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풀칠러 여러분. 금주의 에세이 당번 야망백수입니다. 오늘의 화두는 루틴이에요.

백수인 저는 무한대의 자유를 갖고 있지만 무한대의 자유 속에서 행복하고 건강한 일상을 지켜내는 건 생각만큼 쉽지 않더라구요. 그래서 루틴을 만들어야지~만들어야지~하다가 루틴을 만드는 게 루틴이 되어버린 삶을 살고 있어요. 어쩔 땐 ‘차라리 루틴이라는 말을 만나지 말았으면 좋았을 걸!’하는 생각까지 든다니까요. 하하.

오늘 이야기엔 저의 이런 루틴강박증을 녹여내봤습니다. 풀칠러 여러분들은 어떤 루틴을 갖고 계신가요? 지금 루틴과...행복하신가요? 

K씨의 루틴적 일상 / 야망백수

마케터 K씨가 요즘 고민하는 화두는 루틴이다. 누구보다 세상 물정에 밝아야하는 마케터라는 직업 특성상 온갖 매체의 콘텐츠를 섭렵하다보니 자연스레 루틴이라는 단어가 자꾸 걸려들었기 때문인데, k씨에겐 이 루틴이라는 말이 과거의 힐링이니 웰빙이니 하는 말들이 누리던 지위를 이어받은 ‘트렌드의 왕’처럼 느껴졌다. 마케터가 트렌드를 이끌진 못할망정 뒤쳐져서야 되겠냐는 생각에 k씨는 루틴을 한번 파 보기로, 아니 ‘디깅’ 해보기로 한다.

그렇게 루틴을 검색, 아니 구글링하던 K씨는 업계에서 알아주는 유명인들은 모두 자기만의 루틴 하나쯤은 갖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들의 루틴적 일상은 우아함과 생산성으로 가득 차 있는 것으로 보였다. K씨는 자기가 간신히 양치 세수를 하는 것이 전부인 출근 전 아침 시간에 유명인들은 차도 끓여 마시고 달리기도 하고 요가도 하고 글도 쓰고 책도 읽는다는 사실에 질투와 흥미를 동시에 느낀다. K씨는 조깅하기 좋은 한강변의 오피스텔에 사는 것도 아니고 힙한 동네의 사무실로 출근하는 것도 아니었지만 그네들의 라이프 스타일을 따라하고 싶었다. 루틴이라는 것만 잘 짜면 불가능한 일도 아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K씨는 새로 선물 받은 다이어리를 꾸밀 때와 같은 열정으로 루틴을 짠다. 6시 반 기상. 7시 까지 차 한 잔 후 요가. 샤워 후 공들여서 물기 닦기(사소해보이지만 중요한 포인트. 온전히 나를 돌아보는 그 마음이 중요하다.). 7시 45분 급행 지하철 탑승. 약 50분간 지하철에서 시집 약간, 받아보는 뉴스레터들 읽기. 하차 후 사무실 1층 카페에서 커피 한잔 후 출근. 루틴을 바라보는 K씨의 눈에선 희망이 넘쳐흘렀다. 이대로 지키기만 한다면 ‘온전히 나를 위하는 더 나은 일상’을 살 수 있으리라는 희망이. 

그러나 그 다음 날은 아침부터 비가 왔다. 이불 속의 K씨는 비가 오는 날의 아침은 평소보다 조금 더 어둡고 습하기에 따뜻한 이불 속을 벗어나는 일이 잔인한 것은 물론이고 불합리하기까지 하다는 생각을 하다가 20분을 더 자서 650분에 일어난다. 이는 10분안에 차도 끓이고 요가도 해야 하는 초인적인 스케쥴로 스스로를 몰아넣었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 사실에 절망한 나머지 그냥 15분을 더 잔 K씨는 75분에 그래도 첫날인데 차는 한잔 끓여마셔봐야지라는 생각으로 커피포트에 물을 끓이며 멍 때리다가, 물이 끓고 나서야 아차 이 시간에 티백을 좀 꺼내놨으면 좋았을 걸이라는 생각을 1초정도 한 다음 뜨거운 물에 티백을 담궈 놓고 샤워를 하러 들어갔다. 샤워를 하는 동안 차를 우리면 일석이조이기 때문이다. 일석이조라는 생각에 기분이 좋아서인지 루틴에서 어긋난 것이 짜증나서인지 아니면 그냥 잠이 안 깨서인지 이날 K씨는 평소보다 7분이나 더 오래 씻어버렸고, 준비를 하면서도 늑장을 부려서 결국 차는 한 모금밖에 마시지 못했다. 지하철역까지 잰걸음으로 서두른 덕분에 겨우겨우 지각을 면한 K씨에게 시와 커피 한 잔은 당연히 없었다.
 
