쉼표 찍기🐌  by 버드🕊️

아침과 저녁으로 쌀쌀해진 공기와 다르게 대낮엔 여름같이 더운 날들이 계속된다. 가을옷을 주섬주섬 껴입고 나갔다가 내리쬐는 햇볕으로 데워진 공기에 쩔쩔매고, 그렇다고 가볍게 입고 나갔다가는 지는 해와 함께 뚝 떨어지는 기온에 코를 훌쩍거리며 집으로 돌아온다. 이렇게 여름 날씨를 자꾸만 기웃거리는 가을이 괜히 신경 쓰이는 건, 이러다 하루아침에 저 멀리 겨울로 달아날 것만 같아서이다. 매일매일, 그 어느 때보다 일기예보를 열심히 챙겨 본다.

머물러 있는 것만 같은 계절도 우리가 실감하지 못하는 새에 저만치 가버리곤 한다. 이렇게 자비 없이 앞으로만 흘러가는 시간 앞에서 우리는 불안해지기 시작한다. 벌써 9월마저 다 가버렸는데, 여태 나는 무얼 했나. 그런 불안감에 이젠 어딜 향하는지도 모른 채 계속 발걸음을 재촉하는지도 모른다. 흘러가는 다른 것들과의 속도를 맞추기 위해 무작정 앞으로, 앞으로.

뒤를 돌아보면 뒤처질 것만 같고, 세상에서 도태되고 버려질 것만 같을 때, 마음은 조급해지고 혼란스러워진다. 익숙한 것들에 기댄 채 영혼 없이 터덜터덜 걷다 보면 길을 잃는다. 이럴 때 필요한 건 힘겹게 내딛는 영혼 없는 발걸음 보다는 잠깐의 쉼일지도 모른다. 숨을 돌리고, 주변을 돌아보고, 걸어온 길과 걸어갈 길을 다시 한번 환기하는 시간.

말이 쉽지, 쉰다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주위의 모든 것들이 빠르게 흘러가는 세상 속에서, 떠밀려가지 않고 나를 붙잡고 멈추어 있는 것은 오히려 에너지가 드는 일이다. 나를 붙잡고, 나에게 집중하고, 자신을 회복할 수 있는 여유와 시간을 나에게 주는 것은 근력과 집중력을 요한다.

요즘은 그런 쉼을 용감하게 택할 수 있는 사람이 멋있어 보인다. 잠깐의 멈춤을 통해 관성처럼 해 왔던 일을 다시 한 번 돌아보고, 자신에게 맞는 길을 현명하게 선택하는 사람들이 멋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저의 절주도 (나로선 다소 아쉬운 일이긴 했지만) 멋있었다. (다만 잠깐의 쉼이길 바랄 뿐)

9월 말인데 여태 날이 따뜻하다고 해서 겨울이 오지 않을까 걱정하는 사람은 없다. 언젠가 훌쩍 큰 발걸음을 뗄 거라는 걸, 어쨌든 부지런히 겨울에 당도할 것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우리 자신에 대해서도 그런 믿음을 가지면 좋을 것 같다. 계절의 발걸음을 느끼지 못하듯, 나의 발걸음들도 내가 느끼지 못하는 사이에 많은 발자국들을 남기며 제법 많이 걸어왔을지도 모른다.

잠깐의 쉼과 머뭇거림에 너무 자책하지 않길.

가을도 머뭇거리지 않는가.

최근 친구들과의 만남이 다소 뜸해지면서 자주 듣는 질문이 있다. 요즘 뭐하고 지내? 대학원은 많이 바쁘지? 이렇게 물으면 꼭 농담처럼 이렇게 대답한다. 나? 백수라 그냥 놀아. 수업도 안 들어. 그럼 학교는 왜 다녀? 그래도 논문은 써야지. 얼마 전에 종합시험도 봤다니까! 머쓱하게 웃으면 한 구석에 내가 이렇게 노는게 맞나 싶은 생각이 든다. (이 얘기를 이렇게나 자주 쓸 줄은 몰랐는데.)

막차를 매주 쓰면서 ‘이거라도 쓰는 일’에 익숙해질 즈음, 생활에도 큰 변화가 찾아왔다. 학교를 거의 가지 않게 되었고, 술을 거의 마시지 않게 되었고, 기타 등등... 중간에 쉬어간 주간을 포함하면 스물다섯 주가 지난 지금, 분명히 술을 마시며 취한 채 휘갈기는 그런 에세이를 표방하며 포부 넘치게 시작한 뉴스레터가, 글을 쓸수록 알코올 농도는 현저히 떨어지고 카페인 농도만 짙어진다. 

어쨌든 나는 지금 논다. 엄밀하게 진짜로 ’논다‘고 말하기엔 애매한 구석이 있지만 어쨌든, 쉬엄쉬엄 공부하고 있다는 뜻이다. 평소 잘 못 읽던 책을 도서관에서 빌려 읽기도 하고, 게임도 하고, SNS로 정보의 바다를 탐색하기도 하고, 드디어 미뤄둔 해외여행을 계획하기도 하면서 말이다. 그 가운데 막차를 쓰기도 하고, 다른 글쓰기나 논문 주제를 생각해 보기도 한다. 

쉬엄쉬엄 해! 라는 말을 종종 듣는다. 그러나 미라클 모닝이 유행하고, 학교와 직장을 다니며 운동을 하고, 심지어는 퇴근 후 학원, 자기계발을 하지 않으면 안되는 시대. 나 역시 왜인지 24시간을 알차게 계획하며 보내지 않으면 나의 쓸모가 줄어드는 것 같고, 이걸 할 시간에 다른 선택을 할 걸 후회하기도 하고, 어떤 일에 집중하는 사이 잊혀져가는 다른 무엇인가를 아쉬워한다. 그래서 우리는 쉬엄쉬엄 살아갈 수가 없다. 꾸준과 성실의 결과는 배신하지 않는다거나, 포기는 배추나 셀 때나 쓰는 말이라는, 우리는 지금 이 선택을 증명하고 삶의 항상성을 유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달린다. 

그러나 일정한 루틴을 계획한다고 해서 그게 목표대로 올바르게 실현되리라는 보장은 없다. 한 우물만 파는 일에도 한참을 파다가 뙤약볕에 지치는 날엔 삽을 던지고 다른 가능성을 살펴볼 수 있다. 그러다 찬물을 마시며 다시 그 우물을 팔 수 있는거고. 그렇게 잠깐 멈춰서서 나의 역치와 극한을 가늠해보는 일이 바로 쉼이다. 

쉬엄쉬엄 하라는 말에는 위로가 있다. 모두가 어떤 하나의 일에 힘이 부치는 때, 그 일에서 한발짝 물러나 바라보는 시간이 있었으면 좋겠다. 일에 매몰되지 않고 잠시 세상을 둘러볼 때 나와 같은 이들이 이 작은 세계를 살아가고 있다는 평온한 안도와 자신감이 막차 여러분에게도 찾아오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