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비평 뉴스레터 에포케 레테(epoché rete)
  2023. 5. 13.
미술비평 뉴스레터 에포케 레테(epoché rete) 
[여섯 번째 뉴스레터] 강박의 형태

어떤 판단을 내려야 하는가, 판단은 어떻게 사고를 가로지르는가?
근거는 기대보다 얄팍하고, 확신은 쉽게 흔들린다. 사고思考를 방해하는 수많은 요인이 지척에 깔려 있어 우리는 쉬이 길을 보지 못하고 쫓기듯 생각에 마침표를 찍어버린다. 하루가 다르게 쏟아지는 새로운 뉴스는 그 마침표를 더 빨리, 더 쉽게 찍으라고 말하는 듯 하다. 그렇게 내려지는 판단은 얼마나 믿을 수 있는 것일까?

‘에포케 레테’는 ’정지, 중지, 보류‘를 의미하는 epoché와 신경망을 의미하는 rete를 결합한 명칭이다. 이 공간에서 우리는 관습적으로 당연하게 여겨오던 것들을 모두 괄호 속에 집어넣고, 느슨히 이어진 연결망을 통해 대화를 지속하고자 한다. 시시각각 나를 침투하는 속단의 유혹을 접어두고 우리, 잠시 생각하자. 그 생각의 끝에 떠오를 판단은 온전히 나의 몫이겠으나 그 무게는 우리 모두의 책임이 될 수 있도록.

에포케 레테의 여섯 번째 레터는 일본의 예술가에 대한 글이다. 
「좀비(Jombie) 미학, 괴리감 속 꿈틀거리는 사유」는 2023년 한국에서 열린 무라카미 다카시의 회고전 《무라카미 좀비》에서 새롭게 선보인 '좀비 미학'을 통해 작가의 전환된 예술적 형태에 관해 논하고자 한다. 
「삶의 흔적, 원의 형태」는 비슷한 시기 태어나 서로 다른 원의 형태를 구상한 두 작가의 '점과 원'이라는 강박증적인 예술 행보를 통해 작품 세계와 현대사회를 탐구한다.

[좀비(Jombie) 미학, 괴리감 속 꿈틀거리는 사유]
[② 삶의 흔적, 원의 형태]
좀비(Jombie) 미학, 괴리감 속 꿈틀거리는 사유

박초림 

  생존을 위협하는 타자로서만 치부되어 왔던 ‘좀비(Jombie)’.  SARS나 신종플루에 이어 Covid-19 바이러스까지 인간은 늘 감염병에 대한 공포에 잠식되어왔다. 병의 공포와 혐오는 늘 원인 모를 탄생의 배경을 가진 초자연적 존재로서의 좀비와 연결되어왔고 인간과 분리해 생각되어 왔다. 하지만 무라카미의 해석은 다른 듯 하다. 그에게 ‘좀비’는 전세계적으로 지속되는 ‘재난 상황’ 가운데서도 삶을 열망하는 인류의 마음이 만들어낸 현실이다.
(도 1) <오백나한도>, 캔버스에 아크릴, 302×10,000cm, 2012, 사진 출처: 서울 아트 가이드

1.

   본인이 창안한 ‘슈퍼플랫 미학’ 위에 한껏 펼쳐낸 ‘카와이’함으로 대중을 사로잡았던 일본 네오 팝의 거장 무라카미 다카시가 2023년 부산시립미술관에서 열린 《무라카미좀비(1.26~4.16)전에서 색다른 시도로써 ‘좀비 미학’을 선보였다.1) 조금 더 이른 시기에 일어났던 무라카미의 예술적 터닝 포인트는 2011년, ‘3.11 동일본대지진’이 일어났을 때였다. 비극적인 재난 상황 속 국민정서에 귀 기울인 그가 <오백나한도>(2012),<붉은 요괴, 푸른 요괴와 48나한>(2013), <메메메의 해파리>(2013)와 같은 타인의 고통에 위무(慰撫)하는 맥락 속에서 작품을 제작하기 시작한 것이다(도 1). 무력하게 대지진을 경험한 후 무라카미 특유의 카와이하면서 어딘가 모를 오싹함을 남기는 플랫한 이미지가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는 평가는 자의적으로도, 타의적으로도 자명하다.2) 그 이후 ‘좀비’라는 키워드로 10여년 만에 새로운 미학의 패러다임을 주창한 무라카미의 작품은 어떤 시사점을 남겼을까. 

