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예술이 한 자리에 고여 있지 않길 바랍니다. 그래서 무엇보다 늘 ‘재미’있기를 바랍니다.
✧ YOUR-BIT LETTER ✧
유월빛레터 #11 빠르다 빨라, 현대(예술)사회
11월입니다. 슬슬 내년 목표를 세워보는 분들도 계실 테고, 연말 파티를 계획하는 분들도 계실 테고, 연말 분위기를 전혀 못 느끼는 분들도 계실 테죠. 저는 한 살 한 살 나이를 먹어갈수록 연말에 대한 감흥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많이 춥다…… 정도?😅 구독자 여러분은 어떤 연말을 맞이하고 계신가요?
.•* 1. 편집자 S - 빠르다 빨라, 현대(예술)사회
.•* 2. 이번 주 한 줄 - 나는 사랑이라고 불러
.•* 빠르다 빨라, 현대(예술)사회 *•.
편집자 S

지금은 주로 문학서를 편집하고 있지만, 2년 전만 해도 저는 예술서 편집자였습니다. 특히 미술사, 미술 비평, 현대 미술을 좋아해서 5년쯤 전부터 관련 책들을 닥치는 대로 읽기도 했었어요. 사실 제 유전자에는 미술이 한 톨도 없는데 말이지요(졸라맨밖에 못 그립니다)…… 그런데 미술 책 읽는 건 참 재밌습니다. 내용뿐 아니라 책의 만듦새도요. 감각적이고 실험적인 디자인, 도판/캡션/본문/주석 등 페이지의 요소들을 배치하는 방식 등이 일반 책보다 더 다채롭고 흥미롭거든요. 좀처럼 흥분하지 않는 저 같은 대문자 T 인간을 단숨에 홀려버린 미술. 그래서 예술서를 전문적으로 펴내는 출판사에서 편집 일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예술서에 입문하고 싶은 분들에게 『현대미술 강의』, 『발칙한 현대미술사』를 추천합니다. 현대미술 이야기라 고전미술 이야기보다는 좀 더 생생하고 다이내믹해서 흥미를 붙이실 수 있을 거예요. 아주 좋은 책들입니다.

지금 돌이켜 보면, 전 양가적인 마음으로 미술을 좋아했던 것 같습니다. 하나는, 미술이 언어가 다 못 하는 일을 할 수 있다는 해방감 때문입니다. 언어는 한정된 공간에서 한정된 분량으로 쓰이고 말해집니다. 사용하는 언어가 다르면 번역을 거쳐야만 하고, 그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누락과 과잉이 생기고 맙니다.

하지만 그림은 다릅니다. 그 앞에 서서 그저 바라만 보는 것으로도 우리는 (화가의 의도대로든 아니든) 무언가를 분명히 감각할 수 있습니다. 색깔과 크기와 화법, 보는 위치와 공간 구조 등 수많은 변수에 따라 그 감각은 매번 바뀌기도 합니다. 게다가 책은 최소 몇 시간 동안 한 권을 다 읽어야 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반면 그림은 그보다 짧은 시간 동안 감상하고도 이야기를 나눌 수 있죠(바쁜 현대사회에서 무시하기 어려운 효율성입니다).


하지만 또 다른 이유는, 역설적이게도, 미술 역시 또 하나의 언어라는 점 때문입니다. 미술사는 수많은 언어들로 구축되고 변화해 왔습니다. 사조가 변화하고 그에 따라 미술계의 정치 역학이 바뀔 때에도 작가와 비평가의 언어는 아주 중요한 선언의 역할을 했지요. 한 예로, “잭슨 폴록은 뛰어난 화가였지만 그린버그의 비평이 없었다면 지금과 같은 ‘미국 현대미술의 상징’이 되지는 못했을 것이다”라는 평가도 있습니다. 그만큼 미술계에서 언어는 주요한 역할을 하고 있죠. 게다가 현대의 개념미술로 오면, 이제는 시각적으로 느끼는 원초적 아름다움을 넘어 작품을 ‘읽고’ ‘사유하는’ 아름다움까지 미술의 영역이 됩니다.


잭슨 폴록의 〈One: Number 31〉, 1950

어쨌든 저는 미술사 책을 읽으며 (다소 과장을 보태서) 삼국지를 읽을 때처럼 급변하고 반항하고 지배하고 뒤엉키는 다이내믹을 맛보았습니다. 그리고 운동과 사조가 창발하고 쇠퇴하는 주기가 문학계에서보다 더 빠르다고 생각하게 되었지요.


몇 가지 간단한 예를 들어볼까 합니다.

