹고 비싸게 해외 직구한 다이어리라 소중하기도 하지만, 빈칸을 들여다보며 내년을 미리 상상해 보는 게 은근히 좋더라고요. 한 해의 끄트머리가 다가오면 까닭모를 우울감이 몰려오며 마음이 급해지곤 했는데 내년 다이어리를 들여다보니 새로운 시간을 기대하는 마음이 조금씩 채워지고 있어요. 이렇게 서서히 올해와 이별하며 새로운 해를 맞이하려고요. 벌써 11월이네요. ‘벌써’라는 말 뒤에 ‘뭘 했다고’라는 한탄보다는 ‘남은 시간 잘 지내야지’라는 야무진 결심이 생기길 응원하며 편지를 띄웁니다. 이번 편지에는 독자님이 기다리실만한 소식도 있으니, 끝까지 읽어주세요. 😘

박정은의 계절 ㅡ 삶과 죽음의 경계가 흐려지는 시간 앞에서

대구의 성직자 묘지에는 “오늘은 내 차례, 내일은 네 차례(Hodie mihi, cras tibi)”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습니다. 죽음은 두렵기도 하지만, 모두가 떠나가는 길이라 생각하면, 담담한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사랑했던 사람들을 떠나보내도, 그들은 우리 삶 속에 언제나 함께 있습니다. 세계 여러 나라의 문화에서, 11월은 죽은 자를 기억하고, 삶과 죽음의 경계가 흐려지는 시간입니다. 이번 한 달은 죽음을 가까이 두고, 묵상하며 살아보기로 합니다. 


첫째 주 : 산 자와 죽은 자의 친교 속으로 걸어가기 

이번 주는 우리가 사랑했던, 혹은 우리를 사랑해 준, 그리고 이제는 이 세상을 떠난 분들께 물려받은 유 산에 감사한 마음을 가져봅니다. 


 멕시코 사람들은 가족이나 친구들을 기억하는 제단을 어느 집에서나 마련해 그들이 좋아했던 음식을 올려 놓고, 아직도 그들이 우리와 함께하고 있음을 확인합니다. 가톨릭 교회에서는 위령의 달이라 하여, 죽은 자와의 친교 속에서, 그들이 하늘나라에서 평화와 안식을 누리기를 기도합니다. 이런 묵상과 기도는 한 번 뿐인 우리의 삶이 더욱 풍성하도록 도와줍니다. 


촛불을 켜고, 빈 공간에 그분의 사진을 올려놓습니다. 또는 그분이 나누어 준 삶의 지혜나 태도를 상징하는 물건을 올려 둡니다. 그리고 그분을 기억합니다. 그분이 좋아한 노래는 무엇이었고, 어떤 음식을 좋아했는지, 그리고 생을 어떻게 꾸려 가셨으며 그분의 가장 좋은 점은 무엇이었는지, 내 가 살면서 닮고 싶어 한 부분이 무엇인지를 생각합니다. 그리고 평화를 누리시기를 기원합니다. 마지 막으로 촛불을 끕니다. 같은 방식으로 매일 다른 분을 기억할 수도 있고, 매일 한 분을 기억하면서, 한 주를 보낼 수도 있습니다. 


둘째 주 : 죽음 준비하기 

많은 종교에서 죽음을 묵상합니다. 죽음은 사실 우리 안에 있고, 우리는 하루하루 죽음을 향해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보람있고 아름답게 살고 싶다면, 죽음을 묵상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다 가지려고 웅크리고 욕심부려 보아도 죽음 앞에서 우리는 결국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음을 발견할 것입 니다.  나에게 딱 일주일의 시간이 주어졌다면 무엇을 하고 싶습니까? 어디에서, 누구와 무엇을 마지막으로 하고 싶나요? 물론 이 상상 속에서는 흘러가는 시간은 계산하지 않아도 됩니다. 다섯 가지만 적어 봅니다. 이 작업은 현재 내게 가장 소중한 사람, 그리 고 소중하게 생각하는 장소를 보여줄 것입니다. 


셋째 주 : 영원으로 걸어들어가기 

이번 한 주간은 예술 작품을 가지고 렉시오 디비나 를 합니다. ‘거룩한 읽기’를 뜻하는 렉시오 디비나는 주로 성경이나 책으로 하지만, 영화나 음악, 예술 작품으로도 할 수 있습니다. 예술 작품을 깊이 음미함으로써 그 작품 속에 깃든 영원, 사랑, 아픔, 그리고 죽음의 뜻을 발견해 봅니다. 이번 뉴스레터에서는  조르주 드 라 투르(George de La Tour)의〈참회하는 마리아 막달레나〉를 소개합니다.