2.

   사실 무라카미는 자본의 헤게모니에서 탄생한 기업가 정신의 예술가라 해도 무방하다.3) 그러니 어쩌면 다니엘 해리스(Daniel Harris, 1957-)의 말처럼 유약함과 동정심을 자극하는 귀여움으로 상대방의 마음을 훔쳐내는 것으로 성공한 예술가가 된 것은 아닐까에 관하여 의심해보아야 할 것이다.4) 우리 모두가 그의 시그니처 캐릭터-도브(DOB)-의 이름은 정확히 알지 못해도 2003년, 루이비통과 콜라보한 다카시백(bag)은 기억하지 않은가. 하지만 패전이라는 역사적 거름(肥料)에서 자라난 귀엽고 유치하면서 순수하고 미성숙한 존재로 국제적 맥락을 획득한 무라카미 다카시도 결국 마냥 아이로만 남을 수는 없었던 것일까?


   재난 앞에 한낱 무력하고 처참할 수밖에 없는 인간이라는 것을 일깨워준 동일본대지진과 팬데믹은 그에게도 어른이 될 기회를 준 것일지도 모른다. 이것이 <무라카미좀비>전의 네 가지 섹션, ‘귀여움, 기괴함, 덧없음, 원상’ 중에서 특히 주목해야 할 공간이 ‘덧없음’인 이유이다. 이 섹션에 설치된 3.11 동일본대지진의 영감으로 시작한 <오백나한도>부터 가장 최근 작품인 <무라카미 좀비와 폼 좀비>(2022)까지의 작품에는 이면에 무엇도 없을 것 같았던 기존 작품의 플랫한 특성을 넘어 ‘서사(내러티브)’가 부여되었다(도 2).

(도 2) <무라카미 좀비와 폼 좀비>, 레진, 실리콘, 나무, 금속, 고무, 합성털, 직물, 유리, 211×200.5×120cm, 2022, 사진 출처: 서울시립미술관
3.

   <오백나한도>의 병과 고민을 해결해주는-불교의-500신은 사람들에게 절실하고 긴요한 스토리(Fiction)가 되어주었다. 하지만 불가항력이란 소설 같은 환상마저도 손쓸 수 없게 다가오는 것이다. 결국 2019년부터 시작된 팬데믹은 무라카미를 또 다른 프레이즈(phrase)로 이동하게 만들었다. 끝나지 않는 바이러스로 모든 것이 정처 없이 부유하던 시기에 무라카미가 발견한 것은 ‘가상세계 속 리얼리티’라는, 즉 ‘창조되고 있는 현실’이었다. 실상 코로나 바이러스는 종교라는 제의적 기능에 기대 살아가보고자 했던 많은 사람들의 희망마저 헛되이 만들었고 믿고 싶었던 픽션도 통하지 않게 된 현실에 사람들은 죽지 않고자 새로운 돌파구를 찾아야 했다. 더 이상 픽션을 그저 소비하는 것이 아닌 ‘가상 세계의 현실’과 ‘실제의 현실’, 이 둘을 교차하면서 위로를 받고 있는 대중을 경험한 무라카미는 카와이 캐릭터마저도 내려놓고 실재하는 자신을 그로테스크한 좀비로 표현한다.


   이제는 진정으로 모든 생명의 ‘생존 본능’ 즉, ‘삶의 끈을 놓을 수 없는 의지’에 관해 그의 관심이 정착한 듯 보인다. 사회∙문화적으로 새롭게 도입된 라이프 스타일(언택트 시대)에 예술가가 관심을 가지는 것이 놀라운 일은 아니지만 이것을 예술적 실천으로 옮겨가는 차원에서는 말이 달라진다. 입체든, 평면이든 -<오백나한도>와 <메메메의 해파리>가 나왔던 2010년대 까지도-늘 고수해왔던 귀엽고 플랫한 내러티브에서 <무라카미 좀비와 폼 좀비>에서 보여준 끔찍한-애환이 서린 주인공으로서-사실적 재현으로의 이행은 형식상으로 더욱 심화되고 예술가로서의 진지한 태도가 가미되었음을 보여준다. 무라카미의 사유할 힘을 잠식시켰던 플랫한 평면은 이제 벽을 뚫고 나와 예술을 통해 대중과 유의미한 소통을 시도한다.

