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TI를 향한 진짜 내 마음은 뭘까?
인간이 싫다. 하지만 인간이 좋다. 정말 자주 하는 생각입니다. 하루의 절반 정도는 ‘아 역시 (나 포함) 인간 너무 싫다’는 생각으로 살아가고 아주 가끔은 ‘그래도 인간 너무 귀여워’라고 생각해요. 후자는 2주에 한번 정도 드는 생각이지만 그 정도면 꽤 자주 아닐지요? 인간 한 명이 짜증나는 짓을 하면 전체를 싸잡아 욕하게 되고 후자는 많은 인간이 멋지고 귀여운 짓을 할 때야 겨우 드는 생각이니 불공평할 수 밖에 없습니다. 어쨌든 인간은 너무 징그럽고 싫고 또 귀여운 존재입니다.
이 두 가지 생각이 동시에 들 때가 있는데요, 그건 바로 각종 인간 분류법을 마주할 때입니다. 인간의 속성을 몇 가지로 나누고 그 타입을 분석하는 놀이(?)는 언제부터 시작된 것일까요? 혈액형별 성격 분류 이전에도 그런 놀이가 있었을까요? 실제로 인간을 분류해버리는 계급제나 인종차별이 사라진 뒤에야 이런 놀이가 놀이로 작동하기 시작한 게 아닐까요? 누군가 연구해주셨겠죠 아마… 
어쨌든 제가 접해본 유형별 분류 놀이만 해도 한가득입니다. 우선 유구한 역사와 전통의 혈액형 분류법이 있겠고, 비과학성을 이유로 온갖 비난의 철퇴를 맞고 사라진 그 자리를 은근슬쩍 MBTI가 채웠습니다. 처음 MBTI라는 걸 접한 때가 2000년대 초중반이었는데 그땐 이 친구가 이렇게 한 나라를 휩쓸 줄 몰랐죠. 크게 보면 사주와 음양오행 - 이라고 하는 거 맞는지를 모르겠네요. 사주에 목이 많고 하는 이야기 - 도 인간 유형 분류법에 들어가겠고 에고그램이니 뭐니 하는 성격 유형 검사도 많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건 호그와트 기숙사 분류나 호사분면, 똑게멍부 같은 우당탕 말도 안 되지만 분석 자체가 웃긴 종류고요. 특히 저는 4사분면을 그릴 수 있는 분류에 환장합니다. 한때는 특정 연령대의 한국인을 고양이-강아지, god-신화라는 두 축의 선호로 분류할 수 있다는 주장이 제 친구들 사이에서 인기였어요.
4사분면, 손글씨, 일 잘할 것 같은 글씨체, "호로새끼"의 시원함까지... 최고의 분류. 
누구는 ENFJ이고 누구는 사주에 불이 많고 하는 이야기보다 ‘내 생각에 넌 확신의 래번클로인데 말이야…’로 시작하는 대화가 훨씬 웃기다는 건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될 것 같지만, 또 각각의 성격 유형 분류법은 나름의 웃긴 추억을 담고 있습니다. 이거 솔직히 한국인만 누릴 수 있는 웃음이 아닐까 싶은데 이것도 누군가 연구해주셨겠죠…
싸이월드와 흥망성쇠를 함께 한 혈액형별 성격 분류는 저를 매우 짜증나게 했습니다. 그건 저의 동생이 거의 10년 가까이 혈액형 성격 맹신자였고 저는 A형 동생은 B형이었기 때문입니다. 초등학교 때부터 고등학교 때까지 뭐만 하면 “역시 A형 ㅉㅉ”을 들었다고 생각해보세요. 그야말로 모기 같은 앵앵거림입니다. 이 짜증은 동생이 고등학교에 다니던 어느 날 과학 시간에 혈액형 검사 실습을 한 날부터 사라졌습니다. 본인도 A형이었던 것으로 밝혀져… 
그로부터 멀지 않은 어느 시점부터 혈액형과 성격은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진리의 목소리가 커졌고 그렇게 혈액형 이야기는 자취를 감추게 되었습니다. 조금 다른 이야기지만 영화 <달콤살벌한 연인>에서 남자 주인공이 혈액형 성격을 맹신하는 여자 주인공에게 엄청 화를 내면서 윽박지르는 장면이 나오거든요. 너무 심하게 화를 내길래 그 장면을 보고 괜히 머쓱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니가 뭔데 그렇게 화를 내냐… 아니 나도 믿는 건 아닌데…
MBTI는 각종 성격 테스트로 변주되어 거의 수백 수천 개의 테스트를 탄생시킨 것 같습니다. 공해에 가까운 수준이죠. 저는 할 때마다 똑같은 게 나와서 흥미를 잃은지 오래고요. 아무래도 결과가 달랑 4개인 혈액형보다는 16개나 되는 MBTI가 더 재밌긴 하죠. 에고그램은 243가지 결과를 보여주지만 그건 또 너무 많아서 이러니 저러니 말을 덧붙이기 어렵고요. 이제는 MBTI도 아이스브레이킹 소재 1위의 왕좌에서 내려올 준비를 해야 할 텐데 딱히 그 자리를 채워줄 후보가 등장하지 않네요. 저는 언젠가, 그 누군가 사주와 MBTI를 결합해서 돈을 벌기 시작한다면 재벌이 될 수 있을 거라고 굳게 믿습니다. 물론 그게 저는 아니겠지만 누군가 꼭! 해주셨으면 좋겠어요. 
실제로 누군가 이미 MBTI와 호그와트 기숙사를 결합해놨습니다. 사주+MBTI도 꿈이 아닙니다. 

