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주에는 아주 맛있는 막국수 집이 두 곳 있다. 오두산막국수와 장원막국수다. 오두산 막국수는 헤이리 입구에 있다.
오두산막국수를 처음 찾았을 때를 기억한다. 벌써 10년 전이다. 파주로 이사 오자마자 오두산막국수로 달려가 막국수를 시켜 먹었다. 그때 세 살이었던 딸은 지금은 자라서 초등학생 소녀가 됐다. 커다란 막국수 그릇을 들고 육수를 훌훌 마시던 딸은 이제 불닭비빔면과 짬뽕을 야무지게 먹는다.
장원막국수는 교하 신도시에 있다. 주문을 받아야 메밀 반죽에 들어가기 때문에 나오기까지 약간 시간이 걸린다. 물막국수, 비빔막국수, 들기름막국수가 있는데 다 맛있다. 개인적으로는 들기름막국수를 추천한다. 들기름을 넉넉하게 뿌리고 김가루와 깨소금을 얹어낸다. “고소하고 고소하고 또 고소하다”는 게 먹어 본 이들의 평이다.
막국수를 먹을 때마다 아, 이젠 나이가 점점 들어가는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이런 맛이 점점 좋아지다니 말이다. 문득 뒤돌아보니 여기까지 왔다. 어느새 흰 수염이 많이 늘었다. 눈도 어둑해졌다. 노트북으로 원고 작업을 하다 보니 목과 어깨에 무리가 왔다. 그래서 노트북 거치대와 블루투스 키보드를 사서 작업하는데, 그러다 보니 노트북 모니터가 뒤로 밀려났고 워드의 글씨가 안 보인다. 할 수 없이 폰트를 키웠다. 자려고 누웠는데 팔목이 아픈 날도 있는데 왜 그럴까 곰곰이 생각해 보면 낮에 택배로 온 사과 상자 같은 것을 옮긴 날이다.
막국수뿐만 아니라 나이가 들면서 바뀌는 것이 많다. 메인 음식보다는 콩자반이며 멸치볶음 같은 반찬이 더 좋다. 이것들을 한 젓가락씩 집어 먹으며 막걸리, 소주를 마시다 보면 두루치기나 아귀찜 같은 메인 음식에는 젓가락이 잘 안 가게 된다. 나이가 들면서 점점 기계나 프로그램과는 멀어지게 된다. 얼마 전 줌으로 강연을 해야 해서 앱을 설치하고 테스트를 해보는데 아무리 해도 음성이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초등학교 4학년 딸아이한테 물어보니 무심하게 버튼 하나를 눌러주고 간다. 이게 안 켜져 있잖아.
그래도 다시 젊어지고 싶은 생각은 별로 없다. 누군가 “젊은 시절로 다시 돌아가시겠습니까?” 하고 묻는다면 단호하게 고개를 흔들 것 같다. 고맙습니다만, 사양하겠습니다. 진심이다. 20대, 30대로 다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다. 지금 생각해 보니 그 시절은 너무 힘들었고 우울했고 난폭했다.
나이가 들면서 타인의 잘못을 적당히 용서하고 눈감아 줄 수 있게 됐다. 그건 누군가도 나를 그렇게 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됐기 때문이다. 좋아하는 취향이 확실해져서 남들 눈치를 그다지 보지 않는다. 요즘은 옛날하고 달라서 남들의 옷이나, 음식, 음악, 영화 취향 등을 가지고 왈가왈부하는 사람도 없다. 이건 젊은 시절 이것저것 해보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엉뚱한 곳에 돈을 써봐서 내 취향을 알게 된 것이다. 지금은 싼 거 열 개보다는 좋은 거 하나가 필요한 나이라는 걸 알고 거기에 맞는 것을 고를 수 있는 안목이 생겼다. 그럭저럭 작가로 이름을 쌓아서 유니클로를 입고 에코백을 들고 미팅에 나가도 눈치를 보지 않게 됐다. 감당할 수 있는 일만 하고 감당하기 힘든 일은 슬며시 미루거나 시작을 아예 하지 않는다. 내 인생에 없어도 되는 것들이 무엇인지를 안다.