4.

   카와이함에서 그로테스크로 전환한 전략과 개념, 이를 관통하는 작품 <무라카미 좀비와 폼 좀비>는 관객들에게도 감상의 변화를 심어주었다. 선후관계를 따지자면 사실 생존에 대한 강박을 피부로 느낀 관객들이 좀비를 더이상 자극적인 컨텐츠의 일종이라고만 볼 수 없게 된 것이기도 하다. 동심의 홍수 속에서 ‘귀여움’을 만끽하고, 성적욕망을 긍정하다 못해 찬양하는 ‘기괴함’ 속에서 부지런히 사진의 셔터를 눌렀다면, ‘덧없음’의 섹션에서는 조금 더 차분한 호흡으로 깊게 음미할 수 있다. 다만 20년이 넘도록 작가생활을 이어왔고, 중견작가이자 스타작가인 그를 가장 최근 작 하나로 ‘달라진 태도와 행보’라 평가내리고 단정지을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작가의 작업스타일로 따지면 이미 글로벌 아이콘으로서 안정적인 ‘슈퍼플랫한 카와이함’과 대치되는 ‘실재하는 혐오’를 택한 것에 그의 의도를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무라카미가 재현한 ‘가상 속 현실인 좀비’는 죽은 시체보다 육체만이 살아 날뛰는 좀비가 오히려 인류의 삶에 대한 절박한 의지, 생존에 대한 강박을 일깨워줄 수 있음을 내포한다. 미술사조의 논리 안에서라면 하이퍼리얼리즘(Hyperrealism) 속 진정한 리얼리즘(Realism)이 실현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실재하는’ 무엇을 극도로 사실적이게 표현하였을 때, 우리는 어떠한 이질감에 속았다는 느낌을 받는다. 반면 ‘허상’에 가까운 무엇을 극도로 사실적이게 표현하였을 때에도 과연 같을까? 어차피 허상임을 인지하면서도 통렬한 공감이 일어나게 되면, 공포와 혐오는 끊어낼 수 없다. 그 괴리감 속 꿈틀거리는 사유가 발생하면 우리는 무라카미가 던진 어떠한 메세지를 발견하게 된다.

1) ‘수퍼플랫(Superflat:スーパーフラット)'이라는 용어는 무라카미가 2000년 도쿄에서 열린 <수퍼플랫> 전과 더불어 자신의 '수퍼플랫' 이론을 담은 저서 『수퍼플랫』을 출판하고 '수퍼플랫 선언'을 발표하면서 처음 사용한 말이다.
2) 무라카미는 2011년 동일본 대지진 이후 종교와 철학으로 회귀하고 ‘인간의 무력함과 예술의 가능성’과 같은 진중한 테마로 전환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동양의 고전적 주제 인 사신도의 구성을 취한 <오백나한도>는 에도 후기 화가들의 표현에서 다방면으로 취합 한 도상을 변형을 걸쳐 도입함으로써 ‘오타쿠 시대’가 종언되었음을 알리며 작가를 전통미술의 현대적 체현자로도 자리매김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캐릭터화된 대상 묘사가 화면에 잔존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무라카미에게 오타쿠 문화는 여전히 주요한 제작 동인이었다. 최재혁, 「3.11 이후, 무라카미 다카시의 변화하는 슈퍼플랫」. 『일본문화연구』 67 (2018): 345.
3) 무라카미 다카시가 직접 쓴, ‘예술을 업으로 일으키는 이론인 『예술기업론』은 그의 신념과 노선에 대해 분명하게 밝힌다. 그의 저서에 의하면, 예술은 상상력을 가지고 벌이는 장사며, 예술가의 목적은 ‘작품의 현금화’에 있다. 작품의 현금화를 확고하게 하기 위해서는 ‘세계적인 전략'이 요구되는데, 예술의 고객을 ‘부귀영화의 정점에 있는 대부호’로 한정하는 것이 그 전략들 가운데 하나다. 심상용, 『돈과 헤게모니의 화수분 앤디워홀』, (서울: 옐로우헌팅독, 2018), 200.
4) “귀여움이란 상식적 기준에서는 결코 미적이라 할 수 없으며 물리적으로 매력적인 특성이라 하기도 어렵다. 사실 귀여움이란 그로테스크한, 기형적인 것에 더 가깝다···그로테스크한 것은 동정심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에 귀엽다. 동정심이란 상대를 유혹하고 그 마음을 조작하는 미학의 가장 핵심이 되는 감정이다” Daniel Harris, Cute, Quaint, Hungry, and Romantic: The Aesthetic of Consumerism (New York, 2000), 3.

