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모든 골목 | 변종모
모든 것에서 멀어지기, 그만큼 다시 가까워지기 - 우수아이아, 아르헨티나
지구의 끝이 아니라 세상의 끝이라고 말하는 곳이 있다. 그 말은 지구의 끝이라는 말보다 더욱 절박하게 들리고 조금은 암울하게 읽히기도 한다. 하지만 어떤 신비로움도 깃들어 있어 나는 오래도록 그곳에 대한 궁금함을 지니고 있었다. 태어나서 죽는 순간까지 우리가 만나는 모든 것에는 시작이 있고 끝이 있다. 나는 세상의 끝을 한 번쯤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두 발로 디뎌보고 싶었다.
세상의 끝. 그곳은 아르헨티나의 남쪽, 더 이상 이어질 땅이 없는 곳에 자리한다. 비탈진 만년설 아래로 넝쿨처럼 얽힌 골목에서 나는 지금 땅이 끝나는 지점을 보고 있다. 검은 구름들이 바람에 바삐 밀리며 움직이고 그 아래에서 바다는 끝없이 일렁인다. 세상 끝의 골목에 걸려 있는 아득한 풍경들. 당신도 어쩌면 멀고 먼 지구의 반대편으로 달려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마음이 먼저 가면 결국 몸도 닿게 된다. 삶을 통해 나는 그 사실을 배웠다. 끝이라는 말이 이토록 절실할 줄이야.
실망도 희망도 끝내는 내가 책임져야 할
누군가는 그곳까지 가는 건 너무 피곤한 일이라며 만류했다. 세상의 끝이라는 것 이외에 다른 의미는 없을 거야. 그는 이렇게 말했다. 단지 세상 끝에 있는 작은 시골 마을일 뿐이야. 사람들이 그렇게 말할수록 마음은 이미 세상 끝에 서 있었다. 어떻게 가야 할까. 비행기로 날아가는 방법이 있었지만 날씨 때문에 결항이 잦았다. 정확히 떠날 수 있는 날을 알 수가 없었다. 버스를 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사실 짧은 비행으로 세상의 끝에 닿기는 싫다는 마음도 어느 정도는 있었다. 세상의 끝인 만큼 그에 걸맞은 노력을 들이고 싶었다.
엘 칼라파테El Calafate에서 출발한 버스는 아르헨티나를 잠시 벗어났다가 칠레로 접어들었다가 다시 국경을 넘어 아르헨티나로 갔다. 그렇게 스물두 시간을 버스에 시달린 끝에야 나는 겨우 내릴 수 있었다. 아니, 내릴 수밖에 없었다. 버스는 더 이상 남쪽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나아갈 길이 없었기 때문이다. 버스가 멈춘 곳, 그곳이 땅의 끝이었다. 스산한 밤바다 소리가 세상을 오래 경험한 사람의 목소리처럼 들려왔다. 하지만 그 소리는 두렵지 않았다. 내 의지로 흘러와 닿은 땅끝의 밤은 덤덤하기만 했다.
고개를 들면 티에라 푸에고 국립공원의 설산이 땅끝 전체를 지휘하듯 장쾌하게 펼쳐지고 있었다. 드문드문 빗방울이 날리던 작은 마을은 내가 살던 세상의 반대편에 존재하고 있었다. 나는 모든 것에서 가장 멀어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계절도 공기도 시간도 모든 것이 반대로 흘러가는 곳. 밤은 사무치게 추웠고 사람들은 두꺼운 옷으로 무장한 채 과묵하게 서 있었다. 내가 떠나온 곳은 여름이었지만, 내가 서 있는 곳은 겨울이었다.
낯선 첫날 밤을 지내고 맞은 아침. 전날 밤의 어색함은 온데간데없다. 창 너머 가느다란 골목이 나 있었고, 골목은 세상의 마지막 부분을 향해 희미하게 이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골목이 끝나는 곳에 바다가 있었다. 어쩌면 그 지점에서 바다는 다시 시작되고 다음 세계로 이어질 수도 있을지 모른다는 멍청한 생각도 잠시 했다. 공기는 계절과 상관없이 청정했다. 이것이 세상 끝에서나 가능한 청량감일까. 그날 아침 공기의 감촉을 나는 아직도 이렇게 기억하고 있다. 청량한 공기를 가슴 속으로 잔뜩 밀어 넣으며 나를 만류하던 자들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러고는 세상 끝의 골목에 걸려 있는 아득한 풍경들. 당신도 어쩌면 멀고 먼 지구의 반대편으로 달려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마음이 먼저 가면 결국 몸도 닿게 된다. 삶을 통해 나는 그 사실을 배웠다. 끝이라는 말은 이토록 절실할 줄이야.
이곳은 최남단에 존재하는 땅이라는 지리적 특수성 또는 남극으로 가기 위한 관문이라는 목적성을 제외하더라도 인내심을 가지고 한 번쯤 와야 할 이유가 충분히 있는 곳이다. 사방 어디를 둘러보아도 바다가 풍경의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 바다와 마주한 설산의 장엄한 풍경도 환상적이다. 산 아래로 낮게 펼쳐지는 유럽풍의 아름다운 집들의 군락은 한 폭의 그림처럼 보인다. 세상 끝 추운 여름에 이토록 따뜻한 그림이 걸려있을 줄이야.
젊은 여행자들은 몇 날 며칠 동안 국립공원으로 트레킹을 떠난다. 힘들고 고생스럽기는 하지만 그들의 가슴에 새겨지는 환상적인 풍경은 그 수고의 백배를 보상해 주고도 남아서, 몇 번이고 이곳에 다시 트레킹을 하러 오는 사람들도 많다고 한다. 트레킹을 하지 않는 사람들은 항구에서 보트를 타고 비글 해협에 있는 작은 섬으로 간다. 1998년에 개봉한 왕가위 감독의 영화 ⟨해피 투게더⟩에 나왔던 붉은 등대를 보기 위해서다. 원래는 바다사자와 가마우지로 유명한 섬이지만 왕가위 감독 덕분에 등대가 더 유명해져 버렸고, 이젠 우수아이아의 상징이 되었다. 실제로 내가 간 식당 주인은 세상 끝 등대는 다녀왔냐고 묻기도 했다.
세상 끝 식당의 주인과 인사를 나눈 뒤 마을 안쪽으로 걸어가다가 독특한 박물관 하나를 만났다. 줄무늬 죄수복을 입은 사내의 벽화가 눈길을 끄는 곳이어서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마르티모 박물관이었는데, 1920년 감옥으로 지어졌다가 해군 병원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지금은 세상의 모든 감옥에 관한 다양한 전시물을 갖추고 방문객을 맞이하고 있다. 실제로 예전 감옥 그대로 보존된 건물에 들어가 감옥 체험을 해볼 수도 있다. 세상 끝에 와서 잠시 그곳에 갇혀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하는 마음이 들기도 했다. 잠시 동안의 감금을 자처해 자신도 알지 못하는 세상의 죗값을 치른다면 좋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나는 얼마나 오랜 시간 갇혀야 할까? 설령 잠시 갇혔다가 풀려난다고 해도 세상 끝의 일은 나만 아는 일이니 상관없지 않겠는가. 그러니 세상 끝에서 잠시 스스로를 용서하는 시간을 가지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이 밖에도 이곳 역사가 고스란히 설명된 세상 끝의 박물관과 남부 아르헨티나에 거주했던 야마나족의 원시 문명을 소개한 야마나 박물관도 둘러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