고요에 잠긴 영혼은 누구라도 아름답습니다. 아무리, 아름다움이 보는 사람의 시선에 달려 있다고 해 도, 고즈넉한 등불을 켜고 사색에 잠긴 여성은 아름답습니다. 독서를 다 마친 듯, 혹은 책 너머의 어떤 진실과 마주하고자 함에선지, 책은 다 덮여 있습니다. 그리고 그녀의 아름다운 다리 위에는 죽음, 혹 은 찰나를 상징하는 해골이 놓여 있고, 마치 친한 친구인 듯 그녀는 그 해골을 만지고 있습니다. 그림 은 마치 영원은 마치 죽음과 현재 사이에서 유한을 인식할 때, 그 임계 공간에서 시작됨을 알려주는 것 같습니다. 빛과 어둠, 금욕과 감각이 함께하는 우리 삶을 보여주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래서 무척 인간 적으로 느껴지는 그림입니다. 조르주 드 라 투르는 ‘참회하는 마리아 막달레나’를 주제로 비슷하면서 도 다른 네 개의 작품을 그렸는데, 저는 미국 카운 티 미술관에 소장된 작품을 소개합니다. 물론 다른 작품을 택해서 감상해도 좋습니다. 


이 그림에서 가장 눈이 가는 부분은 어느 곳입니 까? 전체적으로 어떤 느낌이 드나요? 그녀의 몸에 서 빛을 받은 부분은 어디이며 어둠에 잠긴 부분은 어디입니까? 어둠은 어디에서 시작되고, 빛은 어디 에서 시작됩니까? 그녀는 어디를 향하고 있나요? 이 그림을 보고 어떤 생각이 드나요? 편태 도구(밧 줄로 된 채찍. 금욕적 생활을 상징합니다)와 부른 배, 긴 머리와 어깨를 내놓은 상의는 서로 대조를 이룹니 다. 나와 가장 닮은 부분이 있다면 어느 부분인가요? 내 삶에 던져주는 메시지는 무엇일까요? 


넷째 주 : 영원을 갈망하기 

가을이 준 축복을 묵상하는 시간을 갈무리하는 주간입니다. 이삭을 줍는 마음으로, 내가 적어 놓은 노 트를 시간 나는 대로 천천히 읽어 봅니다. 하루에 두 주씩, 내가 마주한 삶의 조각들과 내가 반추해 낸 삶의 의미들을 천천히 읽어 봅니다. 밑줄도 그어 보고, 색깔도 칠해 봅니다. 그리고 새로운 생각들도 여백에 다시 덧붙여 봅니다. 마지막 날에는, 이제 익숙해진 내 마음의 나무 곁에 가서, 나의 숨소리를 듣습니다.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만족하면 만족한 대로, 스스로에게 감사하십시오. 나무를 한 번 만져 보고, 나무가 내게 주는 말을 들어 보십시오. 그리고 이제 또 새롭게 떠나는 나의 여정을 축복해 주십시오.

오수경의 계절 ㅡ 깊숙이, 깊숙이

아무리 ‘러닝’이 유행해도 ‘아무 운동 안 하기’를 실천하며 당당하게 시대를 역행하던 제가 어쩌다 수영을 하게 되었습니다. 집에서 2분 거리에 시에서 운영하는 수영장이 생겨 ‘되면 한다’는 마음으로 추첨 신청을 했는데 선정된 것이지요. 역시 ‘장비빨’이 중요하니 부랴부랴 수영복과 모자, (제 이름과 똑같은) 수경, 수영 가방 등을 준비하고 어색하게 수업에 참여했죠. 초급반답게 ‘음파음파’부터 배웠고, 역시 초급자답게 ‘음파음파’도 제대로 못 해 선생님의 관심 대상에 오르는 기염을 토하며 수영인이 되었습니다. 신기하게도 다른 운동을 할 때는 운동 가기 전 날부터 불행했는데 아직 수영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드디어 인생 운동을 만난 것일까요? 겨우 음파음파를 떼고, 물에 뜨는 법을 배우고, 드디어 판떼기를 잡고 앞으로 나아가는 데 성공한 주제에 ‘이 정도면 금세 배우겠는데? 후훗’ 자만하던 저를 선생님이 붙잡았습니다. 

“머리를 더 깊숙이 넣어야죠! 머리를 충분히 물에 담그지 않으니, 발이 자꾸 가라앉아서 몸에 힘이 들어가 앞으로 안 나가죠.”
“아 어쩐지. 그래서 속도가 안 났던 거군요.” 
“아니, 속도 낼 생각을 왜 해요. 초급자가. 물에 뜨기만 하면 돼요. 일단, 머리를 깊숙이 넣어요.” 