삶의 흔적, 원의 형태

김민주
   올해 영국에서 일본 미술에서 파생된 두 가지의 원의 형태를 발견했다. 우선 첫 번째로 마주한 형태는 루이비통 X 쿠사마 야요이의 콜라보레이션인 점으로 뒤덮인 공항 면세점을 시작으로 헤롯 백화점을 뒤덮은 쿠사마 야요이(Kusama Yayoi. 1929~)의 점이었다. 그리고 또 다른 형태는 화이트 채플 미술관에서 마주한 끊임없이 모래사장 위에서 원을 그리고 있는 다나카 아츠코(Tanaka Atsuko, 1932~2005)의 거대한 원이다.1) 쿠사마 야요이의 작품은 일반적으로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작가의 작품이 그러하듯 일상생활에서도 다양한 형태로 마주할 수 있다. 그러나 화이트 채플 갤러리에서 마주한 흔히 볼 수 없는 다나카 아츠코의 작품 <Round on Sand>(1968)는 새로운 해석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이번에서는 비슷한 시기에 태어나 서로 다른 작품 행보를 보인 두 작가의 경험과 작품 세계를 점과 원이라는 형상을 통해 살펴볼 것이다.  
  점은 가장 기본적인 형태이며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점은 개념적으로 비물질적인 본질이며 물질적 측면에서 (zero, null)이다.

모든 것이 사라진 원점이기에 모든 것의 시작과도 같다.”         

– Wasily Kandinsky 2)

 (도 1) 쿠사마 야요이, Kusama: Infinity. Directed by Heather Lenz, 2018.

1. 쿠사마 야요이의 점(Dot)과 물방울

   어린 시절 가정 환경에 대한 트라우마로 강박적 충동과 환각 상태에서 기인한 그녀의 점은 무한히 확장하며 쿠사마 야요이의 시각에서 자신을 포함한 온 세상을 뒤덮었다(도 1). 끊임없이 확장되는 물방울을 그려 나가는 쿠사마 야요이에게 점과 물방울의 존재는 자기 소멸, 공포와 불안함을 예술로 승화시켜 강박신경증이라는 트라우마의 흔적을 소멸시키고 무한한 자유를 향한 행위였다. 쿠사마 야요이가 가진 가정환경과 더불어 음식에 대한 강박, 성(性)과 산업사회의 부작용에 대한 공포에 대해 그녀는 이를 회피하지 않고 조각과 여러 오브제들을 시각화하여 직접적인 표현을 통해 치유한다. 그녀의 작품에는 문명과 산업이 발달하는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마냥 행복한 삶을 영위하고자 하는 바람과는 달리 숨겨진 개인의 트라우마와 파괴된 인간의 존엄성을 비롯한 현대사회에서 비롯된 통증의 흔적이 나타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점, 그물망, 그리고 물방울을 계속해서 그려 나가는 모습은 일상생활에서 우리의 모습을 비추는 기능을 제시한다. 현대 사회의 부조리한 현실 속 우리는 또 다른 희망을 품고 내면의 아픔을 치유하고자 다양한 방법을 동원해 실천하는 것처럼 말이다. 우리는 이러한 행위와 마찬가지로 각자 다른 형태의 점을 찍고 있는 것은 아닐까. 누군가에게는 환 공포증을 연상시킨다는 쿠사마 야요이 점의 병리적인 반복은 자신의 트라우마를 승화의 과정을 통해 치유하고자 하는 용기의 실천과도 같다.