모네로 대표되는 인상주의는 1870년대에 정착했는데, 불과 10~20년 이후에 고흐를 위시한 후기 인상주의가 등장했고, 또 불과 15년쯤 후에 피카소의 입체주의가 시작됐습니다. 그러니까 인상주의와는 완전히 다른 공간 인식(입체적 시각, 다중시점)이 빨리 등장했던 거죠. 한편, 입체주의 이후로 약 3년 만에 칸딘스키나 몬드리안의 추상미술로 미술의 패러다임이 다시 변화했는데요. 회화가 대상을 ‘완전히’ 버리기까지 불과 몇 년 걸리지 않았던 겁니다.

또 1940~50년대 미국 미술의 중심이었던 모더니즘(엄격한 순수 회화) 이후로 불과 10년 정도 후에는 그 ‘순수성’을 비틀며 대중 이미지와 상업 문화를 도입한 팝아트가 확립되었습니다.


문학계의 변화는 이보다 더 느린 것 같습니다(라고 문학 연구자도 아닌 제가 말해봅니다). 왜 그럴까요? 우선 생각해볼 점은 집필과 출간의 주기가 상대적으로 매우 길다는 점일 거예요. 집필에 n년 편집에 n년, 유통에 n개월이 소요됩니다. 또한 제도적 권위도 무시할 수 없는 요소일 겁니다. 아무래도 문학계는 출판사, 문예지, 문학상, 비평가 집단으로 이루어진 제도적 권위가 여전히 단단하게 자리하고 있는데요. 이런 제도는 아마추어 예술 작품을 스크린하고 선별하기에 보수적인 특성을 띨 수밖에 없습니다. 정식 출간되지 않으면 시장으로부터 선택받기 쉽지도 않겠죠.

하지만 미술계는 20세기 중반 이후로는 제도 자체가 ‘전복의 장’이 되어버린 듯합니다. 뒤샹의 ‘변기 해프닝’은 예술 제도가 스스로를 조롱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었고, 이후로 다양한 현대 미술가들의 제도를 공격하고 풍자하는 작품이 아이러니하게도 새로운 미술의 권위가 되기도 했어요. 즉 미술계의 권위가 파괴를 허용하는 권위라면, 문학계의 권위는 질서를 유지하는 권위처럼 보입니다.

(물론 문학계나 미술계나, 여전히 끔찍하게 위계적이긴 마찬가지입니다. 최근 문학계에선 한 문예창작과 교수가 위계에 의한 그루밍 범죄를 저질렀다는 의혹이 공론화되었고, 미술계에선 한 예술대학 교수가 학생 및 강사에게 자기 작품을 고액에 강매했다는 뉴스도 있었지요.)


어떤 예술 분야에서든 변화는 불가피하겠죠. 새로운 세대, 새로운 유행, 새로운 문제의식, 새로운 기술. 그럼에도 항상 주류와 비주류가 나뉠 것이고, 전복과 도발이 있을 겁니다. 미술이든 문학이든, 저는 예술이 한 자리에 고여 있지 않길 바랍니다. 그래서 무엇보다 늘 ‘재미’있기를 바랍니다. 창작하는 데 가장 중요한 동력이 ‘재미’라고 말한다면 깊이 없는 사람으로 취급받을지 모르지만, 전 여전히 재미의 가치를 믿습니다. 페이지 훌훌 넘어가는 즉각적 재미, 기존의 개념이 충돌하고 세계관이 확장될 때의 지적 재미, 형식적 실험 자체에서 느낄 수 있는 미학적 재미…… 무엇보다 누구도 누구를 억압하지 않고, 누구도 누구를 배제하지 않을 때 이 온갖 재미들이 꽃피울 수 있을 겁니다.


제가 좋아하는 브라질 화가 타르실라 두 아마랄의 작품을 함께 감상하며 레터를 마무리하고 싶습니다. 제목은 〈아바포루(Abaporú)〉, 브라질 원주민 언어로 ‘사람을 먹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나이와 성별과 인종이 모호한 알몸의 인물이 앉아 있습니다. 타르실라는 토착민의 식인 풍습을 비롯해 현대 브라질을 둘러싼 다양한 문화적 변용을 아바포루에 빗대어 브라질 모더니즘에 새 장을 열었죠. 서구 중심 미학을 ‘먹어 치우고’, 자기만의 방식으로 소화하여 재창조하는 식인의 미학. 재미있지 않나요?

.•* 이번 주 한 줄 *•.


“고양아. 너는 멸시하기를 좋아하지만 그래도 내가 사랑하고 나를 사랑해 주는 친구지. 딴 데 쳐다보지 마! 너의 독특한 수줍음이 감추고 싶어 하는 것, 너는 그걸 약한 모습이라 부르지만 나는 사랑이라고 불러.”



『토비와 키키』, 시도니 가브리엘 콜레트 지음, 박라희 그림, 이세진 옮김, 빛소굴, 2024

― 이미지: <Kittens playing in a baskets>(1860, Henriëtte Ronner-Kni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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