보다 못한 선생님이 자세를 교정해 주었지만, 저의 관성은 자꾸 고개를 쳐들곤 합니다. 선생님은 “왜 머리를 자꾸 들까아?” 신기해했지만, 이유는 단순했습니다. 물이 무서워서, 앞 사람을 따라잡기 위해서, 뒤에 오는 사람에게 걸림돌이 되지 않으려고. 물에 머리를 충분히 담그지 못하는 저를 보며 삶에 관한 저의 태도를 생각해 보게 됩니다. 몸에 힘을 잔뜩 주고, 한껏 힘차게, 그리고 끊임없이 무언가를 하는 저를 보며 누군가는 부지런하고 에너지가 넘친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사실은 두려움과 욕망에 허우적대는 것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깊숙이, 깊숙이”라는 말이 제 인생을 향한 따끔한 조언으로 들리기도 합니다. 

한 해의 끝이 다가올수록 영혼을 어딘가에 두고 온 사람처럼 마음이 두서없어지곤 합니다. 올해도 무서워서, 뒤처질까 봐, 누군가의 걸림돌이 될까 봐 고개를 쳐든 채 허우적댄 날이 많았지요. 그런데 물은 정반대의 것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머리를 깊숙이 넣어야 몸이 뜬다는 것, 초급자는 속도 낼 생각 말고 일단 뜨기만 하면 된다는 것. 그게 은근 위로가 되더라고요. 그래서 요즘은 잠깐이라도 눈을 감고 생각을 비우는 시간을 가지려 합니다. 세상의 소란 아래로 머리를 깊숙이 넣어 보는 연습이랄까요. 아직은 판떼기를 붙잡은 초급자지만, 힘을 빼면 조금씩 떠오를 수 있다는 걸 이제는 조금은 알 것 같아요. 독자님도 잠시 깊숙이, 깊숙이 마음을 고요에 담가보는 건 어떨까요?
 임혜진의 계절 ㅡ 《계절이 다 사라지기 전에》 출간 예고!

옐로브릭은 11월 중순 출간 예정인 신간 마무리 작업이 한창입니다. 바로 이 《오브》 뉴스레터를 통해 독자들과 함께한 박정은 수녀님의 명상 작업을 다듬어 엮은 열두 달 계절 명상록, 《계절이 다 사라지기 전에》입니다.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은 12월부터 시작하도록 구성되었다는 점입니다. 기독교에서는 성탄 전 넷째 주일에 대림절을 시작해, 그리스도의 탄생을 잠잠히 기다리며 그 시기를 보냅니다. 불교에서도 그즈음인 음력 10월 보름에 중요한 겨울 수행인 ‘동안거冬安居’에 들어갑니다. 또 요즘 영미권 Z세대 사이에서는 겨울을 성장의 시간으로 삼아 어떤 목표에 집중하거나 삶을 리셋하는 ‘윈터 아크Winter Arc’ 트렌드도 있습니다.


주요 영성 전통에서 12월을 깊은 고요 속에서 기도와 수행으로 보내는 리듬에 맞추어, 이 계절 명상록도 12월을 시작점으로 잡았습니다. (물론 어느 계절, 어느 달이든 각자 사정에 맞게 펼쳐서 시작하셔도 좋습니다) 때마다 찾아오던 계절이 앞으로는 조금씩 얼굴을 달리하거나, 어떤 풍경은 차츰 사라질 수도 있겠다는 감각이 익숙해진 시절이기에, 《계절이 다 사라지기 전에》는 ‘한정판’이 된 계절을 더 귀하게 누리고, 걷고, 쓰고, 읽자는 마음으로 지은 제목입니다.


그래서 뉴스레터 <오브>에서 그동안 달마다 소개해 드린 월간 명상 가이드는 11월까지 연재하고 한 챕터를 닫으려 합니다. 다음 호에서는 신간 출간 소식과 함께 독자님들을 초대할 수 있는 이벤트를 준비해 안내해 드릴게요. 각자 깊이 고독하지만 따스한 연결도 함께하는 12월을 준비해 보겠습니다. 그럼 《계절이 다 사라지기 전에》를 기대해 주시고, 응원 부탁드립니다. 

지난 15호에 보내주신 따듯한 답장을 소개합니다.
  • 이번 글을 읽으며 고향에 대해서 생각해 봤어요. 얼마 전 서도호 전시를 보면서 집에 대한 생각과 연결이 되는 거 같아요. 과연 집이란 어떤 곳인가 생각하게 된 전시였거든요. 이번 뉴스레터를 읽으면서도 내 집이나 내 고향이 어떤 것인지 한 번 더 깊게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졌어요. 내가 지금 머물고 있는 곳이 고향이고 내 마음에 간직한 장소가 집이며 고향이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다음달 11월 어떤 뉴스레터가 도착할지 설렙니다. ⇒ 소중한 통찰 나눠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뉴스레터가 독자님 마음을 다시 설레게 하길! 

독자님의 답장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어요. 뜻밖의 선물처럼 여기며 소중하게 읽겠습니다. 📮 다음 《오브》는 책 출간 이벤트 소식과 함께 11월 11일에 발행됩니다. 
  • 발행 : 출판사 옐로브릭
  • 에디터 : 오수경·임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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