   병리적으로 반복적인 점을 통해 무한으로 확장하며 화면 전체 조화를 이루는 쿠사마의 회화에서 우리는 칸딘스키가 언급한 내적인 동요를 일으키고 리듬을 만들어가는 ‘반복’이라는 요소를 찾을 수 있다. 단순하면서도 불연속적인 쿠사마 야요이의 조형 원리는 마치 세포가 자가 분열하듯 무한한 영역의 확장을 연상시키며 동화적인 상상력을 이끌어내기도 한다. 또한 복잡한 점들의 조형 원리는 또 다른 운율감과 역동성을 나타낸다.


   쿠사마 야요이는 이러한 강렬한 색감과 불규칙적으로 무한히 뻗어 나가는 점들 가운데 자신은 하나의 점에 속한다고 언급했다. 쿠사마 야요이가 그린 수많은 점들 가운데 놓인 하나의 점은 마치 그녀가 과거의 기억들에 맞서 홀로 싸워 나가는 모습 혹은 1958년 뉴욕으로 이주하여 마주한 추상표현주의, 색면추상, 미니멀리즘, 그리고 팝아트와 같은 미술 사조가 성행하기 시작한 미국에서 반복적인 점을 통한 자신만의 예술적 입지를 굳혀나가는 그녀의 모습을 확대하여 구체화시킨다.

(도 2) 다나카 아츠코, <84B>, 194.4 x 259.4 cm, 1984. 사진 출처 : 모더나 뮤지트
 (도 3) 다나카 아츠코, <Round on Sand>, 10min, video, 1968. 사진 출처 : Frieze
2. 다나카 아츠코의 원

   구타이 그룹에서 활동하던 시기의 다나카의 작품은 공장에서 산업자재, 염색한 직물, 전기, 전구 등과 같은 일상적인 재료를 사용하여 실험적인 예술을 선보였다. 그러나 1965년 구타이 미술 그룹을 나간 이후에는 기하학적 형태의 원 혹은 점의 형태를 여러 점의 회화 작품에서 살펴볼 수 있다(도 2). 여러 점들의 회화 작품에서는 강렬한 색감과 복잡한 회로의 기하학적인 이미지로 마치 이전 작품인 <전기 드레스 Electric Dress>(1956)와 <벨 Bell>(1955)에서 선보인 설치 작품을 회화로 옮겨 놓은 듯하다. 그리고 회화에서 나타나는 원과 선의 네트워크는 다나카 아츠코의 영상 작업 <Round on Sand>(1968)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난다(도 3).


   영상 속 다나카 아츠코는 파도가 몰아치는 바다 한가운데에서 긴 막대기를 들고 선을 이어 원을 반복해서 그려 나간다. 일시적이고 장소 특정적인 모래 위 그려진 곡선과 원들은 엉켜 있는 복잡한 선상에서 일종의 유기적인 형태를 보이는데, 이 과정에서 다나카는 우주의 모든 것이 연결된 것이라는 추상적인 유사성을 탐구한다.3) 이어진 선과 반복된 원의 형태 간의 연결은 뚜렷하게 알 수 있는 형상은 아니지만, 무의식적으로 이어진 원은 우리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연결되는 무질서한 우주 속 진리를 표현하고 있는 듯하다. 이러한 선과 원의 반복적인 표현은 다나카 아츠코가 구타이 미술 그룹 내에서 활동하던 시기에 선보인 작품들과의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  달리 말하면, 전후 빠르게 변화하는 산업혁명과 냉전 시기에 물질성을 통한 불안정성을 강조하며 삶과 예술의 경계를 통합하고자 한 시도는, 이후 원과 선의 반복적인 회로를 통해 우주의 통합적 원리로 확장된다. <전기 드레스 Electric Dress>(1956)에서의 산업혁명 시대 물질성에 대한 강조와 불규칙적인 전구와 전기 회로의 표상과 <벨 Bell>(1955)에서의 소리를 통해 놓인 무질서한 선은 회화를 넘어 모래 위의 다나카의 무의식적인 선으로 연장되어 나타난 것이다. 회화에서는 알록달록한 전구와 전기회로의 무질서한 나열을 통한 복잡하고 화려한 산업사회의 이미지를 떠올린다면, <Round on Sand>(1968)는 마치 문명화되고 발전된 산업사회 이면의 회색도시와 같은 불안함을 연상시키며, 그 안에서 유기적으로 연결되는 우주 속 인류 보편의 진리를 탐구한다.  

