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출신의 영국 싱어송라이터 리나 사와야마를 처음 접하게 된 EP 앨범 [RINA]에서 먼저 매료된 곡은 '10-20-40' 였습니다. 둔탁한 베이스 라인과 러프한 기타 리프가 돋보이는 댄서블 비트는 그야말로 취향저격이었고, 어지간한 메이져 댄스곡들의 그것 보다 빛나는 리듬감이 매력적이었기 때문이죠. 너무도 잘 닦인 포장 도로 위를 매끈하게 달리는 '10-20-40'가 어둠 속을 뚫고 가르는 빛이라면, 바로 뒤이어 배치된 트랙 'Tunnel Vision'은 착 가라앉은 무드로 야간 주행에 속력을 더합니다.
아메리칸 컬쳐를 주식으로 먹고 자라난 세대라면 금방 떠올릴 수 있을, 황량한 미국 밤의 국도변, 도로표지판과 네온 사인 빌보드가 드문드문 이어지다 나타나는 하이웨이 주유소 내지는 심야 카페, 맥주캔과 담배, 대충 들고나온 외투가 늘어져 있는 시트. 애정을 확신했던 관계가 흔들리고 있는 심란한 시기, 어느 밤에 계획 없이 나선 야간 드라이브 여정에 저는 이 곡보다 잘 어울리는 곡을 떠올리지 못하겠습니다.
내 인생이 영화라면 미국 B급 장르물이길 바라던 여느 될성부른 시절에 이 곡을 만났다면 더욱 주구장창 성서처럼 품에 끼고 다녔을 곡. 친구들이 전주만 들어도 질린다며 진저리를 치더라도, 마음이 어지러워지곤 하는 밤의 공기에는 흩뿌려야 했을 특정 무드의 심벌. 그러나, 함께 있다면 치가 떨리던 외로움도 싫지만은 않은 밤의 데코레이션. <멀리의 초록> 두 번째 이야기는 혼자만의 비밀로 간직하고 싶었던 짙퍼런 고독의 밤을 굳이 꾸미기에 좋은 곡, 'Tunnel Vision'으로 채워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