혈액형이나 MBTI, 사주팔자(?)처럼 결과가 정해져 있는 분류들은 정말 대화를 시작하는 용도로만 써먹을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어딘지 허술하고, 내가 원하는-내가 본 상대의 모습을 덧씌울 수 있는 분류가 더 웃기잖아요. 한 사람을 놓고 “##이는 당연히 후플푸프지”, “아닌데? 그리핀도르도 있는데?”, “케드릭(아무래도 세드릭은 입에 안 붙죠) 디고리도 후플푸프 거든요?” 하는 재미는 절대 놓칠 수가 없습니다. “제 MBTI요? INTJ요.” 이건 여기서 끝이잖아요. 너무 우기나요? 해리포터에 집착하는 MBTI 유형도 따로 있나요? 
사실 이런 분류법은 다 일종의 불안 억제책일 겁니다. 내 앞의 이 사람이 궁금하고 무섭고 모르겠을 때, 이런 유형이니까 이런 사람이겠지 이런 행동과 말을 하겠지 예상하고 안심하기 위한 수단이요. 또 누군가 어떤 행동을 했을 때 그 이유를 추측할 수 있다는 건 그 자체만으로 얼마간의 안심을 주잖아요. 한 사람이라는 세계를 탐험할 때 그 세계가 완전히 미지인 것보다는 어느 정도 밑그림이 그려져 있는 게 여러모로 편할 거고요. 그 밑그림이 오히려 내 눈을 가린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거기까지는 개인의 역량에 맡기겠습니다.
요즘엔 MBTI가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한 수단으로도 많이 쓰이던데 그것도 미움 받으면 어떡하지, 하는 불안을 억제해주니 나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애써 머쓱하게 “나 I라서…(수줍게 웃기)” “T라서 공감을 잘 못해요(짜증나는 표정)” 이런 말들을 하는 것도 인간의 귀여운 점 하나인 것 같아요. 어떻게든 좋은 관계를 이어나가고 싶어 하는 거요. 상대방이 나를 이해해줬으면 좋겠고 싫어하지 않았으면 좋겠는 마음. 
이런 각종 성격 유형 검사보다 더 해로운 건 실제로 오랜 관계를 지속한 사람들 사이의 오만이 아닐까 합니다. 나는 너를 알고, 너는 이런 사람이니까 이렇게 행동할 거고/해야 하고, 나와 너의 관계는 이런 방식으로 전개되어야 한다는 오만은 언제나 참 위험하죠. 요즘은 이런 캐릭터까지도 특정 성격장애의 이름을 붙여 유형화하는 게 유행인 것 같지만요. 사람들은 왜 이렇게 라벨링을 좋아하는 걸까요? 갑자기 또 인간 싫어의 굴레에 빠지려고 하네요. 

휴일에 <공룡의 이동경로>라는 소설집을 읽었습니다. 거기 나오는 인물들은 스스로를, 그리고 주위 사람들을 참 잘 알고 있더라고요. 너무 명확하게 설명해줘서 저는 그 인물들을 상상할 필요조차 없이 가깝게 느꼈습니다. 실제로 너와 내가 함께 알고 있는 어떤 사람에 대한 설명인 것 같아서요. 이 책을 읽은 사람들에게 “주희 MBTI 뭘 것 같아?”라고 물으면 대부분 같은 답을 내놓을 것 같다… 는 생각이 들었고, 이 생각에 깜짝 놀라서 그만 구구절절 성격 유형 분류법 이야기를 풀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정말 좋은 책이었어요! 최근 안온 다정 무난 따뜻한 한국 소설에 진절머리를 내고 있었는데 그보다 시니컬해서 좋았습니다. 무엇보다 뿔이 세 개나 있는 트리케라톱스라니 너무 귀엽잖아요. 인간은 역시 귀엽고, 귀여운 걸 좋아한다는 점이 특히 그렇습니다. 
이제 이틀만 더 힘을 내면 주말이에요. 일하다가, 공부하다가 지치고 심심하면 MBTI랑 사주를 결합한 사업 아이템 한번씩 고민해보세요.(집착 레전드) 혹시 알아요? 대박나서 오늘을 곱씹게 되실지🤗

[추천합니다😎]
  • <최강야구 시즌1: 충암고 편>
주말 내내 생리통에 몸부림치며… 누워서 <최강야구>를 봤습니다. 야구 아예 모르고 관심도 없는데 굳이 왜 그랬을까요? 놀랍게도 아직 슬램덩크에서 헤어나오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최강야구> 시즌1에 한국 고교야구의 산왕공고 충암고가 나오거든요. 그냥 기합이 빡 들어간 고교 운동부의 기세를 구경하려고 봤네요... 난 너무 아프고 힘이 없어... 
사실 이번주에 추천하고 싶은 콘텐츠는 따로 있는데요(?), 영화 <성적표의 김민영>입니다. 넷플릭스에 있어요. 스무 살 이후 친구와 멀어진 경험이 있으시다면, <우리들>을 좋아하셨다면 무조건 취향에 딱 맞으실 거예요. 슬슬 꺾여가는 여름을 아쉬워하며!
이민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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