그래도 아직 새 일을 시작할 만한 열정과 도전 의식은 남아 있다. 가끔 주위에 뭔가 새로운 일을 시작했다는 친구들이 있는데, 다들 신나게 일하고 있다. 그들을 진심으로 응원한다. 질투 같은 건 하지 않는다. 그런 쓸데없는 곳에 에너지를 쓰고 싶지 않다.
막국수 한 그릇을 먹고 사설이 길었다. 그만큼 막국수가 맛있다는 뜻으로 이해해 주시길. 나이 탓인가, 이제는 위가 음식으로 가득 차 있는 것보다는 약간은 비어 있는 느낌이 좋다. 하지만 막국수 앞에서는 적당한 양만 먹어야 속이 편하다는 논리 같은 건 통하지 않는다. 막국수를 먹을 때마다 과식하게 된다. 막국수 집 문을 열고 나서자마자 후회하지만 ‘괜찮아, 막국수는 금방 소화가 돼.’ 하면서 위로한다. 사실은 우울증 진단을 받고 에이 뭐, 막국수나 먹자고 나선 길이다.
“우울증 초기입니다.”
병원 로비에서 수학 문제집 같은 설문지를 30분 동안 작성한 후 찾은 상담실. 의사는 두꺼운 뿔테안경을 밀어 올리며 덤덤하게 말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증상이니까요. 지금 나이면 한 번쯤 찾아옵니다. 1년 정도 치료하면 나아질 겁니다.”
의사는 세로토닌 결핍으로 생긴 우울증이라고 설명했다. 세로토닌은 인체가 분비하는 화학 물질로 신경 전체에 신호를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사람의 정서적 안정을 유지하는 것이 주요한 기능이다. 이것이 부족하면 조급함, 스트레스, 우울증 같은 부정적인 감정을 유발한다.
“허리나 등이 아프지는 않으세요?” 하고 의사가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우울증의 한 증상입니다. 우울증은 정신뿐만 아니라 신체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근육이 부드럽게 움직일 때 근육의 수축을 도와주는 역할을 하거든요.” 의사는 컴퓨터에 처방전을 입력하며 이렇게 덧붙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더 심해지고 심각한 병으로 이어질 수도 있기 때문에 빨리 치료하는 것이 좋습니다.”
“세로토닌 결핍은 왜 생기는 거죠?” 내가 묻자 의사가 대답했다. “비타민이나 미네랄이 부족해서 그런 거예요. 술을 너무 마시는 것, 햇빛 부족도 원인이 됩니다.” 그렇군. 그동안 집안에 틀어박혀 원고만 쓰고 술만 마셔댔던 거지. 밖으로 쏘다니고 맛있는 음식도 먹어대야 하는데 통 그러질 못했어. “고등어, 연어, 참치, 고기, 치킨, 달걀, 치즈, 견과류, 초콜릿 등이 세로토닌의 분비를 촉진하는 음식입니다. 많이 많이 많이 드세요.” 의사는 분명 ‘많이’를 세 번이나 말했다. 다이어트도 원인이었던 거야. 젠장, 오늘부터 많이 많이 많이 먹어주마. 병원 문을 나서며 다짐했다. 따가운 햇빛이 눈을 찔렀다.
막국수 한 그릇을 다 먹고 나니 우울증이 조금은 나아진 것 같다. 그렇지, 세상에는 이렇게 먹을 게 많은데 우울하게 살 필요는 없지. 우리에게 남은 날은 어제보다 하루 줄어들었으니까, 오늘은 어제보다 더 맛있는 음식을 먹어야 하는 거지. ‘아니,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이고 있는 겁니까.’ 하고 생각하다가 ‘아니, 이것보다 더 맞는 말은 없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