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가 시작되었다. 오랜만에 땅을 흠뻑 적시는 비가 반가웠다. 비가 오기 직전까지 유독 심술을 부리던 더위 탓인지 살에 와닿는 시원한 빗방울이 싫지 않았다. 비가 오면 늘 그랬듯 우산 하나 들고 무작정 걸으러 나갔는데, 순식간에 무섭게 쏟아지다 순식간에 그쳐버리는 도깨비 같은 하늘의 변덕에 당황해서 집 앞에서 쌀국수 한 그릇 먹고는 들어와 버렸다.

기다려온 비와 함께 더 기다려온 종강이 왔다. 기말 과제들을 후다닥 끝낸 뒤 한 학기 동안 메말라온 나의 몸과 마음을 돌보려 잠시 부모님 댁에 다녀오기로 했다. 아침 일찍 부산에 가는 기차에 올랐다. 비는 내리지 않았지만 따뜻한 공기를 짓누르는 비구름 덕에 후덥지근했다. 기차에서 괜히 창밖을 바라보는데, 한 학기를 무사히 끝냈다는 후련함과 무심하게 흘러가 버리는 시간에 대한 두려움이 내렸다 그쳤다 반복하는 변덕스러운 비처럼 교차했다.

주말이 되자 비가 그치는 듯했다. 하늘은 종일 회색빛만 드리우긴 했지만. 이렇게 싱겁게 끝나버리나 싶었는데, 밤이 되자 빗방울이 한두 방울씩 떨어지기 시작하더니 다시 보슬보슬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엄마와 마당에 나와 처마 밑에 의자를 놓고 나란히 앉았다. 맥주 한 잔씩 하면 딱이겠는데, 라는 말을 하기가 무섭게 엄마가 냉장고에 하나 남은 맥주를 꺼내왔다.

맥주 한 캔을 둘이 사이좋게 나누어 마시며 가만히 빗소리를 들었다. 유독 고요한 밤이었다. 침묵의 밤을 가득 채우는 그 빗소리가 너무 귀해 음악도 틀지 않고, 조심스레 맥주를 홀짝이며, 엄마와 한참을 이야기했다. 깜깜한 밤 속으로 흘려보낸 대화는 담백해졌고, 둘 사이의 침묵은 빗소리가 채워주었다. 한 캔밖에 남지 않은 맥주만큼이나 아쉬운 짧은 시간이었지만, 온전하다고 느낀 시간이었다.

우리는 낮게 드리운 먹구름과 눅눅한 공기 속을 지나고 있다. 아직 지나가지 않은 장마전선과 걷히지 않는 짙은 구름은 앞으로 또 얼마나 많은 비를 뿌릴지 알 수 없다. 한낮의 무더운 공기를 가두어버리는 비구름 탓에 6월부터 기승을 부리는 열대야는 벌써부터 많은 이들을 잠 못 이루게 한다. 언제까지 헤쳐가야할지 모르는 무덥고 습한 날들의 가운데에서, 비는 처음과는 다르게 반갑지만은 않다. 날씨만큼이나 변덕스러운 내 마음은 이제 비를 기다리는 건지 기다리지 않는 건지 알 수 없다.

그렇다. 여름을 통과한다는 건, 긴 장마를 통과하고, 끝없이 이어지는 무더운 밤낮을 통과한다는 건 힘겨운 일이다. 특히나 올해처럼 갑작스레 들이닥치는 폭우와 폭염의 공격을 견디는 건 어느 쪽이나 기운 빠지는 일이다. 오락가락하는 날씨 속에 마음도 갈팡질팡하며 헤맨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그 강렬한 비와 더위 아래에서 우리에겐 싱그럽고 아름다운 여름의 기억이 더 선명하게 남겨질지 모른다. 어느 고요한 밤의 빗속에서 엄마와 내가 느낀 잠깐의 행복이, 짓궂은 날씨에 대한 원망보다 오래 살아남을지도 모른다.

아, 그리고 정 견디기 힘든 날엔 맥주 한 캔을 까 보자! 조금 견딜 만해질지도…