첫 날부터 쓰라린 실패를 맛본 k씨는 루틴적 일상의 어려움을 이렇게 한탄하며 몰래 웹서핑을 했다. 루틴을 검색, 아니 디깅한 것을 알고리즘이 알아챈 덕분에 리추얼 서비스들이 K씨의 모니터에 나타난다. K씨는 리추얼이 뭔지 궁금하다. 루틴이랑 같은 의미군에 속한다는 것쯤은 상세페이지의 어투로(당신의~,~할 거에요.) 파악하긴 했지만 취준생 시절 점수 만드느라 했던 토익공부가 어학실력의 전부인 K씨에게 한국말로 적은 영어단어의 의미를 한 번에 명확히 알아먹기는 쉬운 일이 아니어서 또 다시 검색, 아니 구글링을 해야했다. 리추얼의 뜻은 의례, 의식이었다. K씨는 리추얼의 의미를 보며 비로소 오늘 루틴을 지키지 못한 이유를 깨달았다. 기도하고 향 피우고 하는 그런 경건한 마음으로 루틴을 대하지 않아서 루틴을 지키지 못한 것이다. 다행히 리추얼을 도와주는 서비스가 있었다. 인터뷰에서 자기들의 루틴을 소개하던 업계의 유명인사들은 이 리추얼 서비스의 제사장으로도 일하고 있었다. K씨는 혼자선 루틴대로 살기 어렵지만 남들과 함께라면 좀 더 잘 할 수 있겠다는 생각으로 클릭을 했다가 깜짝 놀란다. 제사장들의 서비스가 꽤 비쌌기 때문이다. 서비스들은 이런 식이었다. 좋아하는 노트에 좋아하는 펜으로 나를 위로하는 글쓰기가 단돈 구만 구천원. K씨에겐 부담스러운 가격이었지만 대부분의 서비스들은 솔드 아웃이었다. 루틴에, 아니 리추얼에 진심인 사람들은 얼마나 많은가. 그리고 구매력이 있는 사람들은 얼마나 많은가. K씨는 자기는 둘 중 어디에도 해당되지 않는다는 생각에 조금 우울해졌다.
 
우울해진 K씨는 퇴근길에 루틴에는 들어있지 않은 게임BJ의 유튜브를 봤다. 뉴스레터를 볼까 하다가 이미 조진 루틴이라는 생각에 자포자기한 심정이었다. 별풍선을 받은 BJ의 리액션이 시원찮으니 채팅창엔 억텐이라고 도배가 된다. 억텐은 억지텐션이라는 뜻인데 시청자들은 다른 건 참아도 이 억지텐션만은 절대로 못 참는다. 억텐이라는 말 사이사이엔 ㄴㄹ이라는 말도 섞여있다. ‘ㄴㄹ은 나락이라는 뜻이다. 억텐은 곧 나락이다. 억지텐션으로는 극락정토는 고사하고 현생에도 발을 붙일 수 없다. 오직 나락만이 있을 뿐이다. 이날 K씨는 잊을만하면 나락으로 도배되는 채팅방이 화면의 우측하단에 있는 영상을 무한으로 즐기다 잠들었다.
 
다음 날 630. 눈이 떠진 K씨는 해야 할 일이 많은 것 같은데 해야 할 일이 많다는 사실만 기억이 나는 요상한 기분을 느낀다. 울렁거리는 마음을 애써 진정시키며 전날의 투두리스트를 편집해서 오늘의 투두리스트를 만들었다. 투두 리스트 중 뭐부터 해야 할지 고민하다가 루틴을 기억해내고 차를 한잔 끓여 마셨다. 고민하는 와중에도 시간은 흘러서 요가는 포기해야만 했지만 차 끓여 마시기 옆의 체크박스에 체크를 하니 기분이 대단히 좋았다. 하루 이틀이 지나면서 세수하기, 양치하기, 물마시기 같은 것들도 K씨의 루틴 투두리스트에 포함되기 시작했다. 물을 마시고 물마시기 옆의 체크박스에 체크를 하면 조금 더 잘 살아보려고 노력하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의식하지 않고도 해오던 것들을 노력해야만 하는 일로 만든 것 같다는 생각이 잠깐 잠깐 들었지만 투두리스트의 체크박스에 체크하는 일의 쾌감이 조금 더 분명했다. 이게 바로 리추얼이구나 싶었다. 다음 날도 K씨는 해야 할 일을 생각하고 해야 할 일을 적고 노력을 기울여서 그 일을 하고 체크박스에 체크를 하며 하루를 보낸다. 그 다음날도 비슷했다. 이 주에 K씨가 루틴에 투자한 시간은 4시간 3227초였으며 새로 깔은 어플은 2, 새로 구독한 뉴스레터는 3, 루틴에서 파생된 소비는 2(요가매트, 핸드드립세트 : 55,480)이었다.

