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권 제265번째 책편지(2026. 10. 29.(목)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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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걷는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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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몇 주간, 살랑살랑 불어오는 바람이 마음을 간질였다. 기분 좋은 온도가 집에만 있기엔 아깝지 않냐고 속삭이는 듯했다. 거기에 달콤한 연휴와 곱게 물들어가는 단풍까지 유혹하니 옹고집 집순이도 속수무책. 못 이기는 척 집을 나서 서울 구석구석,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녔다. 그야말로 가을의 힘이었다.

얼마 전 다녀온 곳은 서울 중심에 있는 남산. 평일 남산은 한적해서 여유로이 걷기에 제격이었다. 계절을 타고 차분히 물든 숲길을 보니 이곳에 왔던 기억들이 하나둘씩 떠올랐다. 고향 친구들과 둘레길을 걸으며 깔깔 웃었던 순간. 갓 상경해 한껏 달떴던 우리는 시시콜콜한 농담도 세상에서 가장 웃긴 이야기처럼 즐거워했다. 한창 진로를 고민하던 시절에는 괴로운 마음을 달래려 남산에 올랐다. 서울타워 전망대에서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잘해보리라 다짐했었다.

남산에서 내려오는 길, 산 중턱에서 내려다본 서울의 풍경은 액자 속 그림처럼 멈춰 선 듯 보였다. 반면 오랜만의 외출에 무릎이 콕콕 쑤시는 나는 빠르게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살고 있었다.

서울을 벗어나 이전에 가보지 않았던 여러 지역에도 다녀왔다. 함께한 동료들은 나와 달리 그 지방의 토박이거나 이미 다녀온 경험이 있어서 너도나도 추억을 늘어놓았다. 나는 그 이야기를 상상하며 따라 걸었다. 장소는 언제나 그 자리에 있었지만, 그곳을 채우는 풍경과 사람은 바뀌어갔다. 우리는 함박웃음을 머금고, 지나간 시간 위에 새로운 장면을 포개었다.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한가운데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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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문학적인 서울 산책

이순자 지음 | 더퀘스트 |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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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추억 속 장소는 내 생의 기억만을 머금고 있지만, 그 너머에도 시간은 쌓여 있다. 지난날을 엿볼 수 있는 안경은 바로 문학. 시대의 풍경을 눌러 담은 글을 읽으면 상상 속에서 장면이 펼쳐진다.

이 책은 한국을 대표하는 근현대 소설과 수필의 배경이 된 장소를 더듬어, 그곳에 담긴 역사와 이야기를 소개한다. 조선 시대에 수도가 된 한양은 일제강점기를 거쳐 오늘의 서울에 이르기까지 풍파를 겪었다. 전 세계에서 주목하는 화려한 도시의 이면에는 굴곡진 사연과 감정이 담겨 있다. 저자의 안내를 따라 백 년의 시간을 거슬러 걸어가 보자.

내 여정의 거점이었던 서울역(경성역)은 이 책에 나오는 작품 여섯 편 중 다섯 편에 등장한다. <운수 좋은 날>의 김첨지가 인력거를 몰고,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의 구보가 사람들을 관찰하고,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의 시골 소녀는 신세계 같은 서울역을 마주하고 어안이 벙벙해진다. 소설 속 주인공을 따라 걸으며 내 사연을 포개어본다. 처음 서울역에 갔을 때 나는 크고 복잡한 이 도시에서 살아갈 길이 참 막막하고 불안했다. 그로부터 한참이 지난 지금은 여행의 기대로 부푼 외국인들 사이에 섞여 새 이야기를 그려간다.

얼마 전 가을을 만끽했던 남산도 아픈 과거를 지니고 있었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의 식민 지배를 상징하는 조선신궁이 세워져, 학생들이 강제로 신사참배를 해야 했다. 광복 후에도 파란만장한 현대사를 거치고서야 오늘날 누구나 즐겨 찾는 공간이 되었다. 남산 자락에 있는 ‘남산도서관’은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의 주인공이 처음 책을 빌린 명동의 ‘경성부립도서관’이 전신이다. 소녀가 못다 읽은 책을 두고 슬피 걸어갔던 모습을 떠올리며 도서관 앞을 지나가는 학생들을 바라보았다. 다른 시간이 한 장면에서 이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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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고 마시고 여행하라 1

강재호 글 이혜원 그림 | 나무를심는사람들 |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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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운 좋은 날, 인력거를 몰아 큰돈을 번 김첨지는 평소 아내가 먹고 싶어 했던 설렁탕을 사 들고 집으로 향한다. 그러나 그가 마주한 건 싸늘하게 식어버린 아내. 김첨지는 죽은 이의 얼굴을 붙잡고 흐느낀다. “설렁탕을 사다 놓았는데 왜 먹지를 못하니……” 오랜 시간이 흘러도 회자되는 이 문장은 소설 <운수 좋은 날>의 마지막 대목이다.

김첨지가 끝내 먹이지 못한 이 설렁탕은 조선 시대에 유래되었다고 알려진 서울의 전통 음식으로, <운수 좋은 날>의 배경인 1920년대 일제강점기에 널리 퍼졌다. 일제가 소를 식량이자 공업 원료로 인식해 도축을 체계화했고, 일본으로 반출하거나 군수 물자로 쓴 뒤 남은 부속 부위는 조선인들에게 돌아왔다. 싼값에 든든히 한 끼를 해결할 수 있어 노동자의 애환을 달래주던 설렁탕. 소설 속 음식에는 이런 사연이 담겨 있다.

여행에서 빠질 수 없는 지역 음식이 지금의 모습을 갖게 된 데에는 저마다 사회, 지역, 문화적 이유가 있다. 개항과 산업화를 거쳐 정착한 인천 짜장면, 함경도 실향민의 애달픈 삶이 담긴 속초 아바이순대, 다양한 식재료가 모이기 쉬운 지역 특색 덕에 탄생한 전주비빔밥 등이 대표적이다. 음식은 단순한 먹거리가 아니라 시간과 삶이 담긴 기록물인 셈이다. 이 책은 우리에게 익숙한 음식이라는 소재로 우리 땅과 사회의 모습, 그리고 그 안에 녹아 있는 생활을 소개한다.

며칠 전 물회로 유명한 포항에 다녀왔다. 맛깔난 물회를 한 접시 비우고, 한 할머니에게 그 비결을 들었다. 어부에게 시집와 반세기 동안 바닷가에서 산 할머니는 일찍 남편을 여의고, 생계를 위해 생선 장사를 시작했다고 한다. 고된 일을 마치고 돌아와 허기진 자식들을 위해 회를 고추장에 쓱쓱 무쳐서 밥상을 차렸다고. 그 동네를 지키고 있는 어르신들의 손맛이 비슷한 것도 어려운 시절 서로 돕고 나눠 먹었던 게 이유라고 했다.

바닷길을 걸으며 할머니의 인생을 곱씹었다. 저 멀리 바다를 수놓은 배를 바라보자, 어선을 기다렸을 할머니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음식과 사람, 시간과 마음이 교차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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