3. 통증의 흔적

   쿠사마 야요이와 다나카 아츠코는 점과 선, 그리고 원이라는 각각의 형태와 이미지를 통해 그들이 겪어 온 삶의 여러 양상을 서로 다른 방식으로 표현하고 있다. 비슷한 시기에 태어나 겪은 서로 다른 현대사회 속 일어나는 부조리한 현상과 개인의 경험을 예술 작품으로 승화하여 자신만의 예술 세계를 구축해 나갔다. 그들이 보이는 점의 형태는 다른 듯하지만 빠르게 변해가는 현실 속 개인의 경험을 승화하는 과정에서 나름의 비슷한 맥락을 선보인다. 덧붙여 1958년 쿠사마 야요이가 뉴욕에 처음 도착하여 자신의 예술적 입지를 다지기 시작할 때 다나카 아츠코는 미국으로 넘어가 구타이 미술 그룹 순회전을 선보였다. 비슷한 시기 서로 다른 위치에서 자신의 예술 활동을 적극적으로 이어온 그들의 작품은 조형적 양식을 넘어 사회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양상을 표현한 작품 내막의 근본적인 원리에 대해 주목해 볼 만하다.


   쿠사마 야요이의 작품은 사회적인 요소와 개인적인 요소가 극명히 존재하고, 다나카 아츠코의 작품은 개인적인 측면보다는 사회적인 측면이 부각되어 나타났다. 같은 점과 원의 형태이지만 쿠사마 야요이는 자신의 점의 확장과 반복을 통해 우주의 탄생과 소멸을 주장했고, 다나카 아츠코는 원의 유기적인 관계 및 형태의 반복을 통해 우주의 추상적인 연결성을 주장했다. 그들의 점과 원은 확장되어 구체화된 당시 일본 현대사회의 현실 속 개인의 경험과 승화 과정을 점과 원의 반복적인 표현을 통해 보여주었다. 이는 과거의 경험에서 비롯된 예술의 영역을 넘어 여전히 지속되어지고 읽혀지는 현대사회의 양상을 나타내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럴지라도 부정적인 모순을 부유하기보다는 꿋꿋이 예술 작업을 이어온 쿠사마 야요이와 다나카 아츠코의 예술적 행보와 의지에 주목하는 것이 유의미하다. 우리 개개인은 어떠한 형태의 잔상을 찍어 나가고 있으며 그러한 잔상 가운데 개인은 어디에 위치해 있는가.

1) 다나카 아츠코는 일본의 간사이 지방의 고베에서 요시하라 지로(Yoshihara Jiro)를 중심으로 결성된 인간의 정신과 물질 사이의 관계를 탐구하는 일본의 대표 아방가르드 미술 그룹인 구타이 미술 협회(Gutai Art Association)의 멤버였다. 요시하라 지로(Yoshihara Jiro)를 중심으로 발달한 일본의 아방가르드 미술 그룹인 구타이 그룹은 전후 빠르게 산업화되어가는 일본의 사회적인 분위기 속 ‘모방이 아닌 새로운 것을 창조’ 하는 것을 모토로 기존의 예술 개념을 타파하는 추상적 회화 형태와 오브제, 그리고 퍼포먼스를 추구했다. Alexandra Munroe, Ming Tiampo, Yoshihara Jiro, and Hirai Shoichi, Gutai splendid playground (New York, Guggenheim Museum press, 2013), 18-19.
2) Wasily Kandinsky, 『점‧선‧면 : 회화적인 요소의 분석을 위하여』, 차봉희 역 (파주 : 열화당, 2011), 28.
3) Holland Cotter, “With Bells and Flashes, Work of a Japanese Pioneer,” The NewYork Times, October 2014,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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