아매오
루틴이니 리추얼이니 하는 거 사실 좀 아니꼽게 봤습니다. 근데 막상 해보니 좋더라고요. 그 성취감은 어쩐지 묘한 쾌감으로 차곡차곡 쌓입니다. 인정하기 싫지만 몸과 마음은 이미 괜찮은 루틴 어디 없나 여기저기 헤매는 상태입니다. 뭐랄까. 올해의 길티 플레저랄까. 다만 ‘루틴은 만드는 게 아니라 찾아내는 것’이라는 원칙을 늘 염두에 둡니다.

예컨대 저는 아침잠이 없는 편이라 출근 전 시간을 여유롭게 쓸 수 있어요. 그러니 굳이 일찍 집을 나서 30분 정도 걷는 거죠. ‘아침 산책 30분’을 위해 억지로 눈을 뜨지는 않는다는 말입니다. 일상, 아니 라이프스타일이 있고 습관, 아니 루틴이 있는 거지, 그 반대가 되어서는 안 되죠. 그러니 꼭 생각해봅시다. 그 루틴, 나한테 필요한가?
파주
저 또한 올해 '루틴'에 꽂혀 한 해를 보냈습니다. 1) 해가 뜨기 전에 일어나서 2) 헬스 유튜버의 구령 소리와 함께 스트레칭을 하고 3) 영양제를 미지근한 물과 함께 삼키는 게 제가 목표한 루틴이었습니다만, 8시간에 겨우 일어나 허버허버 출근 준비를 하는 게 현실 속 저의 일상이었죠. 가냘픈 제 몸뚱이 하나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니 스스로 매일 자책하고 자존감을 낮아지기 마련이었죠.

그런데 말입니다, 한편으로는 7일 중 5일을 비슷한 시간에 일어나 규칙적으로 출근한다는 거야말로 완벽한 루틴이 아닐까요? 물론 먹고살기 위해 하는 짓이라는 건 알지만요. '아침 운동 루틴', '새벽 글쓰기 루틴'처럼 출근에도 '매일 9 to 6 출퇴근 루틴'이라고 거창하게 이름 짓고 의미부여를 해보는 건 어떨까요? 한결 그럴듯해 보이지 않나요?
마감도비
K씨의 사연 잘 읽었습니다. 구구절절 공감을 한 탓에 오히려 개운치 못한 뒷맛이 남네요. 야망백수님의 유려한 필력 덕분에 박태원의 소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같기도 하고 카프카의 소설 ‘성’처럼 읽히기도 하네요. 마침 ‘성’의 주인공도 요제프.K였는데 말이죠. 저는 ‘루틴’이라는 단어를 떠올릴 때마다 요제프.K가 된 기분이 들어요. 해야 할 일이 있다고, 성에 들어오라고 불러서 왔는데 허가 없이는 들어갈 수 없다는 문지기를 마주하는 것처럼요.

저는 루틴이나 투두리스트 만드는 걸 포기했습니다. 만들어도 딱히 소용이 없더라구요. 일은 마감이 닥쳐야 하는 편이고(이름값!) 취미생활도 다소 즉흥적이다보니 결국 내가 루틴에 맞추는 것보다 루틴을 나에게 맞추는 게 더 편해요. -실존이 루틴에 앞선다- 이상 야근을 앞둔 어느 K씨의 전언이었습니다. 

▲ 바쁜 와중에도 눈길을 사로잡았던 (회사 2층 계단 앞에 안착한) 무지개. 
지각의 변
평소 발송 시간인 밤 10시보다 한참 늦었네요. 죄송합니다. 오늘 책임 발송자(파주)가 퇴근 후 기절하듯 쓰러지는 바람에 ㅎㅎ;;; 풀칠러 여러분 멘탈과 건강 잘 챙기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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